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독립운동가에 의열활동 주역 '이종암·이강훈·엄순봉' 선생

기사등록 2023/10/03 10:44:38

[서울=뉴시스] 이종암 선생. (사진=국가보훈부 제공) 2023.10.03.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이종암 선생. (사진=국가보훈부 제공) 2023.10.03.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옥승욱 기자 = 국가보훈부는 10월의 독립운동가에 이종암, 이강훈, 엄순봉 선생을 선정했다고 3일 밝혔다.

대구광역시 출생의 이종암 선생은 1918년 2월 만주로 망명했다. 서간도 신흥무관학교에 입학해 속성과정을 거쳐 1919년 10월 수료했고, 동창생들과 의기투합해 의열단을 11월에 창립했다.

선생은 의열단 조직정비 때 최고지도부 격인 5인 ‘기밀부’의 일원이 됐고, 국내 투쟁을 위한 요원으로 선정돼 1925년 7월 비밀리에 입국했다. 의열투쟁을 위해 경북 달성군에 은신하던 중 1925년 11월 5일 경북경찰부 소속 일제 경찰의 급습을 받아 체포되고 말았다.

선생은 경찰과 검사국에서 혹독한 신문을 당했고 이후 지병과 고문후유증으로 인해 병세가 악화돼 1930년 5월 23일 대전형무소에서 가출옥됐다. 하지만 일주일만인 5월 29일 친형 집에서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숨을 거뒀다.

[서울=뉴시스] 이강훈 선생. (사진=국가보훈부 제공) 2023.10.03. photo@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이강훈 선생. (사진=국가보훈부 제공) 2023.10.03.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강원도 김화군 출생의 이강훈 선생은 1919년 3월 12일, 김화군 독립만세 시위 참여를 이유로 헌병들에게 붙잡혔다가 간신히 풀려났고, 이후 임시정부에 뜻을 품고 1920년 2월 중국으로 망명했다.

선생은 주중(駐中)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有吉明)가 육삼정(六三亭, 일본식 요리집)에서 중국 정부 요인과 은밀히 접선한다는 정보를 듣고, 아리요시를 암살하기 위한 육삼정 의거를 계획했으나 실패했다.

일본영사관 경찰서로 끌려간 선생은 심한 고문을 받았으며, 재판에서 징역 15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 후인 1945년 10월에 출옥한 선생은 12월에 귀국해 백정기·윤봉길·이봉창 3의사의 유해 발굴과 봉환 문제를 임시정부 요인들과 상의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가 3의사의 유해를 모두 찾아내어 1946년 4월 유해를 모시고 귀국했다.

경상북도 영양군 출생의 엄순봉 선생은 1925년 9월 남만주로 망명했고, 신민부(新民府)와 재만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이 합작해 조직한 한족총연합회 청년부 차장으로 활동했다. 상해로 이동해 남화한인청년연맹과 항일구국연맹에도 가입하고 독립운동을 이어갔다.

선생은 육삼정 의거가 실패로 끝나자 안경근·오면직·이달·이용준 등과 함께 일본영사관 밀정인 이종홍을 처단하고, 독립운동에 방해물이 되는 옥관빈을 사살했다. 1935년 봄 친일파 이용로를 처단한 끝에 중국 순경들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일본영사관 경찰로 넘겨져 모진 고문을 받은 선생은 종로경찰서로 압송되어 취조를 받은 후, 경성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 등으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1938년 4월 9일 서대문형무소에서 형이 집행돼 33세의 젊은 나이로 순국했다.

이종암·이강훈·엄순봉 선생은 조국 독립을 위해 목숨을 아끼지 않는 희생정신으로 의열투쟁의 불꽃을 크게 피웠다.

정부는 선생들의 공훈을 기리기 위해 이종암 선생에게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엄순봉 선생에게는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각각 추서하였고, 이강훈 선생에게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button by close ad
button by close ad

10월 독립운동가에 의열활동 주역 '이종암·이강훈·엄순봉' 선생

기사등록 2023/10/03 10:44:38 최초수정

이시간 뉴스

많이 본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