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국가 폭력에 부랑아로…10년 만에 만난 가족은 정 말라 낯섦만"

기사등록 2022/08/30 06:28:00

■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 피해자 진동수씨

10살에 할머니 잃어버려 혼자 있다 경찰에 속아 입소

2년8개월간 구타 및 가혹 행위…맞다가 죽은 사람도

함께 살던 할머니·할아버지, 입소 1년만 화병에 사망

13살에 나와 20살까지 껌팔이·배달·노숙 생활 등 방황

"형제복지원 들어가면서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졌다"

"부랑아 아닌 사람 잡아 놓고 결국 부랑아로 만들어"

진실규명 대상자 결정…국가 상대의 민사 소송 남아

[대구=뉴시스] 전재훈 기자 = 지난 27일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의 피해자 진동수(56)씨가 대구 북구 자택에서 뉴시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2.08.29. kez@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대구=뉴시스] 전재훈 기자 = 지난 27일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의 피해자 진동수(56)씨가 대구 북구 자택에서 뉴시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2.08.29.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대구=뉴시스]전재훈 기자 = "13살에 형제복지원에서 나와보니 멀쩡한 가정의 아들이었던 제가 부랑아가 돼 있더라고요. 집도 부모도 찾지 못해 중국집 배달과 지하철 껌팔이, 소매치기, 도둑질을 하면서 살고, 화장실에서 본드와 약에 취해 절어 있는 게 일상이 됐습니다. 형제복지원이 부랑아 아닌 사람을 잡아 놓고 부랑아로 만들어버린 꼴이죠."

진동수(56)씨의 본명은 강동현이다. 진동수란 이름은 형제복지원이 지어준 이름이다. 진씨가 강동현이었던 45년 전, 부산의 한 파출소 경찰관은 기차에서 할머니를 잃어버린 채 부산역 대합실에 앉아 있던 진씨를 발로 차 깨웠다. 그는 진씨에게 집으로 보내주겠다며 파출소로 데려갔고, 얼마 뒤 생선 썩은 내가 나는 탑차에 진씨와 앞서 잡혀 온 아이들을 강제로 태우고 문을 잠갔다.

"얼른 내려!" 몇 시간 뒤, 건장한 청년들이 울며 버티던 아이들의 머리채를 움켜쥐고 밖으로 끌고 나갔다. 부산의 부랑아 수용 시설인 형제복지원이었다.

1960년부터 1992년까지 운영된 형제복지원은 사회 통제적 부랑인 정책 등을 근거로 공권력이 직간접적으로 개입, 부랑인으로 분류된 이들을 강제 수용해 강제노역·폭행·가혹행위·사망·실종 등을 겪게 했다는 의혹을 받아왔다. 2기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는 2021년 5월 조사개시 이후 약 1년3개월만인 지난 23일 39차 위원회를 열고 "부당한 공권력 행사에 의한 인권 침해"라고 진실규명 결정을 내렸다.

진씨는 지난 27일 뉴시스와 만나 "탑차에 또래 아이가 3명 더 있었는데, 반항하는 애들은 물건처럼 던져지고,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갔다. 그때부터 2년8개월 동안 맞지 않는 게 목적인 삶을 살았고, 내 인생이 송두리 째 망가지기 시작했다"고 말했다.

그는 형제복지원에서의 생활을 "지옥"이라고 표현했다. 100명 가까운 진씨 또래 아이들은 15소대에 배정돼 20~30대 입소자인 소대장, 조장, 서무의 명령을 받으며 제식 훈련과 작업에 투입됐다. 한 명이라도 사도신경과 원훈을 외우지 못하면 100명이 모두 얼차려를 받았다. 소대 생활관 구석에 놓인 각목에 맞아 피가 나고 뼈가 부러지는 매일 반복됐다고 진씨는 설명했다.
[서울=뉴시스] 전재훈 기자 = 경찰에게 수용 의뢰된 부랑인이 형제복지원으로 들어가는 모습. (사진=진실화해위 제공) 2022.08.24. *재판매 및 DB 금지
[서울=뉴시스] 전재훈 기자 = 경찰에게 수용 의뢰된 부랑인이 형제복지원으로 들어가는 모습. (사진=진실화해위 제공) 2022.08.24. *재판매 및 DB 금지

진씨는 형제복지원에서 원래의 이름도, 온순한 성격도, 가족도 잃어버렸다. 함께 살던 손주를 잃어버려 화병에 걸린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1년 만에 돌아가시고 없었다. 진씨는 형제복지원에서 나온 13살부터 7년 동안 부모님의 생사도 모른 채 방황할 수밖에 없었다.

진씨는 "기억을 더듬어 충남 아산의 할머니 댁에 갔는데, 사람 사는 흔적이 없더라. 문도 없이 폐가가 된 초가집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형제복지원에 대한 원망스러운 마음만 계속 들었다"고 말했다.

형제복지원에서 나와 부산과 서울의 소년의집에서 생활하던 진씨는 단체 생활에 대한 트라우마에 고통받다 소년의집에서 도망쳐 서울역, 용산역 근처에서 노숙하며 방황하고 살았다고 한다.

20살이 된 진씨는 당시 근무하던 천안의 한 공장에서 사장의 도움을 받아 경찰청 '가족 찾기'와 한 신문사의 취재를 통해 어머니를 찾았다. 진씨는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는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우는데, 10년 동안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부모에 대한 정은 싹 말라버려서 없더라. 서먹서먹해서 눈도 못 마주치겠고, 원망이 들기도 하고, 복잡했다"고 회상했다.

현재 56살의 진씨는 결혼을 해 아들을 낳고 새로운 가정을 꾸려 지내고 있다. 그는 "그 어린 나이에 형제복지원에 끌려가는 바람에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살아본 경험이 많지도 않았고, 사랑을 어떻게 받았는지 모르니까 주는 방법도 몰랐다"며 "산수도, 글자도, 사랑하는 방법도 모르니 반장애인으로 살아왔다. 그곳에 살면서 인생 자체가 뒤바뀌어버렸다. 지금이야 가정을 꾸리고,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고 있지만, 가슴앓이를 많이 했다"고 말했다.

진실규명 결정 대상자인 진씨의 잃어버린 인생은 아직 보상받지 못했다. 진실화해위는 진씨를 비롯해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의 진실규명 신청자 544명 중 191명을 1차 피해자로 인정했지만, 조사기구인 진실화해위의 '국가의 사과 및 명예회복', '트라우마 치료 지원' 등의 권고에는 강제력이 없다. 진씨와 같은 피해자들은 이제 진실화해위가 인정한 피해 사실을 토대로 국가를 상대로 한 민사 소송을 벌여야 한다.  
[대구=뉴시스] 전재훈 기자 = 지난 27일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의 피해자 진동수(56)씨가 대구 북구 자택에서 뉴시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2.08.29. kez@newsis.com *재판매 및 DB 금지
[대구=뉴시스] 전재훈 기자 = 지난 27일 형제복지원 인권침해 사건의 피해자 진동수(56)씨가 대구 북구 자택에서 뉴시스와 인터뷰하고 있다. 2022.08.29. [email protected] *재판매 및 DB 금지

다음은 진씨와의 일문일답.

-형제복지원에 강제 입소된 절차가 어떻게 되는가.

"어머니가 재혼하면서 서울에 살고 계셨고, 나는 할머니, 할아버지와 충남 아산에 살았다. 할머니와 서울의 어머니 집에 갔다가 돌아가는 길이었다. 기차를 타고 아산에서 내렸어야 했는데, 때마침 내가 화장실에 가는 바람에 할머니 혼자 내렸다. 내가 먼저 내린 줄 알고 내리신 것 같다. 자리에 돌아가 보니 기차는 출발했고, 할머니는 없고, 고민하다가 그냥 자리에서 잠이 들었다. 그렇게 부산역에서 깨어났고, 대합실에 앉아 있는데 누가 발로 툭 차면서 깨우더라. 경찰과 젊은 사람 둘이 서있었고, 내가 집에 가는 기차 좀 구해달라 하니까 데려다 준다면서 따라오라고 했다. 따라간 파출소 옆에 작은 컨테이너 박스가 있었는데, 내 또래 아이 3명하고 총각 하나가 있었다. 나중에 탑차가 컨테이너 박스 앞에 섰고, 얼른 올라 타라고 하더라. 울고불고 안 탄다고 반항하는 애들은 물건처럼 탑차에 던져지고, 머리채를 잡혀 질질 끌려갔다. 맞지 않으려고 조용히 탑차에 올라탔고, 생선 썩는 내가 났던 것이 기억 기억난다에서 문이 잠겼는데, 도착해보니 밤이더라. 사무실 같은 곳에서 인적 사항을 적고 15소대로 배정됐다. 그때부터 2년8개월 동안 맞지 않는 게 목적인 삶을 살았고, 내 인생이 송두리째 망가지기 시작했다."

-당시 나이가 어떻게 됐나.
"10살쯤 됐다.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 초등학교를 늦게 들어가 당시 2학년이었다."

-형제복지원 생활은 어땠나.
"지옥이다. 군대 내무반처럼 중간에 복도가 나 있는 생활관이었고, 같은 부랑아로 잡혀 들어온 20~30대 돼 보이는 사람들이 소대장, 조장, 서무로 있었다. 그들이 소대원 100명을 통제했다. 생활관 구석에 각목이 있었는데, 딴짓하거나, 사도신경이나 원훈을 외우지 못하면 바로 각목이나 손으로 맞았다. 한 명이라도 실수하면 전체가 얼차려를 받았다. 글씨를 몰랐던 나는 소리만 듣고 사도신경을 외워야 했다. 내가 못 외우면 다른 사람도 전부 기합을 받으니 4일 만에 외우게 됐다. 아침 5시에 일어나 저녁 먹고 한두 시간 앉아 있다 취침했다. 첫 1년은 그렇게 훈련만 받고, 그다음부터는 공장에서 근무했다. 밥은 세 끼 다 먹었는데, 국은 맹물에 소금 탄 수준이고, 가끔 나오는 생선 튀김은 먹으면 비린내와 썩은 내가 올라왔다. 거의 맨 보리밥만 먹으며 지냈다."

-폭행이 자주 일어났나.
"휘두르는 각목에 맞아서 피가 나고 뼈가 부러지는 일은 일상이었다. 그곳엔 의사도 없었고, 의무실에 가도 같은 입소자가 빨간약을 줄 뿐이었다. 팔이나 다리가 부러져도 부러진 채로 굳어지게 두었다."

-다친 적이 있는가.
"의무실에 자주 갔다. 좌향좌 우향우가 무슨 뜻인지도 몰랐을 정도로 어린 나이인데, 한 번 틀렸다고 '얼마나 돌대가리인지 보자'며 원산폭격 자세로 운동장 흙바닥에 머리를 박고 다리로 밀고 다니게 했다. 당시 상처가 심하게 나 얼굴이 피범벅이 되고, 뼈가 보일 정도로 머리의 상처가 벌어져 회복하는 데 1년이 걸렸다. 또 낚시 용품 공장에서 일하면서 오른손 검지가 프레스기에 끼어 손톱이 빠졌다. 이 역시 치료받지 못해 지금도 흉터가 있다."
 
-사망자가 657명명으로 집계됐는데, 사망 사고를 목격한 적이 있는가.
"점호 시간에 혼자 딴짓을 하다가 걸린 사람이 있었다. 소대장인가 조장이 몸을 어깨 위로 들어 올린 뒤 땅에 던졌는데, 머리부터 떨어져 쿵 소리가 크게 났다. 눈이 휙 돌아가고 입에선 거품을 내뿜더라. 몸이 덜덜 떨리다가 가만히 쳐지더니 아무런 소리를 내지 않았다. 소대원이 질질 끌고 의무실로 데려갔는데, 소대원들만 오고 그 사람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마 죽었을 것이다."

-탈출 시도를 하는 사람은 없었나.
"자주 봤다. 도망가다 잡혀서 돌아오면 일어서지 못할 정도로 맞았다. 그렇게 맞는 걸 보면서 점점 탈출을 시도하는 사람이 줄어들게 됐다."

-형제복지원에서 2년8개월 지냈다고 했는데, 어떻게 나오게 된 건가.
"어느 날 집이 어디냐 묻길래 어머니가 있는 서울 집이 생각나 서울이라 답했다. 그랬더니 부산의 소년의집으로 이동시켰다. 나중에는 서울에 있는 소년의집으로 가서 지냈는데, 형제복지원에서 나를 보내준 이유는 모른다. 부산 소년의집에 7개월 있다가 서울 소년의집에서 잠깐 있다가 도망 나왔다."

-소년의집을 나온 이유는 뭔가.
"형제복지원에 비하면 소년의집은 천국이었다. 밥도 주고, 수녀님들이 공부도 시켜줬다. 부모님이 찾으러 오면 보내준다고 했다. 그런데 단체 생활을 더는 하기 싫더라. 형제복지원에서 살았던 기억도 나고, 나가서 혼자 살고 싶은 마음이 컸다."

-나와서의 생활은 어땠나.
"부랑아가 돼버렸다.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이 그거다. 부랑아가 아닌 멀쩡한 사람을 잡아다가 부랑아 만들었다. 거기 들어갔다 나오니 모든 것을 다 잃었다. 살아야 되니까 구두닦이, 껌팔이, 배달, 도둑질, 소매치기하면서 노숙 생활을 20살 전까지 계속했다. 화장실에서 본드랑 약에 취해 절어 있는 게 일상이 됐다. 형제복지원이 부랑아 아닌 사람을 잡아 놓고 부랑아로 만들어버린 꼴이다."

-가족들을 찾진 않았나.
"기억을 더듬어 충남 아산에서 할머니 할아버지와 오래 살았던 집을 찾아갔다. 사람이 살았던 흔적이 없는 빈 집만 있었다. 문도 없이 폐가가 된 초가집을 가만히 보고 있으니 형제복지원에 대한 원망스러운 마음만 계속 들었다."

-어머니는 어떻게 찾았나.
"20살쯤에 천안의 작은 공장에서 일하게 됐는데, 사장이 내 사정을 듣더니 컴퓨터로 경찰청 사람 찾기에 등록하자고 했다. 이후에 신문사에서 가족을 찾은 거 같으니 통화해 보라고 연락이 왔고, 며칠 뒤 만나게 됐다. 막상 마주치니 누군지 알아볼 수도 없는 사람이 내 이름을 부르면서 우는데, 10년 동안 떨어져 살아서 그런지 부모에 대한 정은 싹 말라버려서 없더라. 서먹서먹해서 눈도 못 마주치겠고, 원망이 들기도 하고, 복잡했다. 옆집 아는 아주머니보다 더 못하고 서먹서먹하고 낯설고, 눈도 안 마주치고 싶고 그런 게 있더라. 원망도 약간 섞이면서 또 서먹서먹한 것도 있으면서. 부모가 있다는 걸로 만족한다. 다만 더 끔찍한 것은, 지하철에서 껌 팔고, 전단지 나눠줄 때 내 모습을 이모가 봤던 것 같다고 하더라. 내 그런 모습을 가족이 봤다는 게 매우 부끄럽다. 비극이다. 부모님도 나를 찾기 위해 여기저기 다 가봤다고 했는데 결국 못 찾았다고 했다."
   
-남아있는 트라우마가 있나.
"부산에 가지 않는다. 사찰 기념품들을 납품하고 있는데, 서울, 인천, 용인, 수원 창원, 울산 다 납품해도 부산은 납품하지 않는다. 가는 것 자체가 싫고, 그쪽 방향으로 고개를 돌리는 것도 싫다."

-진실화해위에 진실규명 신청하게 된 계기가 있나.
"티비를 보는데 '그것이 알고 싶다'에 형제복지원 얘기가 나오더라. 연락해서 이런 게 있다는 걸 알게 됐고, 아내와 상의해 신청하게 됐다. 그때 아내에게 처음으로 형제복지원에 있었던 사실을 털어놓았다. 나는 부랑아도 아닌 상태에서 잡혀갔고, 젊은 시절 힘들게 살았다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도 남처럼 됐다. 가족을 모두 잃어버려 허무한 마음이 들 것 같다. 지금은 다시 가족을 꾸렸는데, 가족이란 어떤 의미인가.
"어린 나이에 형제복지원에 끌려가는 바람에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사랑을 받으며 살아본 경험이 많지도 않았고, 사랑을 어떻게 받았는지 모르니까 주는 방법도 몰랐다. 산수도, 글자도, 사랑하는 방법도 모르니 반장애인으로 살아왔다. 그곳에 살면서 인생 자체가 뒤바뀌어버렸다. 지금이야 가정을 꾸리고, 사랑을 주고받는 법을 배우고 실천하고 있지만, 가슴앓이를 많이 했다. 지금은 못 주고받은 사랑 다시 주고받으며 살고 있다."

-국가의 폭력에 희생됐다고 진실규명 받았다. 소감과 함께, 국가에게 바라는 점이 있다면.
"기쁘다. 과거의 잘못된 것들이 제대로 밝혀지니까. 바라는 것은 없다. 사과든 보상이든 의미가 있나. 너무 오래되다 보니 원망 자체도 무뎌졌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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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국가 폭력에 부랑아로…10년 만에 만난 가족은 정 말라 낯섦만"

기사등록 2022/08/30 06:28:00 최초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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