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월동 이웃 방화·살인 피해 유족 인터뷰
누수 문제로 자녀들과 대화…이중적 모습
회피성 진술에 유족 분통…"두 얼굴 악마"
"층간누수 다툼 당사자 취급에 상처받아"
"선처 바라며 변명 아닌 자기 죗값 치러야"
[서울=뉴시스]정진형 기자 = "강자에겐 한없이 약한 척하고 약자에겐 누구보다 강하던 악마에게 어머니를 잃었어요. 층간누수는 분풀이 대상을 찾으려던 핑곗거리일 뿐입니다."
서울 마포구의 한 카페에서 지난 18일 뉴시스와 만난 '신월동 이웃 방화·살인' 피해자 유가족의 말이다. 피해자 A(77)씨의 딸과 사위는 피고인 정모(40)씨에 대한 엄벌을 호소했다.
작년 5월 누수…자녀들에겐 '싹싹', 70대 노인에겐 '협박'
양동이와 대야로 받아도 부족할 정도로 물이 새 곰팡이가 폈고, 작은 방은 누전으로 전깃불이 나갔다. 2020년 한 차례 누수 문제가 생긴 지 2년만이었다. 윗집 3층에 살던 정씨가 별다른 배수설비가 없는 다용도실에 세탁기를 둔 게 원인이었다.
그해 5~6월경 집주인이 어머니와 딸 B씨에게 상황을 설명하던 중 불쑥 얼굴을 내민 정씨는 "일 때문에 집에 자주 안 오고, 세탁기를 옮기기 위해선 인부들을 써야하니, 대신 세탁기를 사용하지 않고 빨래방에 가던지, 화장실에 있는 미니세탁기를 쓰겠다"고 했다고 유가족은 전했다.
어머니를 대신해 두 자녀가 집주인과 정씨를 오가며 중재에 나섰다. B씨는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무지 조심했어요. 작년 12월 누수 때 정씨 본인이 직접 수리하고 집주인에게 구상권을 청구한다고 한 게 마지막이었어요"라고 돌아봤다.
자녀들과 A씨를 대할 때 정씨의 태도는 180도 달랐다. B씨는 "오빠와 통화할 때는 싹싹하다가 통화 뒤에 어머니 집에 찾아가서는 '나는 탈수만 했는데 어디가 물이 새냐. 자식들에겐 말하지 말라'고 반말을 하며 위협적으로 화를 내더라고요"라고 했다.
범행 회피하는 말에 분통…"법정선 얌전, 두 얼굴의 악마"
"새벽 1시쯤 어머니가 변을 당했다는 연락을 받았어요. 처음에는 스팸 전화인 줄로만 알았죠. 집에 불이 나서 20분 만에 꺼졌다는데 이해가 가지 않았어요. 평소 가스 불도 여러 번 확인하는 분이었거든요."
B씨는 "영안실에서 엄마 얼굴을 확인했는데 '화재 때문이 아니구나. 어떤 악마가 엄마에게 그랬을까', 그때는 정말 제정신이 아니었어요"라며 울먹였다.
"엄마 발인하는 날 (정씨가) 잡혔다는 얘기를 들었어요. 뉴스에서 수갑을 차고선 엉뚱한 말로 시종일관 범행을 회피하는 비열한 모습을 보고 분통이 터졌어요. 첫 재판에서도 판사님, 검사님 앞에선 얌전히 앉아있는 두 얼굴의 악마를 봤어요."
지난 11일 서울남부지법에서 열린 1차 공판에선 A씨를 흉기로 공격한 정씨가 추가 범행을 저지르던 당시 피해자가 살아있었는지가 쟁점이 됐다. 정씨는 당시 A씨가 이미 죽은 줄 알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B씨는 "법의학 전문가들도 어머니가 살아있을 때 추가 범행을 저질렀다고 판정했고, 피고인의 변호인까지 인정했던 것을 번복했어요. 살인자가 거짓말을 하는 모습을 보니 사람이 아니라 악마라는 생각이 들었죠"라고 울분을 토했다.
두 손주 사랑으로 키운 할머니…"다툼 당사자 취급 상처"
맞벌이를 하는 딸 내외를 대신해 두 쌍둥이 손주를 도맡아 키운 것도 A씨였다. 사위 C씨는 "장모님은 너무 여리고 정이 많은 분이었어요. 저는 아빠니까 아이들에게 엄하게 할 때가 있는데 '그러지 마라. 애는 사랑으로 키워야 한다'고 하셨었죠"라고 전했다.
어릴 적 몸이 약해 병원 신세를 지던 외손자가 밤마다 울면 A씨가 병실 밖에서 그를 품에 안고 어르고 달랬다고 한다. "생각해 보니 엄마는 큰 누수가 아니면 자식들이 수고하고 애쓰는 모습에 그냥 덮은 거 같아요. 나중에 집에서 누수 때문에 힘들다고 생전에 쓰신 메모가 발견됐어요."
정씨의 범행 동기로 '층간누수'가 부각된 것은 유가족들에게 상처로 남았다. B씨는 "어머니가 한 번도 없었던 다툼의 당사자가 된 기사가 쏟아졌어요. 저는 그냥 몇 시간 동안 기사마다 댓글을 달며 우는 것 외엔 할 수 있는 게 없더군요"라고 했다.
"문 앞 이웃마저도 불안 대상 돼…법정 최고형 내려져야"
"혐의를 인정했다면 변명이나 거짓말로 선처해달라고 반성문을 쓰지 말고 그에 맞는 죗값을 받으면 됩니다." 생전 A씨가 돌봤던 외손자가 고사리 손으로 쓴 탄원서의 한 대목이다.
B씨는 "안식처인 집까지 찾아와 거짓말로 문을 열게 하고 상상할 수 없는 끔찍한 일을 저질렀어요. 만약 법이 허용하는 한 최고형이 내려지지 않으면 우리는 길거리를 오갈 때뿐 아니라 집에서 문을 열고 나설 때, 이웃이 찾아올 때마저도 불안에 떨게 될 거예요"라고 강조했다.
유족 측 대리인인 법률사무소 진서의 민고은 변호사는 "시민 탄원서를 보면 잔혹한 범죄에 대해선 사형도 부족하다는 게 일반 국민들의 법 감정"이라며 "잔혹한 범죄에 대해 법원이 일반 국민들이 납득할 수 있는 판결을 내려주기를 바라고 있고 그렇게 해주실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고 밝혔다.
정씨는 지난달 14일 오후 9시43분께 양천구 신월동의 한 3층짜리 다세대주택 2층에 혼자 살던 A씨를 살해한 뒤 불을 지른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당시 생활고 등으로 신변을 비관하던 정씨는 임대차계약 종료로 집주인에게 퇴거를 통보받은 뒤 혼자 살던 노인인 피해자를 살해하기로 마음먹은 것으로 조사됐다.
A씨의 유가족들은 내달 1일 열리는 2차 공판에 증인으로 나설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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