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진섭 평론가 기획전...'달의 마음, 해의 마음'
한국현대미술 흐름 한 눈 51명 참여…10월5일까지
[서울=뉴시스] 윤진섭 미술평론가 전시기획자 = 선화랑의 설립자 故 김창실(1935-2011) 회장이 서거한 지도 어언 11년이 지났다. 나는 김 회장이 선화랑의 문을 연 해 어느 날의 일화를 지금도 또렷이 기억한다.
1977년 가을, 그룹은 한국 전위미술의 최전선을 이루고 있었다. 회장인 이건용을 비롯하여 성능경(총무), 신학철, 김용민, 김용익,남상균, 김홍주, 김용철, 김장섭 등등 전위적 작업을 하는 작가들이 회원으로 있었다.
당시 이 그룹의 막내로 활동을 하던 나는 가을 정기전 장소를 구하기 위해 인사동을 찾은 이건용, 성능경 등 선배들의 뒤를 따라 선화랑 안으로 들어섰다.
“이분들, 일본 사람?” 거기, 새로 문을 열어 산뜻한 화랑의 한가운데 화려한 장식 소파에 앉은 한 중년의 미인이 우리를 쳐다보며 직원으로 보이는 옆 사람에게 물었다. 아마도 장발에 청바지 차림의 모습 때문에 우리 일행을 일본 작가로 오인한듯 싶었다. 우리는 대관 전시장을 구한다는 의도를 밝혔는데, 설명은 들은 김 회장은 얼굴에 잔잔한 미소를 띠며 말했다.
“우리는 기획 전문 화랑이라 대관은 안 해요.”
인사동 로타리에서 조계사 방향으로 조금 올라간 곳에 위치한 붉은색 벽돌 단층건물이 선화랑이었다. 당시 인사동과 안국동에는 1970년에 문을 연 현대화랑을 비롯하여 통인화랑, 문헌화랑 등등 상업화랑이 10여 곳에 지나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 후, 선화랑은 한국화랑협회장을 두 차례(1985-87, 1990-93)나 역임한 고(故) 김창실 회장이 미술계에 끼친 개인적인 업적은 물론, 계간지 '선미술'(1979-1992)과 '선미술상'(1984-2010)을 통해 미술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선화랑 개관 45주년...한국 현대미술사 흐름 주도한 화랑
1970년대 초반 이후 한국 현대미술의 전개는 대략 서너 개의 지류로압축, 요약된다. 첫째는 다원주의적 경향이다. 이는 특히 1972년에 미협이 창설한 [앙데팡당]전을 비롯하여 [에꼴드서울](1975), [서울현대한국 현대미술 45년의 궤적과 오늘의 얼굴선화랑 개관 45주년에 부쳐 미술제](1975) 등등 당시 덕수궁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열린 전국 규모의 대형전시를 통해 모습을 드러냈다.
지금 세계적으로 부상한 단색화를 비롯하여 극사실주의, 개념미술, 설치미술, 오브제 미술, 비디오아트, 이벤트 등등이 그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대상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극사실주의 회화가 동아일보, 한국일보, 중앙일보 등등 언론사가 주최한 민전을 통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 극사실주의 회화는 박정희 정부가 주도한 60년대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이 열매를 따기 시작한 70년대의 도시 미감을 반영하는 것으로 일정 부분 팝아트의 형성과도 관련이 있었다.
이번 전시의 초대작가인 벽돌을 소재로 한 김강용의 작업, 고전 명화를 패러디한 한만영의 그림, 자연 풍경을 소재로 극사실적 묘사에 주력하는 주태석, 도시의 일상을 소재로 한 이석주 등의 작품이 이 범주에 속한다.
1980년대 중반에 접어들면서 미술계는 점차 국제화의 물결에 휩싸이기 시작한다. 80년대 초반에는 칼라텔레비전이 방영되고 해외여행 자율화가 시행되는 등 좁은 우물안에 갇혀있던 한국사회가 중동 특수 등 경제적 호황에 힙입어 국제화의 파고를 높여나갔다.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의 한계를 극복하고 미술의 외연을 확장해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80년대 중반부터 미술 현장에서 논의되기 시작한 포스트모더니즘은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신표현주의를 비롯하여 정치적 아방가르드, 뉴페인팅, 트랜스아방가르드 등등 구미에서 발원한 다양한 미술사조에 자극을 받아 한국적 상황에서 “회화란 무엇인가?” 하는 논의를 불러왔으며, 작가들은 독자적인 작업을 추구하고자 했다.
회화와 사진, 설치미술을 통해 자아의 의미를 회화적으로 깊이 있게 풀어나간 권여현, 전통의 현대화 문제를 회화와 설치, 오브제 작업을 통해 다루고 있는 곽훈, 동양화 전공이지만 아크릴 칼라와 문자 등 재료와 내용 면에서 회화의 경계를 허물고자 한 황창배, 단종 등 역사적 인물을 등장시켜 원색의 강한 색채와 터치를 통해 표현의 영역을 넓힌 서용선, 보도사진을 조합하여 거대한 화면을 창출하는 기법을 실험한 홍순명 등의 작업이 이 범주에 속한다.
1980년대 한국 화단은 크게 모더니즘과 민중미술의 대립으로 요약된다. 이 시기는 이념이 다르면 미술대학 동기생이 개인전을 열어도 개막식에 가지 않을 정도로 경색돼 있었다. 70년대 이어 최루탄이 거리에 난무하던 80년대 국내의 정치적 상황은 민중미술의 강세와 모더니즘의 약화라는 두 개의 얼굴을 낳았다. 그러나 이러한 경색 정국은 1987년 ‘민주화 선언’을 고비로 점차 풀려나가는 징후가 역력했다.
1987년은 '뮤지엄' 그룹이 창립된 해로서 이 땅에 ‘신세대’ 논의를 본격화시킨, 문화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해이다. 최정화, 이불, 고낙범, 정승, 홍성민 등으로 대변되는 신세대의 등장은 당시 유행하던 압구정동 문화와 관련하여 포스트모더니즘 미술의 단초를 이룬다. 그 후 신세대 미술은 '황금사과' 등으로 이어지면서 활발한 그룹 활동을 낳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룹 차원의 활동이 약화되는 동시에 개별화, 파편화되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1995년 광주비엔날레의 출범은 그 이전의 작가 중심 전시기획에서 미술사를 비롯한 미술비평, 미학 전공의 전시기획자들에 의한 기획으로 이행해가는 단초가 되었다. 물론 이러한 징후는 그 이전인 90년대 초반부터 뚜렷한 현상으로 나타났지만, 김영상 정부에 의한 세계화 전략은 거대자본에 의한 상업주의의 붐을 불러일으켰다. 미술시장 개방에 따른 서구의 저명한 미술계 인사들의 잦은 방문과 크리스티, 소더비 등 거대 경매회사의 한국 지사 설립 등 새로운 변화는 국내 미술시장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면서 상업주의의 확산을 가져왔다.
이는 곧 작가들에 의한 아방가르드 전시기획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미술의 집단화가 종언을 고하게 되고, 화단은 작가들의 생존을 위한 각개 전투들이 야기한 파편화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김정인, 모준석, 김덕한, 박정혁, 박현웅, 송지연, 심우현, 아트놈, 이만나, 이상용, 이명지, 정명주 등등의 작가들은 모더니즘이란 거대 담론의 붕괴 이후 각자 개별화, 파편화되는 동시에 서로 다른 개성을 보여준 이 시기의 미술 현상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들이다.
선화랑 45년, 미술계 급격한 변화...좋은 미술시장, 결국 작가 다양한 멍석 깔아줘야
돌이켜 보면 지난 45년은 한국 미술이 국제화를 이루면서 급팽창한 미술시장이 한국미술의 판도를 바꾼 변수로 등장한 기간이었다. 70년대 초반, 불과 10여 개의 화랑이 모여 결성한 한국화랑협회의 회원 수는 현재 160여 개에 이르지만, 미등록 화랑들을 포함하면그 숫자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다.
국내화랑들의 해외 아트페어의 참가와 KIAF와 FRIEZ 등 거대 아트페어의 경쟁, 국내 아트페어의 난립 등등 미술시장은 때로 난맥상을 보이기도 하지만, 작가들의 존립 기반이 미술시장인 점을 감안하면 미술시장의 활성화는 작가들의 생존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호재이다.
문제는 미술의 질을 높이는 일이다. 좋은 작가가 좋은 미술시장을 형성하고 좋은 작품이 차고 넘칠 때 미술시장은 활기를 띠게 마련이다.
그러면 좋은 미술시장의 형성을 위해서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보다 작가들이 다양한 개성을 발휘할 수 있도록 멍석을 깔아주어야 한다. 좋은 미술시장이란 갖가지 꽃들이 아름답게 핀 화단처럼 이것저것 다양한 작품들이 모여 창의성의 경쟁을 벌이는 곳이다. 활기가 없는 시장이란 향기가 없는 꽃처럼 죽어있는 시장을 이름이니, 작가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 넣여야 한다.
선화랑 개관 45주년 전시 제목은 선화랑의 설립자인 고 김창실 회장의 저서 '달도 따고 해도 따리라'(김영사)에서 착안한 것이다. 평소 ‘달의 마음’과 ‘해의 마음’으로 미술을 보듬고 사랑했던 고인을 기리고, 어느덧 개관 45주년을 맞이한 선화랑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생각해 보자는 의미에서 그렇게 정했다.
올해 개관 45주년을 맞이하여 급변하는 국내외 미술계의 동향에 부응하기 위한 선화랑의 노력은 계속될 것이며, 이번 전시는 그러한 노력의 일환이다. 전시는 10월12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