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박주연 기자 = "뮤지컬 '올리버'를 보고 있었어요. 갑자기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미제라블'을 뮤지컬화하면 좋겠다는 생각이 떠올랐죠. 마치 번개에 맞은 것 같았어요."
1978년 영국의 한 극장. 작곡가 클로드 미셸 숀버그와 '라 레볼루션 프랑세즈'를 막 마무리하고 다음 작품을 구상하던 프랑스 작사가 알랭 부블리(82)의 머릿속에 번개가 내리쳤다. 세계 4대 뮤지컬로 꼽히는 명작 '레미제라블'이 태동을 시작한 순간이었다.
15일 서울 '한국의집'에서 만난 알랭 부블리(82)는 "레미제라블의 성공이 아직 동화처럼 느껴진다"고 했다. "공연을 보는 내내 아이디어가 떠올랐어요. 왼쪽 뇌로는 공연을 보고, 오른쪽 뇌로는 레미제라블을 어떻게 뮤지컬화하면 좋을 지 상상했죠."
부블리는 곧바로 클로드 미셸 숀버그와 레미제라블의 뮤지컬화 작업에 돌입했다. 그렇게 1980년 프랑스 파리에서 첫 '레미제라블'을 올렸다. 공연에 앞서 음반도 발매했다. "첫 공연 때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왔지만 3개월만 공연했어요. 프랑스에서는 3개월 넘게 공연하는 경우가 흔치 않았거든요. 그게 끝일 줄 알았죠."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1983년 부블리는 영어를 쓰는 한 제작자에게 전화를 받았다. "저를 오랫동안 찾았다고 했어요. 자기가 '캣츠'를 제작한 카메론 매킨토시라고 했죠."
매킨토시가 파리로 왔다. 매킨토시는 부블리, 숀버그와 함께 점심을 먹으며 "젊은 연출가 친구가 '프랑스에서 3년 전에 이뤄진 작품이 있는데 음반을 들어보라고 권했다"며 "완전 잊고 있다가 비가 쏟아지던 주말에 첫 3곡을 들었는데 '인생의 공연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제가 번개를 맞은 듯 레미제라블을 떠올린 것처럼, 매킨토시도 음반을 듣고 번개를 맞은 듯 공연을 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고 합니다. 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어요. 제가 레미제라블의 뮤지컬화를 떠올린 '올리버'를 프로듀싱한 사람이 매킨토시라는 걸 나중에야 알았어요.(웃음)"
부블리·숀버그는 영국으로 가서 매킨토시와 함께 뮤지컬 작업을 했다. 글로벌 관객들을 위해 공연 서두에 장발장이 가석방하며 시작하는 15분간의 프롤로그를 넣었다. 장발장과 자베르를 극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대표 넘버 '브링 힘 홈', '스타스'를 각각 추가했다. 판틴이 부르던 2개 넘버 중 하나인 '나홀로(On my own)'는 2부로 옮겨 에포닌이 부르게 했다.
그렇게 대작이 탄생했다. 1985년 웨스트엔드에서 초연한 레미제라블은 37년간 53개국 22개 언어로 공연됐고 현재까지 약 1억3000만명이 관람했다.
"전세계에서 레미제라블을 공연하게 될 거라는 걸 그때는 상상도 못했어요. 사실 레미제라블을 보러 영국으로 여행하는 것 조차 신기했습니다."
부블리는 가장 애정이 가는 캐릭터로 '코제트'를 꼽았다. "제가 파리 공연의 코제트 중 한 명(마리 자모라)과 결혼했거든요(웃음). 장발장과 에포닌 캐릭터도 좋아해요. 에포닌 부분을 쓸 때 즐겁게 쓰기도 했고, 불가능한 사랑과 불가능한 인생을 사는 독특한 캐릭터라 마음이 갔어요. 장발장도 쓸 때 즐거웠지만 그와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싶지는 않아요."
좋아하는 넘버는 판틴의 '아이 드림드 어 드림', 장발장의 '브링 힘 홈', 혁명에 나선 학생들이 바리케이드에서 부르는 '드링크 위드 미'다. "드링크 위드 미는 눈물을 글썽이면서 썼어요. 아이 드림드 어 드림은 작품을 만들며 가장 먼저 쓴 곡이라 애정이 가죠."
부블리는 "레미제라블을 이해할 때 제목을 생각해야 한다"며 "프랑스어로 '궁핍한 사람들' 외에도 '나쁜 짓을 한 사람들'이라는 중의적 의미가 있다"고 했다. "도둑이나 범죄자를 미제라블이라고 표현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결국 미저리(궁핍함)가 미제라블한 짓을 범하게 만든다는 거죠."
그는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전혀 시대를 타지 않는 작품이고, 그래서 지금까지 사랑 받는다"며 "우리가 사는 지금 이 시대 우리의 옆에도 자베르 같은 사람이 있고, 삶에 남자에 배신당한 판틴이 있다"고 설명했다.
부블리는 "초연 후 10년간 전세계를 다니며 뮤지컬 레미제라블 공연을 봤지만 이후에는 제 다른 작품들을 쓰느라 그러지 못했다"며 "이번에 한국에 온 건 너무 오고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오디션 때 들은 한국 배우들의 목소리가 너무 아름답고 훌륭해서 와서 꼭 보고 싶었어요."
그는 "한국어 자체에 굉장히 아름다운 선율이 있고, 그런 점들이 레미제라블 작품에 도움이 된 것 같다"며 "한국 배우들이 너무 훌륭하게 잘 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부블리는 가족과 함께 한국에 와 서울은 물론 경주, 전주, 부여도 다녀왔다. "한국은 고전적 느낌과 현대적 느낌이 어우러진 너무 멋진 나라라는 걸 알게 됐습니다. 유럽에서는 그런 곳을 잘 찾아볼 수 없거든요. 부여가 가장 인상 깊었어요. 너무나도 아름다운 정자를 봤고, 배를 타고 들어가는 식당에서 맛있는 음식도 먹었습니다. "
부블리는 레미제라블 외에도 50주년을 맞는 '라 레볼루션 프랑세즈', '미스사이공', '마틴 게르', '해적 여왕' 등 숀버그와 협업한 모든 뮤지컬의 오리지널 대본 작업을 맡았다. 오스카상 후보에 오른 영화 '레미제라블' 시나리오도 공동 집필했다. 뮤지컬 연극 '맨해튼'과 '파리지앵', 연극 '아담과 이브'의 저자이기도 하다. 두 개의 토니상, 두 개의 그래미상, 두 개의 빅투아르 드 라 뮤직상을 수상했다.
"동시대 한국의 독특한 점이 같은 시대 속에 여러 스타일의 음악이 존재하고, 골고루 사랑받는다는 점이에요. K팝이 있는가 하면 뮤지컬 넘버가 있고, 뮤지컬 안에서도 많은 장르가 한꺼번에 인기를 얻고 있죠. 공연장에 많이 와주세요. 다음에는 '미스사이공' 작품으로 다시 만나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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