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여름이 유난히 길게 이어졌다. 그런 탓에 나뭇잎이 늦게서야 가을 색을 입을 수 있었다.
그러나 겨울은 왜 이리 서둘러 오는 것인지. 홍엽(紅葉)은 미처 만산(滿山)하지 못한 채 이른 북풍에 하나둘 지고 있다.
하지만, 슬퍼하지 않아도 된다. '만추'(晩秋)엔 이 또한 '매력'이기 때문이다.
프랑스 시인 겸 문학 평론가 레미 드 구르몽(1858~1915)이 시 '낙엽'에서 '시몬'에게 "좋으냐?"고 물었던, 길에 쌓인 낙엽을 밟을 때마다 들리는 '바스락' 소리 때문만은 아니다.
낙엽 위 걸음마다 신발을 넘어 느껴지는 감촉, 그리고 낙엽 하나하나가 마치 올 한 해 내가 보낸 시간의 편린(片鱗)인 것과 같은 착각까지 다 그렇다.
그런 곳을 찾고 싶은 마음을 알았던 것일까. 한국관광공사가 '11월에 가볼 만한 5곳'을 꼽았다. 바로 ‘낙엽 밟으며 걷는 길’들이다.
[서울=뉴시스]김정환 관광전문 기자 = 경남 함양군은 북쪽으로 덕유산, 남쪽으로 지리산에 안긴 듯한 형세답게 지역의 약 80%가 산지다. 그래서인지 계절마다 나무들의 다채로운 향연이 곳곳에서 펼쳐진다.
함양읍 한가운데에도 울창한 숲이 있다. 바로 '함양 상림'(咸陽 上林)이다. 8.93ha(약 2만7000평) 규모 대지에서 120여 종,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자란다.
함양의 색을 가장 뚜렷하게 발견할 수 있는 곳이다. 자연 환경, 역사, 인물 등을 아우르는 이야기가 오롯이 담긴 장소여서다.
함양군에서는 '상림 사계'를 '함양 8경' 중 '제1경'으로 꼽는다.
함양 상림은 국내 최고(最古) '인공림'이다. 신라 제51대 진성여왕(? ~898) 시절 함양 태수로 부임한 고운 최치원(857~? )이 조성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함양읍 중앙을 흐르는 '위천'에선 매년 홍수가 발생해 백성의 피해가 극심했다. 최치원은 이를 해결하기 위해 강 옆으로 둑을 쌓고, 이를 따라 나무들을 촘촘히 심었다. 이후 홍수를 막은 것은 당연하고, 나무마다 도토리가 가득 열려 백성의 배고픔도 달래줬다.
훗날 큰 홍수로 중간 부분이 유실돼 '상림'과 '하림'(下林)으로 나뉘어졌다. 하림은 이후에도 많이 훼손됐으나, 상림이 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전체적으로 상림이라고 불리게 됐다.
함양 상림은 1962년 '천연기념물'(제154호)로 지정됐다.
몇 해 전 숲 주변으로 공연 무대와 전시관 등 시설물이 생기더니 '상림공원'이 됐다. 그래도 주민들은 여전히 '상림숲'이라고 부른다.
공원 입구 관광 안내소와 야외 무대를 지나면, 위천 흔적 옆으로 울창한 숲길이 1.6㎞가량 이어진다.
완연한 가을엔 활엽수 낙엽이 알록달록한 카펫을 펼쳐놓는다.
숲으로 들어서는 곳에 2층 누각이 있다. '함화루'다. 함양 읍성 '남문'이다. 삼문(三門) 중 유일하게 남았다.
조선 시대엔 "정자에 서면 멀리 지리산이 보인다"고 해서 '망악루'(望岳樓)라는 이름이었으나, 일제 강점기인 1932년 지금의 자리로 옮기면서 이름이 바뀌었다.
아담한 정자들과 길 중간 약수터는 숲의 자그마한 쉼터다. 조선 제26대 고종 8년(1871)에 세워진 '함양 척화비', 1923년 경주 최씨 문중이 건립한 '함양 최치원 신도비' 등도 볼 수 있다.
"남녀의 사랑이 이뤄진다"는 의미를 지니는 '연리목'은 종종 발견된다. 그런데, 상림엔 색다른 연리목이 있다. 느티나무와 개서어나무, 수종이 서로 다른 두 나무가 합쳐진 연리목이다.
숲 주변 공원 시설도 둘러볼 만하다. 공연 무대와 음악 분수, 특산물인 '산삼'을 주제로 한 전시관과 최치원의 뜻을 기리는 '역사 공원' 등이 자리한다.
주변 관광지로는 지곡면 '개평 한옥마을'이 대표적이다. '선비의 고장'인 함양을 상징하는 곳이기도 하다. 마을엔 지어진 지 100년이 넘은 한옥 60여 채가 있다.
조선 전기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정여창(1450∼1504)의 '일두 고택'도 그중 하나다. 사랑채 앞 멋진 소나무 등 사대부가의 기품이 곳곳에 스며있다. '미스터 선샤인' '녹두전' 등 TV 사극에도 등장했다.
일두 고택 앞에 '솔송주 문화관'이 터를 잡았다. 정여창 집안에서 500년간 담가온 '가양주'를 시음하고, 양조도 체험할 수 있는 곳이다.
차로 5분 거리인 수동면에 '함양 남계서원'이 있다. 정여창의 뜻을 기려 세워졌다.
2019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9개 서원 중 하나다.
강당을 앞에, 사당을 뒤에 배치하는 서원의 전형적인 배치 형식을 처음 도입한 곳이다.
끝으로 서하면 '함양 대봉산 휴양 밸리'도 들러보자. 대봉산(1228m) 절경을 '집라인'과 '모노레일'로 즐길 수 있는 곳이다.
중턱인 해발 744m 지점에서 모노레일을 타면 정상에 이르는 3.93㎞ 구간에서 대봉산 단풍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 집라인은 국내 최장인 3.27㎞를 '비행'하며, 엄청 스릴을 선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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