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희동 자택서 8시45분 사망후 이송돼
군사 쿠데타로 집권…5·18운동 유혈진압
11·12대 대통령…6.29선언후 내리막길로
반란·내란목적살인 등 혐의로 1심 사형
YS가 사면 복권…추징금 안내 비난 받아
노태우 사과한 반면 끝까지 사과 안해
[서울=뉴시스] 박미영 정윤아 김승민 기자 = 전두환 전 대통령이 23일 사망했다. 향년 90세.
전 전 대통령 측근은 이날 뉴시스와 통화에서 "오늘 오전 8시 45분께 서울 연희동 자택에서 별세하셨다"며 "임종 때는 영부인만 옆에 계셨던 걸로 안다"고 전했다.
전 전 대통령이 화장실에서 쓰러져 있었으며 유족 측이 신고했다. 자택에서 사망 후 서울 신촌연세대세브란스 병원으로 이송을 준비 중이다. 악성 혈액암인 다발성 골수종 확진 판정을 받고 투병중이었다.
전 전 대통령은 최근 건강 상태가 악화돼 서울 서대문구 세브란스병원에서 통원 치료를 받아온 것으로 알려졌다.
지난달 26일 12·12 군사 쿠데타 동지였던 노태우 전 대통령이 별세한 데 이어 한 달도 채 되지 않아 전 전 대통령도 세상을 떠났다.
전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후 군사 쿠데타와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을 주도해 신군부 권력 장악의 핵심적 역할을 해 대통령에 올랐지만 민주화 이후 반란, 내란수괴, 내란목적 살인 등으로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 받는 등 추락의 길을 걸었다.
1931년 경남 합천에서 태어난 전 전 대통령은 대구에 정착해 1951년 대구공고를 졸업했다. 1952년 육군사관학교 11기로 입학해 노태우 전 대통령과 동기생으로 인연을 맺었다.
전 전 대통령은 4공화국 시절이던 1964년 3월 군내 사조직인 '하나회'를 결성해 1979년 12·12 군사 쿠데타를 주도했다.
그는 쿠데타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으로 신군부의 권력장악과정의 핵심이었다. 신군부 세력은 쿠데타 이후 정권 장악을 위해 1980년 5월 비상계엄조치를 전국으로 확대했다. 이는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의 시발점이 됐다. 이후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국보위)를 설치, 상임위원장에 올랐다.
전 전 대통령은 1980년 9월 1일 서울 장충체육관에서 통일주체국민회의 투표로 11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어 한 달 뒤에 대통령 임기 7년 단임과 간선제 선출을 골자로 한 헌법 개정안을 공포, 1981년 3월 3일 선거인단에 의한 간접선거를 통해 12대 대통령에 다시 당선됐다.
1987년 1월 14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6월 항쟁으로 민주화 운동이 번지면서 후계자로 지명한 노 전 대통령이 1987년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하면서 전 전 대통령의 삶은 내리막 길을 걷게 됐다.
전 전 대통령은 노 전 대통령의 '5공 세력 청산' 정책에 따라 백담사로 들어갔다. 이어 김영삼 전 대통령 집권 때 12·12 군사 쿠데타 및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 문제로 1995년 구속기소 됐다.
1996년 8월 26일 1심 재판에서 반란·내란수괴·내란목적살인·상관살해미수죄·뇌물죄 혐의로 1심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1997년 4월 대법원은 전 전 대통령에게 무기징역과 추징금 2205억 원을 확정판결했지만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결정으로 1997년 12월 22일 사면 복권됐다. 투옥기간은 2년으로 짧았다.
노 전 대통령이 아들을 통해 5·18 광주 민주화 운동 탄압에 대한 사과 의사를 밝힌 것과는 달리 전 전 대통령은 책임을 끝까지 인정하지 않았다. 추징금도 제대로 납부하지 않아 거센 비난을 받았다. 고인이 남긴 유언에 대해서는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
재임기간 중 무궁화대훈장, 건국훈장 대한민국장, 태극 무공훈장 등을 받았으며 '전두환 회고록' 전 3권을 집필했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5·18 당시 헬기 사격을 목격했다고 증언한 고 조비오 신부를 가리켜 '파렴치한 거짓말쟁이'라고 비난하고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돼 1심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항소심 재판이 진행 중이었다.
유족은 배우자 이순자 여사와 아들 재국·재용·재만 씨와 딸 효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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