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갤러리서 14년 만의 개인전...'Where You Stand'
10여 년간 얇은 천 '투명한 막'과 투쟁 '환영의 세계' 극대화
"안개풍경은 풍경화 아닌 세계화"..."회화는 일종의 기계"
신작, 비트겐슈타인처럼 깨달은 '언어의 투명성' 미학적 창출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신비한 풍경화, 버드나무가 흔들거리는 그저 몽롱하고 축축한 초록의 풍경화로만 봤다. 몰라봤다. 그 뿌연 안개 너머의 '환영(幻影)의 세계'를.
'안개 작가'로 유명한 이기봉(65)은 반전이었다. 시지각과 언어, 물질감각을 논하는 철학자같은 면모를 보였다.
국제갤러리에 14년 만에 등장한 그는 군살 없는 마른 몸태로 청산유수와 같이 말을 쏟아냈다. 국제 서울점과 부산점에서 동시에 '당신이 서 있는 곳'(Where You Stand) 개인전을 17일 개막했다.
안개 풍경과 '검은 추상' 신작으로 오랜만에 돌아온 그는 삶을 포장해온 환영을 일깨우기 위해 애를 썼다. 현재의 삶이 매트릭스의 세상이라는 걸 알아차린 '네오'를 떠올리게 했다. 마치 '매트릭스 세계의 저항군'처럼 삶과 죽음 경계의 이 세계는 '환영'이라는 것을 강조했다.
기계의 숫자 사이로 문을 열고 다니는 영화 '매트릭스'처럼 작가는 '막과 막 사이'를 넘나든다. 렉시글라스(얇은 아크릴 판)와 '얇은 폴리 천'을 무기로 보이지 않는 환영을 보이려 고도한 정신 노동을 하고 있다. 그는 무엇을 그리고 있는 것일까? 그가 보여주려는 것은 무엇일까?
'투명한 막'...그 안개 같은 천의 무한 세계
안개풍경 작품은 파이버(fiber)라는 투명한 천이 겹쳐 있다. 그는 이 천을 '상상속의 투명한 막'으로 사용한다. "막을 드러내기 위한 하나의 장치이고 제 작품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죠. 저는 그 막과의 싸움인 것 같아요. 뚫고 싶기도 하고 깨트리고 싶기도 하고..."
천으로 가린 막은 눈을 뚫고 나갈 수 없는 경계망이다. "작업하면 별별별 생각이 다 듭니다. 하지만 저 천은 재료로서 오랫동안 진실이어서 끊임없이 쓰게 됩니다. 막을 쳤다고 다 좋아지는 건 아니어서 그래서 투쟁이 있죠. 하지만 진실을 얻게 되는 그 느낌, 환영을 만들어낼 때 그게 좋아서 그냥 하는 겁니다. 밤을 새서 많이 피곤하죠. 하지만 내 마음에 쏙 들게 나오면 그 경계선, 거기까지 도달하면 스스로 위안을 주고 칭찬합니다. '해냈다 잘 살았다'라고"
안개가 낀 듯 부드러워 보이는 작품은 결국 작가 행동의 결과다. "오랫동안 매만지다 보면 순화되고 부드러워지면서 작가에게 좋은 메시지를 주는데 도움이 되죠."
그는 작품의 방향은 '세계성'으로 잡았다고 했다. "일반 풍경하고 좀 다른 접근 방법으로 일종의 풍경화라기보다 세계화"라고 주장하는 이유다. "자연은 꼭 나무 풀만이 아니고 흘러가는 모양태를 하는데 투명한 천, 그 막이 핵심 포인트입니다. 안개처럼 보이는 그 흐름을 깊이 있게 인식시켜주고, 우리의 감각이나 지각을 혼란시켜주는 환영의 물질로 시각세계를 넓혀주는 존재감입니다."
"회화는 기계"...뇌가 조작해내는 허구들
"회화는 일종의 기계"라는 그는 "뇌 안의 이미지들 현상들, 뇌가 조작해내는 허구들 이런 것들을 연출해내는 기계가 회화라고 생각한다"고 설명했다.
"생각이 물질화, 표면화 됐을때 감각이 형성됩니다. 그래서 회화라는 조건은 안개처럼 미스테리하고, 그것을 우리는 깊이 파악하기에 쉽지 않다는 거죠. 회화의 매커니즘을 이해해야 하는데, 메시지 전달 창구로서 디지털 패널처럼 굉장히 복잡한 구조를 가지고 있어요. 회화는 그렇게 오랫동안 뇌 안의 세계를 반영하고 작동하는 기계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죠."
그는 이 세계를 복잡성과 복잡성의 대면이라고 본다. "마치 데카르트의 기계론처럼 단순한 구조가 아닌 디지털 시스템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다."
그걸 가르는 '얇은 막' 같은 '섬세함'은 필수조건이다. "회화는 아무리 거친 그림이라고 할지라도 섬세한, 심리적 감각적 흐름이 내재되어 있기 때문에 그것(섬세함)없이는 회화가 작동하지 않아요."
안개풍경...쌀쌀한 기분 온도 느낌까지 담아
"나 혼자 있기 위해서입니다. 인위적인 구조물을 최소한으로 제거했죠. 아무런 보호막도 없고 장치도 없이 홀로 던져졌을 때, 강해지고 싶은 심리적인 감각을 표현한 겁니다."
그에게 물은 생명이다. "'습한걸 좋아합니다. 이 세계는 습도로 운행된다 생각하죠. 제게는 물 자체가 중요한 조건입니다. 물 관찰을 많이 하고 만지려고도 하고, 그러면 불가능성이 생긴다는 걸 인식하지요."
'물가 풍경'은 그래서 안개 속 온도, 쌀쌀한 기분이 나는 것까지 생각한다. 물가를 그리는 이유는 또 있다. "화면을 자르는 역할이죠. 선을 그어서 해주면 균형감, 다양성에 도움을 줍니다. 하지만 그 깊이감 온도의 느낌...10여년간 그려왔지만 물가 표현은 어려워요."
안개 풍경은 치렁치렁한 '버드나무'가 상징이기도 하다. 어릴 적 무서웠던 기억이 소환되어 있다. "엄청 큰 버드나무가 흑백으로 보였어요. 검은 물체가 흔들리는....으시시하기도 하고 굉장히 강렬한 기억으로 남아있어요."
그럼에도 화면 중앙에서 흔들거리는 버드나무는 멋있는 자태다. 그래서 "그림이 잘 안될 때 집어넣으면 화면의 활력소를 주기도 하죠. 제 설치 작품에도 출현하는데 해외에서는 무섭다고 하더군요."
존재감이 강렬한 버드나무는 결과적으로는 "살아있다"는 메시지를 전한다. 삶과 죽음의 힘이다. "존재의식이 강렬하기 때문이기도 하죠. 시선을 두고 관찰하면 이 세상은 메시지 투성입니다."
신작은 '혼돈의 방'...'언어의 투명성' 막으로 활용
"기차여행을 하다보면 내가 움직이는 건지 풍경이 움직이는 건지 혼돈스럽잖아요." '당신이 서 있는 곳'(Where You Stand)'을 이번 전시 제목으로 단 이유다.
'안개 풍경'이 '얇은 천 막'으로 나왔다면, '혼돈의 방'은 '글자의 막'이 쳐졌다. 30여 년간 읽고 본 독일 철학자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의 책 '논리 철학논고'를 깨달으면서다.
"결국 이 세상은 알 수가 없다는 것. 모든 것을 파악하려고 해도 우리는 언어적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환영이라는 환영을 보는 것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비트겐슈타인이 '언어의 투명성'을 철학적(이론)으로 만들어냈다면, 자신은 "미학적(시각)으로 만들었다"고 했다.
'이 세계는 진짜를 보는게 아니구나'를 깨닫게 된 놀라움은 언어를 '막'의 조건으로, 레이어의 쓰임새로 자유롭게 활용했다.
"텍스트 자체는 내 안의 막입니다. 세상을 볼 때 결국 (언어)막을 통해서 보는 것이죠. 모든 이미지는 텍스트 구조안에 있어요. 그 막이 흥미로워 눈이 반짝반짝 떠졌던 작업입니다. 맑음이 흐림으로 변할 때 레이어처럼 텍스트가 갖는 혼돈의 효과가 과연 뭘까? 하는 불확실한 세계의 미학입니다."
이 세상은 '환영의 세계'...'당신이 서 있는 곳'이 중요
이쪽과 저쪽, 환영의 막을 치고 몽환적으로 그리며 찾아낸 건 '움직여라'는 명제다. 생각하고 움직이면 근거들이 만들어지는게 신기했다. 그는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중요한 포인트"라며 "그린다는 것, 그게 나의 본성"이라고 했다.
어릴 적 부터 '피카소가 되는 게 꿈'이었다. "지금도 그런 꿈이 있어요. 피카소처럼 되기를 원했다면, 이젠 피카소처럼 살다가 죽는게 꿈입니다."
그 꿈은 '새디스트적인 쾌락주의'로 완성되고 있다. 수많은 생각의 겹과 막의 층으로 이뤄진 작업은 혼자서 한다. "가끔 제자들이 해주기도 하는데, 결국 혼자 하는 작업입니다. 제 작품에 남의 살을 넣을 수는 없지 않나요? 내 살, 제 걸 갈아 넣는 걸 좋아합니다."
'내 살이 들어가는', 내 손으로 그리는 그림에 통해 알게 된 것도 '환영'이다. "손으로 위로 할 때 보세요 '마음의 환영'이 있잖아요. 그러면 손이 뭐냐. 귀중한 게 한두가지가 아니구나. 하하 머리가 복잡합니다. 생각할 게 많죠. 관계망과 사고의 접합성 때문에 그래서 깊이감이 생깁니다."
그는 '의식, 장소, 환영'을 삶의 조건으로 본다. 전시 제목 '당신이 서 있는 곳'이 그래서 핵심어다.
"당신이 서 있는 곳이 진짜 세계라는거죠. 딴 데서 찾으려고 하지 마세요. 여기 혼자 서서 멀리 도달할 수 없는 곳을 쳐다보는 저기 말고요. 결국 지금 내가 있는 곳이 중요하다는 거죠"
이 말은 글자로 만든 설치 작업에 압축됐다.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만 있는 하얀 색의 설치 작품은 중간이 비어 있다.
"우리는 텅 빈 시스템에 살고 있어요. 삶과 죽음의 관계, 삶 속에 죽음이 묻어 있고 죽음속에 생명이 묻어 있고, 분열적으로 나눌 수도 있지만, 첫 페이지와 마지막 페이지 사이에 무한대 페이지들이 여기에 있지요."
그의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텅 빈(empty) 공간인데 빛이 찬 진공관처럼 느껴진다.
"우리가 책을 읽고 넘길때 막 넘기지 않지 않고 천천히 한 페이지씩 넘기잖아요. 신체들이 생명들이 삶들이 파노라마속에 있다는 생각입니다. '너는 어디 페이지를 읽고 있니?' 하는 질문을 해봤으면 합니다."
흐리거나 혼란한 '그림자 게임' 같은 세상의 환영을 보여주며 '너는 어디에 있니'를 묻는 그의 작업은 감각과 의식을 촉진한다. 하지만 온전한 밀도감에도 여전히 애매하며 해석되지 않는 이미지를 어떻게 바라볼지 모르겠다는 예술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인간에겐 여러개의 방이 있어요. 모델하우스처럼 이방, 저방, '예술의 방'이 있어요. 모든 사람들한테 원래 있었어요. 그런데 워낙 안 써서 방문이 잠겨 있어요. 저는 그 키를 드리는 거예요. 제 전시는 그 방을 소개하고 이 세계가 이렇게 아름다워요 말씀드리는 시간입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보도록 그 '예술의 방'을 여세요."
역시 '예술은 환영'이다. 아름답고 무용(無用)한 것의 가치, '선(善)으로 가는 길'을 안내한다. 전시는 12월31일까지.
'안개 작가' 이기봉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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