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로 보호자 사망 땐 가구소득 '반토막'
보상금 8037만원 그쳐…1년 내 소진 31.3%
美 벤틀리법, 유자녀 고교 졸업때까지 양육비
추진단체 "피해자엔 정의, 가해자엔 책임 부과"
전문가 "음주운전 땐 패가망신 경고 효과도"
[서울=뉴시스]정진형 기자 = 지난해 11월 광주 광산구의 한 사거리 보행섬에서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던 대리운전 기사 A(45)씨가 음주운전 차량에 치여 숨졌다.
초등학생 두 딸을 둔 A씨는 이날도 딸의 학원비를 벌기 위해 대리운전 장소로 이동하다 변을 당했다. 운전자 B(37)씨는 징역 4년을 선고받았지만 A씨 가족은 당장 생계가 막막해진 상황이다.
지난 2020년 인천 을왕리 해수욕장 인근에서 오토바이로 치킨 배달에 나섰던 50대 가장이 중앙선을 넘어 만취 운전을 하던 벤츠에 치여 사망한 뒤 그의 딸이 엄벌을 호소하는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리기도 했다.
음주운전 교통사고로 부모를 잃은 미성년 자녀가 생계문제에 내몰리지 않도록 실질적인 지원제도가 마련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나아가 음주운전 가해자에게 더 강한 책임을 지우는 차원에서 형사처벌을 넘어 양육비도 부담하게 하는 제도가 해외에서 시작돼 눈길을 끌고 있다.
7일 국회 입법조사처에 따르면, 지난 2018년 한국교통연구원이 교통사고 유자녀 등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교통사고로 아버지 또는 어머니를 잃은 당시 만 3세 미만인 경우가 24.2%, 만 3~7세 미만이 35.7%, 초등학교 재학 중이던 경우는 33.8%로 나타났다.
이들 유자녀 가정의 월평균 소득은 가장을 잃기 전 219.9만원에서 사고 이후 100만원으로 절반 넘게 줄었고, 기초생활수급을 받는 가정이 전체의 55.4%에 달했다.
반면 보상금 액수는 턱없이 작은 데다가 그마저도 단기간에 다 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유자녀 보호자들이 보험회사로부터 받은 평균 보상액은 8037만원에 그쳤고, 대체로 33.4개월 안에 소진한 것으로 나타났다. 1년 안에 보상금을 모두 쓴 경우도 31.3%에 달했다.
교통사고 사망 유자녀 지원 제도가 있긴 하지만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지원 범위도 기초생활수급자이거나 차상위계층으로 좁아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이다. 실제 유자녀에게 분기별로 25~45만원씩 지급하는 장학금의 경우 지난해 지급 건수가 초·중·고교 모두 합쳐 786건에 그쳤다.
반면 미국의 경우 음주운전 교통사고 사망 피해자에게 미성년 유자녀가 있을 경우 가해자에게 양육비를 지급하도록 하는 입법이 최근 잇따라 추진되고 있다.
테네시주의 경우 이미 '이든·헤일리·벤틀리법(Ethan’s, Hailey’s, and Bentley’s law)', 이른바 벤틀리법이 제정돼 올해 1월부터 시행되고 있다.
벤틀리법은 지난 2021년 4월 음주운전 차량사고로 고아가 된 두 손자를 키우게 된 세실리아 윌리엄스가 17개 주를 돌며 피해자 자녀 양육비 지급 필요성을 호소한 게 계기가 됐다.
법안은 유자녀가 18세로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양육비를 지급하고, 액수는 아동의 경제적 필요와 자원, 생활 수준 등 성장환경을 고려해 법원이 정하게 했다.
입법 운동을 벌인 음주운전 방지 어머니회(Mothers Against Drunk Driving)는 "벤틀리법 제정이 피해자와 생존자에게 정의를 되찾아주고, 가해자에게는 그들의 음주운전이 초래한 참극을 상기시키고 행동에 따른 책임을 부과하는 의미가 있다"고 설명했다.
우리나라도 '특정범죄 가중처벌 등에 관한 법률'(특정범죄가중법)에 조항을 추가하거나, '소송촉진 등에 관한 특례법'(소송촉진법)상 배상명령 조항을 손질해 법원이 자녀 양육비 배상을 명령하게 하는 방안을 검토하자는 게 입법조사처의 제안이다.
특히 법원이 양육비 지급 명령을 하게 하는 쪽이 복잡한 민사소송을 통해 배상을 받아내야 하는 피해자의 부담을 덜어주는 데 더 효과적일 것으로 보인다.
입법조사처 허민숙 입법조사관은 "양육비 지급명령을 통해 음주운전이 초래하는 참극의 형상을 우리사회에 보다 선명하게 각인시켜, 음주운전 무관용 원칙을 정립하는데 기여할 수 있다"며 "피해 유자녀에 대한 실질적 지원도 이뤄질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박무혁 도로교통안전공단 교수는 "다른 범죄 처벌과의 형평성 등을 따져서 사회적 합의를 하기까지 시간이 필요하다"면서도 "음주운전 피해자의 치유, 회복 뿐 아니라 가해자에게 음주운전을 하면 패가망신을 할 수 있다는 강력한 (경고) 시그널을 줄 수 있다고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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