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손정빈 기자 = 영화 '괴물'은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 필모그래피에 새 장을 연다. 2018년 '어느 가족'으로 칸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후 다소 지지부진해 보였던 그의 영화 세계는 이 작품에서 그간 다룬 적 없는 관계를 끌어들여 폭을 넓히는 동시에 도약한다. '괴물'은 단순히 소재 때문에 특별한 게 아니다. 고레에다 감독은 한 적 없는 이야기를 그것에 정합하는 구조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물론이고 그가 앞서 내놓은 작품들에서 보여준 태도 역시 고스란히 담아낸다. 기술이 세심하고 치밀하며 정교한 것 뿐만 아니라 시선은 따뜻하면서도 냉엄하고 결국 올바르다. 고레에다 감독 영화 앞에 걸작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건 더는 큰 의미가 없어 보인다. 그러면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다. '괴물'은 필요한 영화이고, 좋은 영화다. 그리고 기억해야 할 영화다.
'괴물'이 고레에다 감독의 이전 영화들과 가장 크게 다른 건 각본이다. 이 작품은 그의 장편극영화 데뷔작 '환상의 빛'(1995) 이후 직접 각본을 쓰지 않은 두 번째 영화다. 글을 쓴 건 '마더' '그래도, 살아간다' '최고의 이혼' 등 극본을 쓰며 일본 최고 드라마 작가로 손꼽히는 사카모토 유지. 서스펜스를 만들어내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사카모토 작가가 '괴물'의 설계도를 만들고, 고레에다 감독이 캐릭터와 대사 등을 세공하자 '괴물'은 작가와 감독 모두의 경력에 특별한 성취로 남게 됐다. 여기에 지난 3월 세상을 떠난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 사카모토 류이치의 음악이 더해지면서 이 작품은 보기 드문 품격까지 갖추게 됐다. '괴물'은 고레에다 감독 영화인 게 명확하면서도 사카모토 유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고, 그들을 사카모토 류이치의 감성이 떠받친다.
'괴물'의 구조는 곧 메시지다. 고레에다 감독은 전작들에서 대체로 시간 순서대로 영화를 진행하는 등 복잡한 플롯을 사용한 적이 없다. 그러나 이번 영화에선 같은 시간에 벌어진 사건을 세 가지 다른 시각으로 보여준 뒤 진실에 접근해 간다. 장르물에서나 활용할 법한 형식을 가져온 건 그 방식이 이 영화의 목표와 분리될 수 없을 정도로 딱 들어맞기 때문일 것이다. 이 작품은 무기노 미나토(쿠로카와 소야)와 호시카와 요리(히이라기 히나타) 두 소년 사이에 벌어진 일의 실체를 들여다보려 한다. 다만 이 아이들은 나이 든 이들의 무지와 오해와 폭력 속에서 주체와 존엄을 지켜 나가기가 쉽지 않다. 고레에다 감독은 바로 그 구조를 통해 관객을 극중 성인들과 다르지 않은 무지·오해·폭력 안으로 직접 불러들임으로써 '괴물'의 메시지를 실감하게 하려는 듯하다.
고레에다 감독은 그의 예술 세계 요추인 '가족과 관계'라는 주제를 이번 영화에서 다시 한 번 확장한다. '괴물'엔 여러 가족이 등장하나 전작들에서 가족의 뼈대가 됐던 4인 가족은 없다. 대신 싱글맘 가정, 싱글맘 가정에서 독립한 1인 가정, 특정 사건으로 인해 붕괴된 가정이 있다. 다루는 관계 역시 이전에 보여줬던 부모-자식, 형제-자매 등 혈연 관계나 유사 가족 또는 대안 가족 형태 내에 존재하는 게 아닌 가족에게서 도망쳐 나온 두 소년 사이에 싹 튼 감정이다. 고레에다 감독이 가족에 천착하고 그 의미를 파고 들어가면서도 '엄마-아빠-딸-아들'이라는 낡은 가족 개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고 비판해왔던 이들은 '괴물'을 보고 나면 이 예술가가 결코 어느 한 지점에 머물러 있지 않다는 걸 확신하고 다시 한 번 신뢰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전에 없던 구조와 보여준 적 없는 관계를 통해 '괴물'은 다음 세대를 지키려 한다. 관객은 세 번째 장에 이르러서야 미나토와 요리의 진심을 겨우 알아차리게 될 것이고, 그때쯤이면 그들의 마음은 쉽게 아물기 어려운 생채기들로 뒤덮여 있을 것이다. 이때 고레에다 감독은 관객에게 묻는다. '우리가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이제 알겠습니까.' '우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끊어진 철로, 막다른 길에 멈춰선 기차 안으로 도피한 소년들은 쏟아지는 비와 무너진 흙더미 속에 파묻힌다. 우리가 그들을 꺼내어 줄 수 있을까. 알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없지 않은가. 무고한 그들이 진흙 속에서 사라지지 않기를, 다시 태어나고 싶다는 생각을 하지 않도록, 팽창된 우주가 폭발해버렸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하지 않도록, 자신을 괴물이라고 생각하지 않도록.
'괴물'은 명확한 목표 안에서 고안된 캐릭터, 정밀하게 쓰여지고 배치된 대사, 효율적이고 정확한 미장센을 통해 과녁을 향한다. 이 작품엔 착각하는 사람, 오해하는 사람, 무관심한 사람, 몰아붙이는 사람이 다 있다. 고레에다 감독은 이들이 모두 그 아이들을 소외시킨 공범이라고 꾸짖는다. 그러면서 "평범한 가족"이나 "남자답게"라는 말은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들리지만, 무심코 던진 그 단어 하나가 어떤 아이에겐 돌이킬 수 없는 상처가 된다고 지적한다. 사오리와 호리가 진흙으로 뒤덮인 창문을 닦아내려 애쓰는 장면이나 미나토와 교장이 함께 금관악기를 부는 장면은 쉬운 희망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준엄하다. 작품 분위기와 소재는 전혀 다르지만, '괴물'의 이런 디테일은 고레에다 감독 최고작인 '걸어도 걸어도'(2009)를 떠올리게 한다.
태풍이 지나간 뒤 미나토와 요리는 기차 밖으로 나온다. 두 소년은 진흙을 잔뜩 뒤집어 쓴 모습이지만, 날씨는 언제 폭풍이 몰아쳤냐는 듯 화창하기만 하다. 아이들은 서로에게 묻는다. "우린 다시 태어난 걸까." 그들이 던지는 이 물음은 이 장면을 지켜보는 관객 마음을 아프게 찌른다. 미나토와 요리는 살아 있는 걸까. 아니면 이건 모두 환상에 불과한 걸까. 살아 있을 거라고 단정하기 어렵고, 환상이라고는 생각하는 건 고통스럽다. 판단할 순 없지만, 소년이 소년다운 미소를 보여주는 건 이게 처음이라는 것만은 알 수 있다. 어떤 염려도 없이 환해진 그들의 얼굴은 잊히지 않을 정도로 어여쁘다. 이제 고레에다 감독은 끝까지 관객을 붙들고 묻는다. '저 미소를 지켜줘야 하지 않겠습니까.' '괴물'은 그렇게 어른의 영화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