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 유자비 기자 = 지난 2013년 2월 11일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스스로 교황 자리에서 물러나겠다는 폭탄선언이었다.
86세 생일을 두 달 앞둔 베네딕토 16세는 11일 추기경회의에 제출한 성명을 통해 "하느님 앞에서 나의 양심을 거듭 성찰한 결과 고령으로 더는 교황의 직무를 적절히 수행하기에 적합하지 않다는 확신에 이르렀다"면서 "완전한 자의에 의해 추기경단이 나에게 부여한 성베드로의 후계자인 교황직의 포기를 선언한다"고 밝혔다. 또 "나를 도와준 분들의 사랑과 노고에 진심으로 감사하며 나의 부족함에 대해 용서를 구한다. 앞으로의 삶을 기도에 전념해 신에게 헌신하겠다"고 말했다.
그로부터 17일 후인 28일 베네딕토 16세는 홀연히 교황직을 물러났다. 퇴임 후 그는 '명예 교황'(emeritus pope)에 추대되었다. 종신직인 교황이 생전에 사임을 한 사례는 1294년 첼레스티노 5세 이후 719년 만의 일이었다. 2000여 년 가톨릭 역사상 스스로 교황 직을 포기한 사례는 5명에 불과하다.
가톨릭계에선 보수파로 분류되던 베네딕토 16세는 7년 10개월에 걸친 교황 재임 기간 동안 기독교 신앙의 쇠퇴와 세속화를 막기 위해 유럽이 먼저 기본적인 기독교적 가치를 회복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제265대 교황인 베네딕토 16세의 본명은 요제프 알로이지우스 라칭거(Joseph Aloisius Ratzinger)이다. 요제프 알로이지우스 라칭거는 1927년 4월 16일 독일 바이마르 공화국 바이에른 주 마르크틀 암 인에서 경찰관인 요제프 라칭거와 식당 종업원이던 마리아 라칭거의 2남 1녀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소년 라칭거의 가정은 독실한 성 가정이었다. 부모님은 모두 신심이 깊은 가톨릭 신자였다. 형 게오르크는 레겐스부르크 주교좌 성당 소년 성가대의 지휘자로 활동했다. 누나 마리아는 평생 결혼하지 않은 채 신앙생활을 했다. 요제프는 다섯 살 무렵 자신의 추기경의 장엄한 행렬과 의복을 본 뒤 성직자의 꿈을 키우기 시작했다.
라칭거가 열네 살 되던 해인 1941년 그는 히틀러 청소년단에 가입한다. 훗날 교황 선출 당시 많은 논란을 불러일으킨 행적이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는 강력한 반 나치주의자였다. 부모나 본인의 의사와 관계없이 강제적으로 가입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군에 징집된 라칭거는 BMW 공장의 방공포 부대에서 복무했다. 종전 후 그는 형과 함께 트라운스타인의 성 미카엘 신학교에 입학했다. 형제는 1951년 6월 29일 사제로 서품되었다.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한 라칭거는 1958년 프라이징 대학 교수를 거쳐 1959년 본 대학, 1963년엔 뮌스터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에서 라칭거는 쾰른의 요제프 프링즈 추기경의 신학 자문(peritus) 겸 독일어 권의 대표자 자격으로 참가했다. 라칭거는 공의회 동안 한스 큉과 에드워드 쉴레벡스크 같은 진보적인 근대주의 신학자들과 함께 교회 쇄신의 실무적 기틀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라칭거는 1966년 튀빙겐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세계적인 신학자인 한스 큉이 있는 대학이었다. 라칭거는 1968년 저서 '그리스도교회 입문서'를 통해 교황은 의사 결정을 하기 전에 교회 안의 다양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강조하는 등 진보적인 목소리를 이어갔다. 또한 교황청의 관료들이 교회를 경직시키고 있다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이처럼 진보적 성향이었던 라칭거를 보수주의로 돌아서게 만든 것은 1967~1968년 독일 대학가를 휩쓴 네오마르크시즘 열풍이었다. 당시 라칭거처럼 진보적 성향의 교수들마저 학생들에게 강의 마이크를 빼앗기는 사건이 벌어졌다. "성경은 대중을 기만하는 비인간적 문헌", "예수에게 저주를!" 등 극렬한 주장을 담은 전단과 구호가 교정에 난무했다.
결국 라칭거는 강경한 보수적 성향으로 돌아섰다. 훗날 그는 회고록에서 "당시 나는 무신론적 열정에 사로잡힌 흉한 얼굴, 심리적 불안, 모든 도덕적 성찰을 부르주아의 썩은 냄새라고 내던져 버리는 열등의식, 이런 것들이 베일을 벗는 장면을 목도했다"라고 회고했다.
1969년 그는 바이에른의 레겐스부르크 대학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곳에서 라칭거는 가톨릭 신학 사상잡지인 '통교(Communio)'를 발간하는 데 많은 애정을 기울였다. ‘통교’는 오늘날에도 독일어, 영어, 스페인어를 포함한 17개국 언어로 출판되고 있는 권위 있는 학술지이다.
1977년 3월 24일 라칭거는 뮌헨과 프라이징의 대주교로 임명됐다. 그해 6월 27일 당시 교황 바오로 6세는 라칭거를 추기경으로 선임했다. 1981년 11월 25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라칭거를 교황청 신앙교리성의 장관으로 임명하였다. 라칭거는 교황청 성서위원회 위원장과 국제신학위원회 위원장도 역임했다.
신앙교리성 장관 재직 기간에는 해방신학의 마르크스주의에 비판적 입장을 보였다. 남미의 급진적 해방신학 운동에 제재를 가하는 법안을 제정하기도 했다. 많은 해방신학자의 활동이 중지되거나 파문 조치가 내려졌다.
라칭거는 교회에 대한 공개적 비판도 용납하지 않았다. 교황청의 교권주의를 비판해온 한스 큉 등 진보적인 신학자들에게 수업 및 저서 출판 금지 등 처분을 내렸다.
2005년 4월2일 제264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선종했다. 그해 4월 19일 차기 교황을 선출하는 콘클라베에서 라칭거 추기경은 78세의 나이에 새 교황 베네딕토 16세로 선출됐다. 베네딕토 16세는 당시 상황을 "마치 나에게 단두대의 칼날이 떨어지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갑자기 현기증이 일었다"라고 회고했다.
베네딕토 16세는 교황 하드리아노 6세(1522–1523) 이후 482년 만의 독일인 교황이다. 가톨릭 역사상 여덟 번째 독일인 교황이다.
베네딕토 16세는 2005년 4월 25일 일반신자들을 알현하던 중 자신이 베네딕토라는 이름을 선택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혔다.
"베네딕토 15세와 영적인 유대를 맺기 위하여 베네딕토 16세라 불리기를 원했다. 그분은 제1차 세계대전이라는 혼란의 시기에 교회를 이끄셨던 분이다. 그분은 용기 있고 진정한 평화의 예언자이다. 그분은 무엇보다도 대담한 용기로 전쟁의 비극을 막고 전쟁에 따른 불행한 결말들을 줄이고자 노력했다. 그분의 뜻을 이어받아 사람들 사이의 화해와 조화를 위해 봉사하는 것을 저의 사목으로 삼고 싶다. 평화라는 위대한 선은 그 무엇보다도 가장 우선하는 하느님의 선물이다."
베네딕토 16세는 뇌졸중과 심장병 등 지병을 지니고 있었다. 베네딕토 16세의 전기를 쓴 작가인 존 앨런에 따르면 그는 1991년 뇌졸중 후유증으로 시력에 문제가 생겼으며 심한 현기증과 수면장애에 시달렸다. 교황으로 선출되기 오래전부터 심장박동기를 착용해왔다는 사실도 사임 직후 밝혀졌다.
베네딕토 16세는 2013년 2월 11일 바티칸에서 열린 추기경회의에서 28일 오후 8시를 기해서 교황직을 사임한다고 발표했다. 그는 사임 발표문에서 "하느님 앞에서 양심을 성찰하면서 ‘급변하는 세상’, ‘신앙생활의 중대한 문제들로 흔들리는 세상’에서 베드로 직무를 수행하는데 요구되는 ‘몸과 마음의 힘’이 없다고 확신하고, ‘온전한 자유’로 교황직을 사임한다"고 말했다.
뉴욕타임스(NYT)는 "베네딕토 16세가 항상 열렬한 지지자들과 강한 반대자들을 끌어들인 교황이었다"고 평가했다.
교회의 보수주의자들은 그를 지적이고 영적인 북극성이자 세속주의와 변화하라는 압력에 직면해 교회 교리를 옹호한 지도자로 평가했다. 반면 그를 비판하는 이들은 교회 내 성추문 사건에 대해 너무 소극적으로 대처했으며 전임 요한 바오로 2세의 카리스마가 부족했던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베네딕토 16세가 임명한 많은 사람들을 해고하거나 강등시켰고 교회의 우선순위를 바꾸기도 했지만, 베네딕토 16세는 아동 성추행 추문 피해자들을 만난 최초의 교황이었다고 NYT는 밝혔다.
전임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2022년 마지막 날 95세로 선종했다. 마테오 브루니 교황청 대변인은 성명을 통해 "명예교황 베네딕토 16세가 오전 9시34분 바티칸의 마테르 에클레시아 수도원에서 선종했음을 슬픔 속에 알린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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