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때 교사 8명 때려죽였다"…中 홍위병의 상징 쑹빈빈 사망

기사등록 2024/09/19 10:59:37

최종수정 2024/09/19 13:48:24

[서울=뉴시스] 중국의 문화대혁명(1966~76년) 당시 교사 구타 등 폭력을 주도했던 홍위병의 상징인 쑹빈빈(宋彬彬)이 16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77세. (사진= 엑스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중국의 문화대혁명(1966~76년) 당시 교사 구타 등 폭력을 주도했던 홍위병의 상징인 쑹빈빈(宋彬彬)이 16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77세. (사진= 엑스 캡처)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최윤서 인턴 기자 = 중국의 문화대혁명(1966~76년) 당시 교사 구타 등 폭력을 주도했던 홍위병의 상징인 쑹빈빈(宋彬彬)이 16일(현지시각) 미국 뉴욕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향년 77세.

쑹빈빈은 중국 혁명원로이자 인민해방군 최초의 상장(上將)인 쑹런충(宋任窮)의 딸로 문화대혁명 때 베이징사범대부속여중의 학생으로 교사를 공격하는 내용의 대자보를 처음 붙이는 등 폭력 시위를 주도했다.

또한 그는 문화대혁명 초기인 1966년 8월18일 천안문 성루에 올라 마오쩌둥 전 주석의 팔에 직접 홍위병을 상징하는 붉은 완장을 채워준 인물로도 유명하다.

당시 마오 주석은 쑹의 이름에 '빈'이 논어에 실린 겉과 속이 조화를 이룬다는 의미인 "문질빈빈(文質彬彬)의 빈인가?"라고 물었고, 쑹이 "그렇다"고 답하자 마오 주석은 "무력이 필요하지 않나(要武?)"고 말했다. 이때부터 쑹은 '야오우(要武)'로 개명했다.

쑹은 마오 주석에게 새로 이름을 받은 직후 "내가 평생 잊을 수 없는 하루였다"며 "위대한 뜻의 이름을 얻었으며, 마오 주석은 우리에게 방향을 밝혀줬다. 우리는 폭력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이후 그는 학생이 교사를 구타하고,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는 등 전국적 무장투쟁을 선동하며 폭력 시위를 주도했다. 홍콩 명보에 따르면 당시 고등학생이었던 쑹이 모교의 볜중윈(卞仲耘) 교감 등 7~8명을 직접 구타해 숨지게 했다는 설도 돌았다.

쑹은 부친 쑹런충이 자본주의를 추구하는 '주자파(走資派)'로 몰려 박해를 받은 것과 관련, 유학을 명목으로 80년 미국으로 이민했다. 이름도 쑹옌(宋巖)으로 바꿨다.

그렇게 세월이 지나 2014년에야 다른 홍위병과 함께 모교를 찾아 은사에게 잘못을 빌었다. 그는 교정의 볜중윈 교감 흉상에 머리 숙여 사과한 뒤 "학교 질서를 앞장서 파괴하고 선생님들을 괴롭혔다"며 약 1500자 분량의 '나의 사죄와 감사'라는 제목의 글을 읽었다.

공개 사과문에서 그는 "오랫동안 직접 뵙고 참회하는 기회를 희망해 왔다. 문화대혁명은 한바탕의 대재앙이었다"며 "한 나라가 어떤 미래로 나아가느냐는 자신의 과거를 어떻게 마주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했다.

그러나 볜 교감의 유가족은 쑹의 사과를 거부했다. 볜 교감의 남편인 왕징야오 전 중국과학원 역사 연구원은 "볜 교감이 죽은 지 48년이 지났지만, 당시 일을 계획하고 사람을 죽인 이들은 여전히 법을 어기고도 아무런 제재를 받지 않은 채 자유롭게 살고 있다"며 "사건이 진상이 밝혀질 때까지 홍위병의 거짓 사과를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편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홍위병의 이름을 한 중국의 상당수 중고생들과 대학생들에게 살해당하거나 박해 받아 사망한 사람은 100만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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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때 교사 8명 때려죽였다"…中 홍위병의 상징 쑹빈빈 사망

기사등록 2024/09/19 10:59:37 최초수정 2024/09/19 13:4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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