[서울=뉴시스]권안나 기자 = 기자는 소위 말하는 '애개육아(아이와 반려견을 같이 키우는) 맘'이다.
얼마전 이 금쪽같은 자녀들과 지인이 추천한 근교 대형카페를 방문했다가 웃픈(웃고·울고싶은) 상황에 직면했다. 카페의 한쪽 공간은 '노키즈(아이없는)·노펫(반려동물 없는)존'이고, 다른 곳은 '노펫존'이었던 것이다. 어떤 공간도 타협이 되지 않아, 결국 그날의 찬바람이 허파를 송송 뚫고가는 듯한 공허함을 안고 발길을 돌리는 수 밖에 없었다.
국내 미쉐린 스타 레스토랑 가운데 아이나 반려동물을 동반할 수 있는 곳은 극히 드물다. 부모가 되고 분위기 좋은 식당에서 우아하게 코스 요리를 즐기는 일은 자연스레 남의 일처럼 됐다. 새로 생긴 식당에 아이와 방문했다가 아기용 의자가 없어 발길을 돌리거나, 노키즈 펫말을 보고 조용히 돌아서야 했던 일들도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당시에는 그러려니 했다. "손님들이 싫어해서"라는 점주의 마음이 이해가 됐기 때문이다. 그동안 우리 사회에서는 노키즈·노펫존에 대한 논의가 있을 때면 상업공간의 영업의 자유나 그곳을 이용하는 다른 사람들의 행복 추구권이 보장돼야 한다는 의견이 우세했고, 기자 역시 그런 사고에 매몰돼 있었다.
하지만 반복되는 '배척'을 직접 겪고 나니 사회적 약자에게 가하는 '차별'이라는 생각도 지울 수 없었다. 이들이 공간에 있는 것 만으로도 "피해를 입힐 것이 예상돼 배제한다"는 전제. 이것은 결국 아이가 있다는 이유만으로 부모들 역시 '죄인'으로 만들고, 고립을 초래한다. 아이 가진 가족의 선택권을 좁히고 행동반경을 위축하고 있는 것이다.
'노썸바디(No Somebody)'에 대한 인식은 대상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가 시발점이다. 특정 범주에 대한 차별이 당연시되는 논리는 결국, 노키즈를 넘어 노유스(청소년 없는), 노시니어(고령자 없는) 등 다양한 양상의 균열을 조장하는 듯한 모습으로도 확장됐다.
아이와 펫을 '시끄럽거나', '불편하거나', '지저분한' 존재로 여기기 보다는 함께할 구성원으로 바라봐야 한다. 무를 자르듯 "어느쪽의 권리가 더 중요하다"는 접근법보다는 공존에 대한 고민이 필요한 시점이다.
물론 부모들의 노력이 전제조건이다. 식사 후 아이가 사용하며 지저분해진 업소의 아기 의자를 닦고, 아이가 바닥에 흘린 음식을 수거하는 등 어찌보면 당연한 도의들을 이행해야 한다. 공공예절 교육을 장려하고, 이에 따른 베네핏(혜택)을 보장하는 등 사회적 합의점을 찾으려는 노력도 시도돼야 한다.
문득 5년여전 출장 일정으로 독일 베를린에 머물며 접했던 풍경들이 떠오른다. 반려견의 목줄을 끌고 5성급 호텔의 로비와 엘리베이터를 자연스레 드나드는 투숙객들이 심심찮게 있었다. 길거리를 다니다 보면 호텔 정문과 상점 앞 모퉁이에 산책하는 반려견들이 목을 축일 수 있도록 물을 담아둔 그릇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어른과 함께 코스 요리를 당당히 즐기던 아이들의 편안하고 행복한 얼굴도 생각난다.
그곳에 있던 아이들은 우리 아이들과 유전자가 달라서 가능한 일이었을까. '노키즈'를 외치는 사회와 '예스키즈(Yes Kids)'로 포용하는 사회의 아이들이 자라 만드는 세상의 간극은, 나날이 더 벌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