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한테 편지라도 써주고 싶어"…일흔 넘어 한글 앞으로[현장]

기사등록 2024/10/09 06:00:00

최종수정 2024/10/09 06:46:15

70~80대 어르신들 모인 한글배움교실 현장

어릴 적 한글 배우지 못해 아쉬운 마음 풀러

"손으로 집 주소, 이름도 쓸 수 있어 행복해"

[서울=뉴시스] 지난 8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주민센터 1층에서 열린 한글배움교실에서 어르신들이 받아쓰기를 하고 있다. 2024.10.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지난 8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주민센터 1층에서 열린 한글배움교실에서 어르신들이 받아쓰기를 하고 있다. 2024.10.09.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이수정 기자 = "어느 날, 여기서 '느'는 느타리버섯 할 때 '느'예요."

"장난을, 이건 '된장, 고추장 할 때 '장'이에요. 한 번 읽어볼게요."

나이가 지긋한 어르신들이 한 자리에 모여 연필을 들었다. 모르는 단어를 익숙한 단어로 풀어내고, 받침을 여러 차례 설명하느라 시간은 오래 걸렸지만 지치는 기색 없이 문장을 적어 나갔다. 또박또박 적어나간 한글이 노트에 빼곡히 적혔다. 어르신들은 그럼에도 못 내 아쉬운 지 "ㄱ이 아니고 ㄴ이었어" "하나 틀렸네"하고 얘기를 나눴다.

지난 8일 오전, 받아쓰기 시험이 한창이었던 공항동 주민센터의 한글배움교실을 찾았다. 서울 강서구청에서 운영 중인 한글배움교실은 총 5개 동에서 운영된다. 이날 방문한 교실의 수강생은 스무 명 남짓으로, 대부분 70~80대 어르신들이었다. 이들은 어렸을 적 한글을 배우지 못해 아쉬웠던 마음을 풀기 위해 이곳을 찾았다.

한글배움교실에서 수년째 공부 중인 정동식(75)씨는 한글을 배우기 전에는 은행 업무를 보는 것조차 어려웠다고 입을 열었다. 정씨는 "어릴 때 학교를 못 다니게 하니까 한글을 못 배웠다. 글자를 읽을 수는 있는데 쓰지 못하니 답답한 게 많았다"며 "한글교실에서 배우고 나서는 조금씩 쓸 수 있게 됐다"고 말했다.

정씨는 "한글을 배우니 은행 가서 우리 집 주소도 쓰고, 내 이름도 쓰니 너무 행복하다"며 "손주들이 학교에 있을 때는 휴대폰을 꺼두는데, 이제 문자를 남길 수 있어서 좋다. 소통이 되니 그게 너무 좋다"고 연신 강조했다.

[서울=뉴시스] 지난 8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주민센터 1층에서 열린 한글배움교실에서 한 어르신이 받아쓰기 한 노트. 2024.10.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지난 8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주민센터 1층에서 열린 한글배움교실에서 한 어르신이 받아쓰기 한 노트. 2024.10.09. [email protected]
어릴 적 학교에 다니지 못해 뒤늦게 한글수업을 찾은 염모(78)씨도 "한글을 잘 모를 땐 서울역에서 전북에 가는 열차를 타도 맞게 탄 건지 알 수가 없으니 너무 답답하고 '집에 갈 수는 있을까' 걱정이었다"며 "애들 학교에서 불러서 갔을 때도 뭐가 좋은지 나쁜지 알 수가 없으니 답을 못하겠더라. 그럴 때 너무 속상했다"고 과거를 회상했다.

한글을 모른다는 사실이 부끄러워 공부한다는 사실을 숨기는 어르신도 많다고 했다. 이달선(73)씨도 처음에는 '부끄럽다'는 생각을 한 적 있다고 털어놨다. 이씨는 "내 이름만 겨우 쓰니까 자존심도 상하고 애들한테도 창피한 적도 있었다"면서도 "이제 나이가 드니까 창피한 게 뭐가 있겠나 싶다. 그냥 배우면 되는 것 아니겠냐"고 웃으며 말했다.

한글 받침이 가장 어렵다는 이씨는 받침을 잘 쓸 수 있게 되면, 자녀와 손주들에게 편지를 써보고 싶다고 했다. 그는 "말로는 못 하는 말들이 있지 않나. '너희들을 만나서 반갑고 좋고, 참 즐겁다' 이런 말을 적고 싶다"며 "이때까지 '할머니' 하면 반찬 가져다주는 것만 기억났는데, 이젠 손녀가 자기도 할머니처럼 되고 싶다고 한다"고 말했다.

[서울=뉴시스] 지난 8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주민센터 1층에서 열린 한글배움교실에서 어르신들이 받아쓰기를 하고 있다. 2024.10.09.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지난 8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주민센터 1층에서 열린 한글배움교실에서 어르신들이 받아쓰기를 하고 있다. 2024.10.09. [email protected]
이날 한글 수업은 약 2시간 동안 이어졌다. 책상 앞에 서서 한글을 가르치던 김수정 강사는 10년이 넘도록 이 일을 하고 있지만, 여전히 매 수업마다 수강생들이 즐거움을 얻어갔으면 하는 마음이 크다고 강조했다. 김 강사는 "받아쓰기 한 두 개만 틀려도 속상해하시는 모습을 보이곤 하는데, 공부가 원래 어렵지 않나. 재미를 느껴야 한다"고 말했다.

가장 보람찬 순간을 묻자 그는 "초급반이 중급반으로 올라가고, 중급반이 고급반으로 올라갈 때 '그래도 내가 잘 가르쳐드렸구나'하는 생각이 든다"며 "보통은 자신이 없다고 한 반에 계속 있는 경우가 많은데, '용기를 가지고 한번 해볼게요' 하고 다음 반으로 넘어가면 보람차고 뿌듯하다"고 전했다.

한편 이날은 578돌을 맞은 한글날이다. 한글날은 우리 글자인 한글의 우수성을 기리기 위해 국경일로 지정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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