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갤러리서 9년 만의 개인전…신작 65점 공개
뉴질랜드 남섬 습지에 매료…사진 확대한 '붓질 연구'
벽면에 캔버스 60점 모듈화 '전체이자 하나로 완결된 풍경화'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화가로서 나의 눈은 아주 미세한 수풀 한 줄기까지, 사실적으로 그리고자 하는 ‘재현의 욕망’을 지니고 있습니다."
국제갤러리에서 9년 만에 개인전을 연 이광호(55·이화여대 교수)의 그림은 여전히 관능적이다. 원초적인 손맛이 강렬한 추상과 환영의 세계로 초대한다.
한국 대표 '극사실주의 화가'의 변신일까?
그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번 작품도 가장 극사실적으로 재현한 것입니다. 더욱 더 보고자 하는 '눈의 욕망'에 충실했을 뿐이죠."
화가는 보통 사진을 찍어 보고 그림을 그린다. 이번엔 습지 사진을 계속 확대했다. 벌려질수록 수풀 한 줄기의 이미지는 사라졌다.
"대상이 제거된 추상적 형상을 발견하는 것인데요 그렇게 되면 그리는 과정에서는 언어와 생각이 배제된 상태가 되고 오로지 손끝의 감각에 몰입해서 붓질을 하게 됩니다."
손이 눈이 된 셈이다. 그동안 칭찬 같은 '사진 같다'는 말은 화가로서 서운했다.
"이젠 추상의 세계로 갔냐고요?"
그가 입을 앙 다물고 웃었다. "저는 추상적으로 그리는 게 아닙니다. 사진을 극단적으로 확대하면 깨짐, '노이즈'가 생기는데, 그 '노이즈'까지 그린 것입니다. 분명한 극사실화죠. 그런데 추상화처럼 보인다면 이번엔 '사진 같다'는 말을 들을 것 같진 않네요."
인물→선인장→풍경화…"어떻게 칠하느냐 문제"
예고 미대를 나온 그가 '진짜 화가'가 된 건 16년 전이다. 이광호의 첫 전시는 2007년 국제갤러리에서 3인 회화 그룹전으로 시작됐다. 흔한 초상화 같은 '인터뷰(Inter-View)' 연작을 선보였는데, 이때까지는 몰라봤다.
2010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첫 개인전에서 선보인 '선인장' 연작에서 폭발했다. 화폭을 지배한 빨강 초록의 거대한 선인장은 촉수 달린 외계 생물체처럼 넘실거리며 모든 감각을 압도했다. 신경을 건드리는 고양된 시각적 경험을 선사하는 '섹시한 그림'은 '이광호' 이름 석 자를 미술시장에 올려 세웠다. 이후 2014년 풍경화에 도전했다. 제주 곶자왈에서 발견한 덤불숲을 보면서다. 서로 곡선으로 한 덩어리로 뒤엉킨 그림은 생명력이 강렬했다.
에로틱함이 장착된 그림, 풍경화지만 풍경화가 아니다. 멀리서 보면 사실적으로 보이지만 가까이에서 보면 형상이 없다. 이번 신작도 그렇다.
"결국은 ‘어떻게 칠하느냐’의 문제입니다. 머리가 아닌 ‘눈’과 ‘손’의 영역입니다."
그는 "회화에서 '매너(Manner)'라는 말이 있다"며 붓질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테크닉과 구별되는 것으로 전수 받을 수도 없고, 누구도 따라할 수 없는, 그 화가만이 지닌 고유함이고 그에 따른 흔적의 어떤 느낌입니다."
이광호 'BLOW-UP'…'눈의 욕망'
뉴질랜드 남섬에 있는 캐플러트랙(Kepler Track)의 등산로를 1시간 정도 올라가다 나타난 '습지'에 마음을 빼앗겼다.
2017년도에 우연히 발견한 후 여러 번 방문해서 촬영했다. 인적이 없어 숨소리와 새 소리만 들렸다. ‘고요한 시선’으로 습지를 관찰했다. 다양한 색의 이끼와 무수한 수풀, 하늘과 구름이 비치는 수면, 구름이 움직이면서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은 붓질의 욕망을 자극했다.
"회화의 기본기부터 다시 돌아보고자 했습니다."
캔버스의 천과 바탕칠(ground)에 대한 다양한 실험을 했다. 동대문에서 생천을 구입해서 캔버스를 만들어 보기도 하고 올의 굵기가 다른 천에 바탕칠을 달리 적용해보기도 했다. 채색 이전의 준비 과정에 따라 물감의 흡수 정도가 달라지고 붓질할 때의 촉각적 감각이 달라지고 호흡의 느낌이 달라졌다.
"그림을 ‘잘 그린다’는 건 재현의 기술을 넘어선 매너의 문제입니다."
"저 만의 붓질을 구현하기 위해 노력해왔다"는 그는 "이런 의미의 연장선에서 이번 전시의 방법론적 주제는 '붓질 연구(A Study for Applying Paint)'"라고 했다.
붓은 애무의 도구…'붓질 연구'
그래서 붓의 존재감을 새롭게 확인할 때 화가로서 큰 기쁨을 느낀다.
하지만 어떤 것도 묘사하지 않는다. "나이가 들면서 시력이 나빠졌고 지금은 ‘선인장 시리즈’처럼 분명한 외곽선을 지닌 대상을 그리기가 어렵습니다. 풍경으로 대상이 변화한 이유이기도 합니다. 반면, 윤곽의 구분이 약화 되면서 대상의 재현적인 측면 보다 내 감정의 흔적들이 표현되는 것 같습니다. 자연스럽게 시력의 한계에 반응하면서 적절한 붓질을 궁리하게 된 거죠."
이번 작품은 전통적인 회화 기법도 녹였다. 윤곽의 표현을 실험한 'encaustic' 기법이다. 밀랍(wax)에 안료를 섞은 고체물감을 불에 달구어 화면에 고착 시켰다. 화면 위의 물감이 녹으면서 윤곽이 섞이는 우연적 효과가 흥미로운 작업이다.
60개로 만든 '하나의 그림'…공간 경험
국제갤러리 안쪽 전시장에는 1년 여간 작업한 이광호의 대규모 풍경 회화가 장엄하게 펼쳐졌다. '하나의 그림(one picture)'이라는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전시는 가로 세로 90·81㎝ 크기 직사각형의 60개의 작품을 3cm 간격으로 연결해서 설치했다.
각각의 캔버스가 전체 풍경 이미지의 일부이자 또 그 자체로 완결된 하나의 작품이다. 사진으로 구획한 이미지를 다시 일정 간격을 지닌 60개의 캔버스 프레임으로 모듈화 했다.
"독립된 프레임이 갖는 의도를 보여주기 위해 1개의 작품을 떼어봤는데요. 이렇게 되면 상상의 영역에서 프레임 밖의 풍경, 더 나아가 전시 공간 밖으로 공간이 무한히 확장될 수도 있다는 암시이기도 합니다. 공간의 느낌을 경험 하는 게 이전 전시와는 다른 새로운 경험이 되지 않을까 기대합니다."
습지 사진을 따로 또 같이 그려낸 'BLOW-UP'은 '응시의 잔혹한 변증법'이다. 체험된 시점과 사진적 시점은 시각적인 것의 광란이다. 붓질이 극렬하게 어루만진 쾌감이 화폭에서 진동한다. '눈의 욕망'이 빚은 완벽한 환영이다. 아물아물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 보이는 것들을 산란 시키는 '이광호 그림'은 욕망과 통제를 벗어난 관음증의 표출이다. 구상성과 추상성의 합체로 덧없는 찰나의 순간을 밀착해 버린 영원성, 공간적 초월성이 압도한다. 19세기 '회화는 죽었다'고 반란한 사진에 대한 복수처럼 보인다. 늘 품고 다니는 그의 아바타 ‘꿩’을 승리의 깃발처럼 그림속에 심어놨다. 전시는 2024년 1월28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