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간 유럽 유랑민 DNA 수집·연구…인종 편견 등 윤리 문제 유발

기사등록 2021/11/18 11:08:51

인종적으로 편향된 경찰 데이터베이스 등 활용 연구

동종번식으로 유전자 독립 지켜왔다는 가정도 잘못

유랑민 집단에 대한 오랜 차별 온존·강화할 위험 커

【파리=AP/뉴시스】파리 교외 에브리에서 27일 집시 달동네가 철거되는 동안 다른 집시족들이 허름한 집에 쉬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천대받은 소수파인 집시족 로마는 대도시 주변에서 수도 시설도 없이 움막집 등서 생활하고 있다. 그들은 구걸로 연명하기 십상이다.
【파리=AP/뉴시스】파리 교외 에브리에서 27일 집시 달동네가 철거되는 동안 다른 집시족들이 허름한 집에 쉬고 있다. 유럽에서 가장 천대받은 소수파인 집시족 로마는 대도시 주변에서 수도 시설도 없이 움막집 등서 생활하고 있다. 그들은 구걸로 연명하기 십상이다.
[서울=뉴시스] 강영진 기자 = 수십년 동안 유전학자들은 유럽에서 소외된 채 살아온 유랑민(동유럽의 집시)의 유전자를 수집해 공공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해왔다. 표면적으로는 유랑민들의 유전자 역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알기 위한 것이 목적이었다.

그러나 일단의 과학자들이 이 연구로 인해 유럽 유랑민들은 지난 30년 동안 법의학적으로 가장 많이 연구된 집단이 되게 함으로써 윤리적인 문제를 발생시키고 유랑민들에게 피해를 입혔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미 뉴욕타임스(NYT)는 17일(현지시간) 유랑민 유전자 데이터베이스 활용에 보다 높은 윤리적 기준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는 네이처지 칼럼을 인용하고 유랑민 유전자 남용 사례를 소개했다.

독일과 미국, 영국의 과학자들이 지난 5년 동안 유랑민 유전자에 대한 논문 450편 이상을 검토했다. 그 결과 많은 논문들이 윤리 기준을 위반했음을 밝혀냈다.

1981년 헝가리 과학자들이 헝가리 교도소에 수감돼 있는 유랑민들의 유전자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외모만을 근거로 집시로 분류한 뒤 진행한 일이었다. 앞의 연구자들은 이런 방법이 완전히 비과학적이라고 지적했다.

1993년 다른 연구자들이 유랑민 유전자를 수집한 뒤 헝가리 거주자를 "순수 헝가리 민족 그룹" "유태인" "집시" 등 세 그룹으로 분류했다. 이같은 분류는 인종차별주의가 깔려 있는 것이라고 앞의 과학자들은 평가했다.

이 과학자들은 또 2000년대에 나온 집시 유전자에 관한 논문들도 여전히 '집시(Gypsy)'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을 문제삼았다. 집시라는 표현에는 근친상간 또는 동종 번식에 대한 경멸적 뉘앙스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인권단체들은 동유럽 지역의 유랑민은 집시가 아니라 '로마'(Roma)라는 단어를 사용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연구에 참여하지 않은 코네티컷 대학교 인류유전학자 데보라 볼닉은 "이번에 발표된 연구는 유전학 연구의 윤리적 관점에 대해 크게 기여한 것"이라고 평가하고 "윤리문제에 대한 논의는 그간 미국, 호주 등에서 활발했을 뿐 유럽에선 거의 없었다"고 말했다.

그는 "이번에 공개된 비윤리적 연구 관행은 이미 널리 퍼져 있어서 놀라운 일이 아니다"라고 덧붙였다.

유랑민 출신으로 뉴저지주 럿처스대학교 여성, 성, 성적 취향 학과장을 맡고 있는 에델 브룩스는 "정말 끔직한 일이지만 물론 익히 알고 의심하던 일"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에 사용된 논문들은 1921년부터 2021년 사이에 출판된 것들로 대부분은 최근 30년 사이에 발표된 것들이다.

독일 프라이부르크대 베로니카 립하르트 과학사 교수는 초기 논문들은 "너무나 충격적인 내용들을 포함하고 있다"면서 수감된 유랑민로부터 유전자를 채취한 사실과 논문에 사용된 수많은 인종차별적 언어를 예로 들었다.
【리옹=로이터/뉴시스】프랑스 경찰들이 23일 리옹 동쪽 볼-장-브렝의 불법 캠프에서 퇴거되는 집시(로마) 가족을 지켜보고 있다. 지난 15일 화재로 임시 숙소가 일부 불타 버린 불법 야영지에서 이날 수백 명의 로마들이 쫓겨났다. 2013. 08. 23
【리옹=로이터/뉴시스】프랑스 경찰들이 23일 리옹 동쪽 볼-장-브렝의 불법 캠프에서 퇴거되는 집시(로마) 가족을 지켜보고 있다. 지난 15일 화재로 임시 숙소가 일부 불타 버린 불법 야영지에서 이날 수백 명의 로마들이 쫓겨났다. 2013. 08. 23
그는 그런 관행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다"고 말하면 "믿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덧붙였다.

유럽에서 유랑민들은 수백년 동안 박해를 받아왔고 지금까지도 심한 차별을 받고 있다. 나치는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 수십만명의 유랑민들을 살해하면서 그들의 혈액 샘플을 수집했었다. 2015년 슬로바키아 정부는 유랑민 자녀들을 위한 학교를 별도로 운영하는 것에 대해 유랑민들 사이에 "높은 동종 번식 비율"로 인한 "경미한 정신적 장애"를 들며 옹호하기도 했다.

브룩스 교수는 이와 관련 "유전학이 우생학으로 잘못 뒤바뀌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했다.

프라이부르크대 객원사회학자로 이번 연구에 참여한 미하이 수르두 박사는 유랑민에 관한 책을 쓰면서 이번 연구의 필요성을 발견했다고 소개했다. "Roma" 또는 "Gypsies"라는 단어가 포함된 간행물을 검색하면서 유랑민들의 유전자에 대한 연구가 20편이 넘는다는 것을 알게 됐다는 것이다.

2012년 수르두박사가 립하르트박사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두 사람이 추가로 연구를 진행하면서 유랑민을 연구한 논문 450편을 찾아냈다.

두 사람은 연구팀을 확대한 뒤 진행한 연구에서 유랑민들의 유전자를 수집하는 과정에서 유전자 수집 사실을 알리지 않는 등 동의가 없었으며 일부는 구두로 동의를 받았지만 "그 동의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았던 사람이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예컨대 2015년 유랑민들이 인도에서 기원했음을 밝혀낸 한 논문은 법집행기관이 범죄수사과정에서 수집해 공개한 데이터베이스에 올라있는 유랑민들의 DNA를 평가해 작성했는데 이들이 자신의 유전자정보 활용에 동의했을리가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활용한 불가리아 데이터베이스에 올라 있는 범죄자 유전정보는 전체 자료의 52.7%를 유랑민으로 분류하고 있지만 불가리아의 경우 유랑민의 인구 비율은 4.9%밖에 되지 않는다. 이처럼 편향된 데이터베이스를 활용하는 경우 유랑민들을 범죄집단시하는 편견을 유발한다고 일부 학자들이 주장하고 있다.

영국 노섬브리아대학교 사회학 및 윤리학 마티아스 윈로스교수는 유랑민처럼 소외된 집단들은 개인적, 제도적, 문화적 편견 때문에 갈수록 더 경찰의 감시 대상이 되도록 만든다고 말했다.

유전학자들은 유랑민들이 수백년 동안 유전적으로 고립돼 있었다는 가정 아래 이들의 DNA를 연구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들의 조상이 유전적으로 다른 종족과 뒤섞여 있다는 사실을 무시한다는 점에서 이같은 가정은 편견이라고 과학자들은 지적했다.


◎공감언론 뉴시스 [email protec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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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등록 2021/11/18 11:08:51 최초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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