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한 국가들 각기 다른 속사정과 배경
2차 대전 ‘추축국’ 지원 태국, 신뢰회복 기회로 삼아
에티오피아는 군대 없어 황실근위대 파견
[서울=뉴시스] 구자룡 기자 = 6·25 전쟁이 발생하자 튀르키예에서는 ‘형제의 나라에 전쟁이 났으니 돕자’는 분위기가 일었다고 한다. 1만5000여명이 자원했는데 고등학생들도 참가시켜 달라고 데모까지 했다.
튀르키예는 나토에 가입하기를 원했는데 6·25 전쟁은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었다. 소련이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튀르키예는 1951년 9월20일 나토 창설 멤버 12개 국가 외에 처음으로 그리스와 함께 가입됐다.
그리스 참전 부대의 이름은 ‘스파르타 대대’ 다. 그리스는 2차 대전이 끝난 후에도 소련과 그 위성국의 지원을 받는 국내 공산당 세력과 6년간 내전을 치르고 있어 한국에 동질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스가 참전 후 첫 전투가 벌어진 경기도 이천의 381고지에서 중공군 한 개 연대의 공격을 받고 치열한 백병전까지 치르며 물리쳤다.
태국은 2차 대전 시 ‘추축국’인 독일 일본과 같은 진영에서 싸웠다. 따라서 6·25 전쟁을 통해 신뢰를 되찾을 기회가 필요했다.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가까워 아시아 국가 중 가장 빨리 파병했고 가장 오래 머물러 전쟁이 끝난 후 1972년 철수했다. 파병 당시와 철수 할 때의 부대장이 부자간이어서 화제가 됐다.
필리핀은 6·25 전쟁 4년 전에 독립한 뒤 공산 반란군과 교전 상태에 있어 국내 정세도 매우 불안했다.
그럼에도 국군과 미군이 낙동강 방어선까지 밀려나자 공산군 토벌작전에 투입된 10개 대대 중 한 개 대대를 파견했다.
네덜란드는 보유중인 지상군이 인도네시아에 주둔하고 있는데다 1951년 5월에나 귀국할 예정이어서 정부는 파병에 소극적이었다.
하지만 국내 참전지원자와 언론이 ‘한국참전 지원병 임시위원회’를 결성해 정부에 참전을 강도높게 요구했다. 국민 여론에 따라 지상군 파병이 이뤄졌다.
벨기에와 룩셈부르크는 모두 1949년 영세중립국을 포기하고 나토에 가입했다. 변변한 상비군도 없는 상황에서 두 나라는 통합된 대대를 편성해 한국 파병을 결정했다. 벨기에가 엄격한 기준과 적성검사를 통해 선발한 장병 중에는 전 상원의원이자 당시 국방장관도 포함됐다.
룩셈부르크는 연인원 100명을 파견해 16개 전투 파병국 중에서는 가장 적었으나 당시 룩셈부르크 인구는 20만 명 가량이었다.
아프리카 에티오피아는 2차 대전 때 이탈리아에 무장해제되었고 전쟁이 끝난 뒤에는 황실근위대 정도만이 남아있었다.
하일레 세라시에 황제는 황실근위대에서 1200명을 선발해 수도 인근 한국의 지형과 유사한 곳에서 훈련을 시켜 파병했다.
에티오피아는 ‘전사한 영웅들의 시신은 반드시 수습한다’는 전통이 있어 적진에 남겨두지 않는다. 붙잡힌 동료도 반드시 구해내 포로가 한 명도 없다고 한다.
강원도 춘천의 ‘이디오피아길 1번지’에 있는 참전기념비는 1968년 하이레 세라시에 1세 황제가 친히 제막했다. 한국에 새로 부임하는 에티오피아 대사들은 이곳부터 찾는다고 한다.
아프리카 최남단의 남아공은 206명의 전투비행대대를 파견하되 먼 거리 수송 문제로 항공기나 장비는 없이 병력만 보냈다.
라틴아메리카에서 유일하게 참전한 콜롬비아는 1948년 4월 공산분자들에 의한 최악의 폭력사건으로 참변을 겪었다. 공산 반정부 게릴라 활동으로 내부 사정도 혼란스러운 가운데서도 유엔의 결정에 따라 파병을 결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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