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대번호 이동 신청하면 '안정화' 이유로 전산 중단
판매점 "매일 제재해 개통 가능 시간대 거의 없어"
이통사 "고객 내주지 않으려는 고의 지연 불가능"
KT '고의 개통 지연' 이후에도 소비자 불만 사례 지속
방통위 "정당한 사유 없이 개통 지연된다면 제재"
[서울=뉴시스] 안호균 기자 = # 직장인 A씨는 최근 휴대전화 번호이동을 하기 위해 몇시간 동안 기다린 끝에 허탕을 치는 어처구니 없는 일을 겪었다. A씨는 휴일을 맞아 경북의 한 휴대전화 판매점에서 SK텔레콤→KT로 번호이동과 기기변경을 신청했다. 하지만 판매점 직원은 1시간 50여분이나 지나서야 "통신사가 '안정화'를 걸었다"며 번호 이동이 어렵다고 안내했다. A씨는 휴대전화 판매점에서 2시간여를 기다린 끝에 낭패를 당하자 하루하루가 바쁜 소비자들의 권리를 지나치게 침해하는 조치라는 생각이 들었다. 화가 난 A씨는 미안함에 어쩔 줄을 모르는 직원으로부터 '지난해 12월경부터 안정화라는 명목으로 갑자기 전산처리가 중단돼 하루 근무 10여 시간 동안 4~5시간을 허비하고 있어 어려움이 크다'는 하소연을 들었다.
5G요금제 출시 이후 이처럼 통신사 간 번호 이동이 지연되는 사례가 끊이지 않고 있다. 과열 경쟁을 방지하기 위한 목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이른바 '(시장)안정화' 조치가 판매 현장에서 소비자 불편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4일 업계에 따르면 이동통신사들은 유통 시장에서 번호이동이 급증하는 등 과열 조짐이 보이면 판매장려금을 낮추는 방식으로 개통 제한을 유도하고 있다. 이통사가 안정화 조치를 시행할 때는 판매직원의 휴대전화 문자메시지를 통해 '5G 일반 모델- 3만원'과 같은 내용의 판매장려금 축소 공지를 보내는 것으로 확인됐다.
5G 요금제 출시 이후 통신 시장이 과열되자 방송통신위원회와 업계는 시장 안정화 조치를 마련했다. '불법 보조금' 지급 등을 통한 과도한 경쟁을 막아보자는 취지였다.
하지만 휴대전화 판매점들은 이같은 '안정화' 조치가 지나치게 빈번하고 함부로 시행되고 있어 소비자들의 선택권을 제한하고 있다고 비판한다.
판매점을 운영하는 B씨는 "제재를 거는 일은 매일 있다. 아침에는 개통 자체를 하지 못하고 가능한 시간대는 오후 2~4시로 정해져 있다고 보면 된다"며 "마진을 잘라버리니까 장사를 하는 입장에서는 남는 것이 없어 판매를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이통사들은 이같은 안정화 조치는 시장 과열을 막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입장이다.
SKT 관계자는 "시장 안정화 정책은 하지 않을 수 없다"며 "리베이트가 너무 과열돼 있으면 판매 장려금의 수준을 낮춰야 시장이 과열되는 것을 막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판매점들은 이통사들이 경쟁사에 고객을 내주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개통을 지연하는 것이 아닌지도 의심하고 있다. 번호이동을 위해 개통 요청을 하면 전산 오류를 이유로 지연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는 것이다. 반면 대리점에서는 이 같은 일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에 대해 이통사들은 번호이동이 한꺼번에 몰리면 전산 장애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해명한다. 또 특정 판매점에서 불법 영업으로 의심되는 거래가 발생하는 경우 한국통신사업자연합회(KTOA) 차원에서 전산 사용을 일시적으로 중단하는 조치를 취하는 일도 있다고 한다.
이동사들이 고의 개통 지연에 대한 의심을 받게된 것은 최근 유사한 사례가 방통위에 적발된 적이 있기 때문이다.
방통위는 지난 4월 삼성전자 갤럭시노트20 사전구매자 1만9465명의 개통을 고의로 지연한 KT에 1억6499만원의 과징금을 부과했다.
KT는 갤럭시노트20의 사전판매 기간인 지난해 8월7일부터 13일까지 7만2840여명의 가입자를 유치했는데, 1만9465명에 대해서는 정당한 사유없이 1~6일 가량 개통을 지연한 것으로 조사됐다.
개통 지연은 불법보조금 지급 의혹 등에 대한 부담으로 방통위의 감시망을 피하기 위해 개통 시기를 분산하려는 의도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동안 KT측은 과도한 보조금 지급이 대리점 차원의 위반 행위라는 입장을 취해 왔지만, 당시 개통 지연을 겪은 가입자 중 4491명은 KT 본사의 일방적인 영업정책 지시로 인해 피해를 입은 것으로 조사됐다. 이 사례는 KT가 자사로 넘어온 고객의 개통을 지연시키는 방식이었다.
이통사들은 시장 점유율을 유지하기 위해 타사로 넘어가는 고객의 개통을 의도적으로 지연할 수는 없다는 입장이다.
SKT 관계자는 "번호이동 신청이 들어왔을 때 그것을 전산으로 막아서 고객을 내주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없다"며 "애초에 시스템으로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KT 관계자도 "회사 차원에서 유통망에 개통지연 지시를 안 한다"며 "이 문제가 사회 이슈가 돼 모니터링을 강화하고 있으며 회사의 지침이 아닌데도 개통 지연을 하는 곳이 확인되면 강력한 페널티를 부과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방송통신위원회는 번호이동을 신청한 소비자의 개통이 정당한 이유 없이 지연된다면 제재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방통위 관계자는 "전산상 문제 등 불가피한 사유가 아니면 신청을 하면 바로 개통을 시켜주는게 맞다"며 "하루 이내라면 통상적인 가입 절차라고 보기 때문에 위법성이 있는지는 살펴봐야할 것 같다"고 말했다.
다만, 이 관계자는 "판매점에서 '하루 이틀 기다리면 장려금이 많이 내려오니 이 때를 기다려달라'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불법보조금 지금을 전제로 서로 합의해 개통을 지연하는 경우에는 보호해줄 방법은 없다"고 덧붙였다.
유통업자들은 개통 지연으로 인한 소비자 불편 등 잇따른 갈등의 근본적인 이유가 보조금 차등 지급을 금지하는 '이동통신단말장치 유통구조 개선에 관한 법률(단통법)'에 있다며 불만을 내놓고 있다. 지원금 경쟁을 차단하는 정부 정책으로 인해 규제와 검열이 지나치게 강해지고 소비자들의 혜택은 줄어들고 있다는 지적이다.
B씨는 "시장경제 체제에서 서로 단가로 경쟁해 고객을 유치하는 것이 맞는 것이고, 소비자 입장에서는 더 싸게 좋은 제품을 구매하고 싶은 것이 당연한데 그것을 억제하고 지연시키기 위해 안정화라는 명분으로 막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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