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델프트=뉴시스]구예지 기자 = 노란색의 철제로 된 두꺼운 연구실 문을 열자 귓가를 때리는 시끄러운 소리에 잠시 멍해졌다.
실험실에 들어서기 전 네덜란드 양자기술 연구소 큐텍(QuTech)에서 박사과정 졸업을 앞둔 파블로 코바 연구원이 "문을 여는 순간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으니 모든 대화와 설명을 밖에서 하겠다"고 한 말이 왜 그런지 단박에 이해할 수 있는 순간이었다.
연구실 안에는 수십만개의 케이블이 연결된 성인 상체 사이즈의 철제 통이 있었다. 시끄러운 소리의 주인공으로 양자컴퓨터 온도를 낮추는 냉각기다.
지난달 7일(현지시간) 네덜란드 델프트에 위치한 큐텍(QuTech)에서 코바 연구원은 냉각기 소리에 코끝을 찡그리면서 "시끄러운 소리 때문에 양자컴퓨터 옆에서 일하면 연구원들이 미쳐버릴 것"이라며 "연구원들은 냉각기가 있는 공간 위층에서 생활한다"고 말했다.
양자컴퓨터에는 냉각기가 필수다. 양자컴퓨터 작동 온도가 10밀리켈빈(mK)으로 우주 공간의 온도인 4켈빈(영하 269.15도)보다 더 추운 영하 273도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큐텍 연구실에 있는 수십만개의 양자컴퓨터 트랜지스터를 식히기 위한 냉장고만 6개가 필요하다.
기존 컴퓨터와 양자컴퓨터의 다른점은 사용하는 숫자 단위다.
기존 컴퓨터는 이진법, 즉 0이나 1로 표시된 '비트' 라는 단위로 정보를 계산하지만 양자 컴퓨터는 0과 1사이의 무수히 많은 값들을 표현할 수 있는 '큐비트'라는 단위를 사용하기 때문에 훨씬 많은 양의 정보를 한번에 처리할 수 있다.
이런 속성으로 양자컴퓨터는 이론적으로 슈퍼컴퓨터보다도 1억 배나 더 빠를 수 있다.
큐텍은 2015년 델프트 공과대학교(Delft University of Technology)와 네덜란드 응용과학연구기구(TNO)가 설립한 미션 중심의 연구 기관이다.
양자 연구가 다양한 학문의 접근과 기술을 요구하다 보니 관련 연구진과 엔지니어를 한 곳에 모을 허브가 필요하다고 판단해 설립됐다.
델프트 공대는 양자컴퓨터·인터넷에 강하다. 지난해에는 델프트 공대 물리학자들이 '양자 원격이동(quantum teleportation)'이라는 기술을 통해 각각 물리적으로 떨어진 3곳에 데이터를 보내는데 성공하기도 했다. 이전에는 2군데만 보내는 것이 가능했다.
해당 실험은 양자 네트워크가 상당한 규모로 확대될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양자컴퓨터 실용화 가능성을 앞당겼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큐텍의 장점은 연구와 엔지니어링이 분리돼 있다는 점이다. 엔지니어링도 함께 할 경우 양자컴퓨터 연구원이 설비 관련 업무도 해야 하지만 큐텍은 그렇지 않다. 실험을 가능하게 하는 설비를 엔지니어링 담당자들이 맡는다.
케이스 에이케 큐텍 사업개발부문 이사는 "매우 다른 성격을 보이는 연구 집단과 엔지니어링 집단을 결합하기로 한 결정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면서 "둘의 결합을 통해 기술을 완성하는데 필요한 기초연구를 집중적으로 수행하고 다음으로 수행할 기초연구 방향도 정한다"고 설명했다.
큐텍에서는 현재 300명이 넘는 연구원들이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한국인 윤지원 연구원도 이들 중 하나다.
양자 인터넷은 양자 정보를 전달하는 인터넷이다. 지금은 0과 1 각각에 정보를 실어 보내지만, 양자 인터넷은 0과 1이 중첩된 임의의 양자 상태의 광자에 정보를 담아 전송한다.
정보의 양이 증가하면 속도가 느려지는 현재 인터넷망과 달리 양자 인터넷은 정보량이 아무리 증가해도 속도가 거의 떨어지지 않는다. 양자의 중첩성을 이용하면 보안 기능도 월등히 높일 수 있다.
윤 연구원은 "양자컴퓨터가 반도체 실리콘을 이용한다면 양자인터넷은 다이아몬드를 이용한다"며 "다이아몬드는 탄소로만 이뤄진 물질이기에 탄소 자리에 질소, 인 등의 다른 물질이 들어오면 주변에 전자가 갇히는데 이를 정보처리에 이용할 수 있다"고 말했다.
양자 인터넷은 조금씩 상용화가 진행 중인 양자암호통신(QKD)에 비해서는 아직 기초 단계다. 광케이블을 이용한 양자 전송 거리는 100km의 벽을 넘지 못하고 있다.
기초 단계인 연구 상황에서조차 한국과 네덜란드의 격차는 큰 편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에 따르면 국내 양자 기술인력은 미국의 6분의 1, 중국의 11분의 1에 그친다.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이 지난해 7월 발행한 이슈리포트에 따르면 한국은 양자 연구가 대학과 연구기관, 기업에서 산발적으로 시행되고 있어 새로운 기술 트렌드를 만드는 주도적 조류를 만드는 지위에 오르지 못하고 있다.
리포트는 특히 기초 물리 역량이 필요한 양자 기술은 기술적 난이도가 높아 인력 교육과 유입이 쉽지 않은 분야로 분류되고 있어 지속적 투자와 인력 양성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윤 연구원 역시 큐텍의 장점으로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꼽았다. 그는 "큰 규모의 실험을 하려면 냉장고, 광합 기계 설비를 해야 하는데 큐텍은 따로 이 분야의 전문가를 고용해 물리 실험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한다"고 강조했다.
아직 걸음마 수준이지만 한국 역시 양자인터넷 기술 격차를 따라잡기 위한 투자에 나서고 있다. 과기정통부는 올해 양자 통신·센서·컴퓨터·소자 4대 분야 대학정보통신기술연구센터(ITRC)에 더해 박사급 전문 인력을 추가로 양성한다는 계획을 세웠다.
양자역학 등 기초 과학과 양자 기술에 대한 이해가 깊고 물리학과 수학, 전기전자, 컴퓨터 공학 분야 지식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1000명의 '양자 스페셜리스트(전문가)'를 양성하겠다는 목표다.
양자역학 연구 부문에서 앞선 네덜란드 같은 나라와 기술 교류를 확대하는 것 역시 도움이 될 수 있다.
윤 연구원 역시 "한국에서는 한 곳에서 양자역학을 공부하기 어려운 게 사실"이라며 "한국은 미국과 협업이 많은데 양자역학으로 유명한 큐텍과 교류·협력을 늘릴 필요가 있다"고 했다.
델프트 공과대에는 큐텍 외에도 네덜란드 응용과학연구기구(TNO)가 있다. 큐텍 건물과 연결된 다리를 건너 10분만 걸으면 바로 TNO 건물로 이어진다.
TNO는 1932년 설립된 네덜란드 유일의 대형 종합 연구기관으로 FhG(독일), CNRS(프랑스), MPI(독일)에 이어 유럽에서 4번째로 큰 공공연구기관이다.
산업기술혁신 뿐 아니라, 국방, 보안, 보건 분야 혁신을 종합적으로 수행하고 있고, 모든 연구는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을 강조한다. TNO는 산업의 지속가능한 경쟁력을 확보하는 혁신과 사회의 긍정적인 변화를 만들기 위해 사람과 지식을 연결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TNO는 기업과의 협업을 많이 한다. 지분 100%를 가진 자회사로 기업 스핀오프, 기술 인큐베이팅 등을 통해 재정적 수익을 목표로 하는 곳들도 있다.
TNO에서 언론 소통을 담당하는 레인 크롤은 "2030년까지 기후위기 대응을 위해 TNO가 준비하고 있는 것이 많다"며 "생산되는 플라스틱의 절반이 순환가능하도록 만들고 양자를 이용한 우주 기술 개발에도 박차를 가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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