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탈리아 한달살이 떠나 아테네 파르테논 신전까지
[유라시아=뉴시스] 윤종석·박성수 부부화가 = 튀르키예 안탈리아에 도착해서 우리는 한 달 동안 머무를 바닷가 작은집을 구했다. 윤 작가의 버킷리스트라고도 할 수 있는 바닷가 집은 방에서도 거실에서도 푸른 바다가 한눈에 들어왔다. 바다는 아침저녁으로 매일매일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다. 튀르키예는 겨울로 접어들고 있고 저녁 다섯 시가 넘으면 서서히 어두워져 아침 7시가 넘어서도 어두운 새벽을 보여주었다.
작은 우리 집 앞 바다는 어느 날은 무섭게 붉은빛으로, 어느 날은 수줍게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낮에도 검은 푸른색을 띠다가도 여린 속살 같은 밝은 에메랄드 빛깔로 눈을 부시게 했다. 나는 ‘여자 같은 바다’라고 말했다. 폭우가 쏟아지는 날에는 성난 파도가 산책로까지 들이치고, 하얀 물보라가 이를 들어내는 것 같다가도 다음 날 언제 그랬냐는 듯 밝은 햇살을 비추어 해변에 수영하는 사람들을 품어주었다. 문득 지난 오월에 보았던 러시아의 원시 그 자체의 남성미를 발하는 바이칼 호수를 떠올리게 했다.
안탈리아의 한 달 살기는 긴 여행에서 소모된 우리의 에너지를 충전하고, 잠시 멈췄던 드로잉들을 다시 하며 앞으로의 또 다른 여행 계획을 세우는 시간을 보냈다. 충분히 한 달의 시간은 만족스러웠다. 드로잉을 위한 재료들을 더 구하기 위해 안탈리아의 화방을 찾았다. 유럽의 많은 미술관과 갤러리에 비교해 튀르키예는 미술 재료가 다양하지 않다. 그렇지만 튀르키예의 자연의 정말 다양한 얼굴들은 그 자체로 좋은 소재가 되었다. 그만큼 자연과 더불어 많은 유적지로도 매일매일 큰 감동의 즐거움이 있었다.
가지안테프의 아이프칠드런 예술나눔 프로젝트도 튀르키예의 잊을 수 없는 경험이었다. 덕분에 작가로서 그동안 긴 여행에서 생각한 고민과 방향에 대해 다시 정리해볼 수 있었다. 어렵게 찾은 반가운 화방에서 필요한 물감과 붓을 구했다. 한 달 동안 이삼일에 한 번씩 그곳에 들려 재료를 사게 됐다. 다정한 사장님은 말도 잘 통하지 않는 이방인에게 따뜻한 차를 한 잔씩 내주신다. 정겨운 이웃이 되어갔다.
안탈리아의 우리 집은 어마어마한 뷰 맛집이었다. 하지만 튀르키예의 집들이 대부분 그렇듯, 저녁이면 금방 집안이 어둠으로 잠긴다. 더군다나 거실 등의 붉은 갓은 요상스러운 분위기를 만든다. 전기재료를 파는 작은 가게에 들렀다.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사장님은 새로 산 등을 손수 조립까지 해주셨다. 작은 가게 한 켠에서 비가 지나가는 동안 내준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얘길 들었다.
할아버지의 아버지는 한국전쟁의 참전용사였고 86세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이 시절 아버지에게 전쟁 때 사용하셨던 쌍안경을 선물로 받았다며 자랑하셨다. 윤 작가는 한국인은 터키인에게 한국전쟁에 대한 일에 관해서 진심으로 항상 고맙게 생각한다고 전했다. 우리의 가지안테프 이스켄데룬의 아이프칠드런 예술나눔 프로젝트에 대해서도 말씀드렸다. 서로에게 감사하다는 악수도 하며 마음이 뭉클하고 따뜻한 시간이었다. 가게 밖 비는 정말 세차게 왔다. 안탈리아에 와서 본 대단한 비였다. 할아버지는 요즘 튀르키예의 극심한 가뭄에 대해 말하며 지금 내리는 비는 정말 좋은 비라고 하신다. 마침 이곳에 오는 동안 지나온 슐탄한(Sultanhani)의 메마른 호수 세 곳이 떠올라 무척 다행이라고 여겨졌다. 서로의 마음에도 따뜻한 비였다.
매일 아침 해변을 산책하고 그림을 그리고, 요일별로 문을 여는 작은 전통시장에서 장을 봐 음식도 해 먹으며 소소한 일상을 보내던 행복도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12월이 훌쩍 지나며 다시 여행을 떠날 채비를 준비했다. 12월 17일이 지나면 이곳에서 나가 다시 여행을 시작해야 한다. 비쉥겐 90일을 채우게 되고, 다시 쉥겐 유럽 국가의 무비자 90일이 갱신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리스, 이탈리아, 프랑스 남부를 달려 스페인과 포르투갈까지 갈 계획이다.
첫 번째 쉥겐조약 국가인 그리스를 가기 위해 다시 육로를 가로질러 튀르키예 북부로 넘어가는 방법이 아닌, 튀르키에 체스메(Cesme)에서 그리스 섬 키오스(Chios)까지, 그리고 키오스섬에서 아테네 피레아스(Piraeus)까지 가는 페리를 예약했다. 일단 체스메도 하루 만에 갈 수가 없다. 중간 어디쯤 다시 길 위에서 하루를 보내야 한다. 체스메에 도착한 뒤 국경 검사를 안전히 마친 뒤 페리를 타고 50분 정도 걸려 그리스 키오스섬에 입성해야 한다.
그곳에서도 쉥겐조약 계산에 대한 검문과 그리스 국경 검문을 마치면, 다시 부두에서 3시간을 기다린 후 그리스의 피레아스로 가는 대형 여객선을 타고 9시간을 가야 하는 여정이다. 다행히 창문이 있는 침대칸을 예약했으니 별걱정이 없다. 피레아스에 이른 아침 6시 50분쯤 도착하면 20분 거리에 아테네가 있다. 그리스 아테네! 순조로운 다음 여행을 기대하며 여행에 필요한 사소한 것까지 준비하다 보니 시간은 정말 금방 흘러갔다.
드디어 안탈리아 아름다운 우리 옛집을 나와 다시 여행자 모드로 길 위에 섰다. 체스메에 가기 전 우연히 만난 코이체이즈(Koycegiz)라는 작은 도시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시 4시간 넘게 달려 체스메에 도착해 2일을 더 보낸 후 그리스로 향했다. 그리스 키오스섬으로 향하는 바다 한가운데의 깜깜한 망망대해에서 모처럼의 낭만을 맞았다. 흔들거리는 배 안의 작은 침대에 누워 배의 심장 소리를 듣는다. 작은 창밖의 하늘이 새삼 지난 여정과 앞으로의 시간을 되새기게 한다.
아테네에 도착하자마자, 내셔널갤러리뮤지엄(National Gallery - Alexandros Soutsos Museum)을 찾았다. 오랜만에 미술관을 만나니 가슴이 뛰었다. 1층은 19세기 미술작품, 2층에는 20세기, 3층에는 20~21세기 미술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1900년 4월 10일 설립된 이 미술관의 초기 컬렉션은 국립기술대학교와 아테네대학교, 여러 기부로 형성되어 소장품이 20,000점이 넘는다. 그림, 조각, 조각 및 기타 여러 장르가 망라된다. 비잔틴 이후 시대부터 현재까지 시대를 망라한 그리스 미술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주목할만한 서유럽 그림이 소장되었다고 평가받는다. 1954년 국립미술관은 ‘Alexandros Soutzos Estate’와 합병되었다.
두 번째 찾은 미술관은 아테네현대미술관(National Museum of Contemporary Art Athens)이었다. 그리스 역시 경제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어서였을까 별다르게 큰 기대를 하지 않고 들어선 아테네현대미술관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해줬다. 미술관의 큰 규모와 짜임새에 놀라고, 다양한 테마의 현대미술 작품들의 수준에 또 한 번 감탄했다. 오랜 시간 잠들었던 미술에 대한 열망이 자연스럽게 피어나 피로감도 감쪽같이 사라졌다.
다음 날 아침 아테네의 대표적인 랜드마크인 아크로폴리스(Acropolis)의 파르테논 신전을 찾았다. 도시의 가파른 경사를 지나 꼭대기 평원에 위치해 이색적인 경관을 보여준다. 파르테논 신전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제1호 위상답게 아테네의 수호신인 아테네 여신을 봉인한 신전이다. 신전은 여전히 복원 중이었고, 살아생전 복원이 완성된 모습을 볼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었다. 파르테논을 세운 옛 그리스인의 대범함과 수많은 세월을 보내고 복원작업을 이어가는 현재 그리스인들의 자부심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었다.
아름다운 유물들을 전시하고, 일종의 복원과정을 가늠할 수 있도록 보여주는 아크로폴리스박물관으로 향했다. 일부 층에선 유물들의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아쉽긴 했지만, 여러 자료로 파르테논 신전의 완성된 장대한 모습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었다. 박물관을 나와 신티그마 광장(Syntagma Square) 쪽으로 내려와 걸었다. 크리스마스를 앞둔 유럽 도시의 설렘이 뜨겁게 느껴진다. 여러 거리공연의 흥분과 선물 가게들의 반짝임, 거리의 쏟아지는 사람들의 발걸음에서 사랑이 느껴진다. 세상이 반짝일 때, 그만큼 외롭고 어두운 근심과 안쓰러움도 공존할 것 임을 생각하니 씁쓸하다.
떠밀리는 인파 속을 가로질러 그리스 최고의 사립미술관 ‘Basil & Elise Goulandris Foundation’으로 갔다. 매우 현대적인 건물에 20세기 후반의 가장 중요한 미술가들의 작품이 집합되어 있다. 컬렉션은 창립자의 바람대로 모든 사람이 이용할 수 있도록 공개되어 있다. 단 두 명의 손님만을 위해서도 훌륭한 영어가이드 투어도 가능하다고 한다. 모네, 피카소, 반 고흐, 드가, 샤갈, 쇠라, 브라크, 미로, 바스키아, 안젤름 키퍼 등 최고의 인상파 및 현대 예술품이 망라된 특별한 미술관이다.
아쉬운 그리스의 마지막 밤을 보낸다. 내일 아침이면 우리는 그리스의 또 다른 항구도시인 파트라스(Patras)로 떠날 것이다. 그곳에서 다시 이탈리아 바리(Bari)로 가는 페리를 탄다. 이번엔 14시간의 항해가 기다린다. 크리스마스와 새해를 맞을 이탈리아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