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학교 출범과정서 ‘국대안 반대운동’으로 혼란
1946년 9월 북한 첫 종합대학 ‘북조선김일성대학’ 개교
월북한 일부 학자들 북한학계서 중추 역할
해방정국 3년의 역사적 경험은 오늘날 한반도가 당면한 문제를 풀어나가는데 중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 과거의 실패를 성찰해야 현재의 과제를 파악할 수 있고, 미래를 내다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문제의식으로 광복 75주년을 맞아 새롭게 발굴된 사진과 문서를 중심으로 해방 직후 격동의 3년간을 매주 재조명해 본다. [편집자 주]
18. 국립서울대학교와 북조선김일성대학 개교
때로는 한 장의 빛바랜 사진이 당시의 시대상을 잘 보여준다. 1946년 7월 3일 경성대학 이공학부(理工學部) 제1회 졸업식 사진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SCIENCE AND ENGINEERING’이라고 적은 건물 앞에서 찍은 졸업식 사진 속에는 총 69명의 인사가 모여 정면의 카메라를 응시하고 있다. 앞의 두 줄은 주한 미군 고위관계자와 교수진이고, 뒤의 두 줄은 졸업생들이다. 후에 남과 북을 대표하는 과학자로 활동한 이태규(李泰圭, 이공학부장), 이승기(李升基) 교수와 해리 안스테드당시 총장, 하지 주한미군사령관 등 낯익은 얼굴도 보인다.
이 사진에는 일제강점기, 해방 직후 정치갈등과 분단의 아픔이 숨어 있다. 경성대학은 해방된 지 두 달이 지난 1945년 10월 16일 경성제국대학이 이름을 바꾼 학교다. 총장은 미국인 알프레드 크로프츠(Alfred Crofts)였고, 일본인 교수가 파면된 자리에는 백낙준(白樂濬, 법문학부장), 윤일선(尹日善, 의학부장), 최규남(崔奎南, 이공학부장), 현상윤(玄相允, 예과 부장) 등의 조선인 교수가 충원됐다.
해방된 지 1년여 만에 졸업식이 열린 것은 이날의 졸업생들 대다수가 일제가 세운 경성제국대학(京城帝國大學) 입학생이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경성제국대학으로 따지면 제4회 졸업생인 셈이었다. 졸업생 중에는 줄곧 경성대학에서 공부를 한 학생들이 대다수였지만, 해방을 맞아 일본 등지의 학교에 다니다 돌아와 편입한 학생도 있었다.
이들이 입학한 경성제국대학은 조선민립대학 설립 운동이 본격화된 1920년대 중반, 일제가 조선인의 독자적인 고등교육기관 설립을 봉쇄하고 식민지를 안정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한 대학이었다. 한반도에 상주한 일본인 자제들을 교육하고자 하는 목적도 깔려 있었다. 1926년 당시 조선인 학생은 전체 150명 중 47명에 불과했다.
조선 유일의 4년제 대학인 경성제국대학에 이공학부가 개설된 것은 일제 말기인 1941년이었다. 태평양전쟁 발발 시점과 맞물려 이공계 학생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한 일제의 사정과 무관치 않았다.
당시 일제는 ‘전시 비상체제’로 돌입하며 문과의 정원을 축소하고 이공계의 정원을 늘렸다. 1회에서 3회까지 40여 명의 졸업생 중 조선인 학생은 20% 정도였고, 조선인 교수도 없었다.
특히 4회 졸업생들은 입학한 뒤 1년 반 정도 다니다 대부분 전시 동원이 되어 각 지역으로 흩어졌다가 해방된 후에 학교로 복귀했다.
3학년 때 해방을 맞은 이들은 졸업논문을 쓰거나 실험을 할 만큼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해방 후 미군이 경성대학에 주둔하게 되면서, 법문학부와 의학부 교사를 미군 숙소로, 이공학부를 야전병원으로, 도서관을 미군 사령부로 전용했기 때문이었다.
경성대학은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사로 이전하여 대학행정과 수업을 진행했지만, 학생들은 제대로 된 수업을 받지 못한 채 각자 알아서 공부하거나 생활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졸업식 연락을 받고 급히 모여 졸업식 사진을 찍었다. 일제 말기부터 미군정까지의 혼란스러운 당시 교육계 상황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경성대학 제1회 졸업식이 끝나고, 그로부터 열흘 뒤인 1946년 7월 13일 경성대학을 중심으로 각 전문학교를 통합해 하나의 국립대학으로 재편하는 ‘국립 서울대 설립에 관한 법령’(국대안)이 발표되면서 학생들은 또 한 번의 격랑을 겪는다.
국대안은 발표 직후부터 교수와 학생들의 거센 저항에 부딪힌다. 경성대학 측에서는 타 학교 학생들을 받아들이는 것을 자기들의 격을 저하하는 일이라고 주장했고, 타 대학 측에서도 마찬가지로 오랜 역사를 가진 학교를 없앨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국인 교수들은 경성대학, 경성의학전문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등이 각각 하나의 엘리트 대학으로 승격하여 각자의 학풍과 전통을 이어 나가기를 기대했다.
1946년 9월 통합 대상 학교 학생들이 등록을 거부하고 제1차 동맹 휴학에 들어가면서 국대안 반대 운동은 본격화됐다. 이들의 주요 요구는 친일 교수 배격, 경찰의 학원 간섭 정지, 집회 허가제 폐지, 국립대 행정권 일체를 조선인에게 이양할 것, 미국인 총장을 한국인으로 대체할 것 등이었다. 여기에 좌우 이념대결까지 겹쳐지면서 국대안 반대 운동은 1947년 2월 전국으로 확산하여 당시 동맹 휴학한 대학이 57개, 동맹 휴학한 학생은 약 4만 명에 달했다.
결국 1946년 10월 15일 국립서울대학교는 성대한 개교행사도 없이 문을 열었지만 격렬한 국대안 반대 운동에 부딪혀, 미군정이 대학 이사와 총장을 한국인으로 교체하고 제적 학생들의 무조건 복교 허용이 이뤄진 뒤에야 어느 정도 정상화되었다.
국대안 반대 운동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교수 380여 명이 해직 또는 퇴직하고, 학생 5000여 명이 퇴학당했다. 이들 중 이태규 교수 등 일부는 해외 유학을 떠났고, 일부는 국대안 반대운동 시기에 북으로 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들 중 일부는 북한에 새로 만들어진 대학에 교수진으로 초청을 받아서, 일부는 일제 말 전시동원 때 북쪽 공장에 종사한 경험을 살리기 위해서, 일부는 북한의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월북했다. 지속해서 북한의 초빙을 받았지만 거절한 이승기 교수도 6·25전쟁 발발 직후 일부 제자들과 함께 북으로 떠났다.
그렇게 경성대 이공학부 1회 졸업식 사진 속 교수와 졸업생 중 절반이 남한에 뿌리를 내리지 못했고, 월북을 선택한 이들은 이산의 아픔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45년이 흐른 1991년 중국 옌지(延吉)에서 열린 ‘한민족과학자대회’에 몇 명의 이공학부 1회 졸업생이 남(장세헌 서울대 교수)과 북(김성희 함흥화학공업대학 교수)의 발표자로 해후했다는 후일담이 전해진다.
1972년 이후락 전 중앙정보부 부장이 7·4 남북공동선언을 논의하기 위해 평양을 방문했을 때 이승기 박사가 “이태규 박사는 잘 계시냐”라고 안부를 물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박정희 정부가 미국 유타대학에 있던 이 교수를 새로 설립한 한국과학기술원 교수로 초청했다고 한다.
한편 북한에서도 1946년 10월 최초의 종합대학이 창립됐다. 해방됐을 때 38선 이북지역에는 단 하나의 대학도, 대학을 운영한 경험자도 없었다. 인재양성과 학문 발전을 위한 대학 창립을 위해서는 새로 학교 건물을 짓고, 교수진을 초빙해야 할 상황이었다. 종합대학을 설립하는데 남쪽에서는 여러 대학과 전문학교를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문제였다면 북쪽에서는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야 하는 열악한 조건이 걸림돌이었다.
북한에서는 1945년 11월부터 종합대학 설립 논의가 시작됐다. 11월 1일 평양공업전문학교가 다시 문을 열었고, 이날 자연과학과 사회과학 등 모든 분야의 인재 양성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이른 시일 안에 종합대학을 창설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형성됐다.
이틀 후 김일성은 평양시 공설운동장(오늘의 김일성경기장)에서 진행된 광주학생사건 16주년기념 평양시학생청년군중대회에 참석해 종합대학 창설을 공식화했다.
이후 곧바로 ‘평양대학건설기성회’(위원장 최용건)가 출범됐고, 그로부터 6개월이 지난 1946년 5월 ‘북조선종합대학창립준비위원회’가 발족했으며, 4개월 후인 9월 15일 ‘북조선김일성대학’이 개교됐다(공식 창립일은 10월 1일). 1년도 채 안 된 기간에 속전속결로 종합대학 설립을 끝낸 셈이다.
당시 북조선김일성대학은 7개 학부, 24개 학급, 68명의 교수진, 1500명의 입학생으로 출범했다. 이를 위해 평양의학전문학교와 평양공업전문학교를 대학으로 승격시켜 편입했고, 흥국공업학교·창생상업학교·평양사범학교 등의 건물을 인수해 교사(校舍)로 이용했다.
첫 입학생은 이틀간 시험을 시행해 선발했는데, 문과는 국어와 인민·역사(국사, 세계사)·수학(대수)·외국어(영어 또는 러시아어) 시험을, 이과는 국어와 인민·수학(대수)·화학·물리 시험을 봤다. 지망학과는 제2지망까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특별히 설치된 예과는 초등학교 졸업 또는 중등이상의 학력을 가진 자(만 16~35세) 중에서 행정기관, 정당, 사회단체의 추천으로 입학생을 선발했다.
가장 큰 난제였던 교수진 구성은 우선 평양공업전문학교와 평양의학전문학교 교원들을 충원하고, 일부는 ‘국대안 파동’으로 해직되거나 퇴직한 남쪽 대학의 교수들을 초빙해 해결했다. 북한은 평양을 방문한 경성대학 법문학부 백남운(白南雲) 교수에게 남쪽 교수 초빙을 부탁했고,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출신 경제학자 김광진(金光鎭), 물리학자 안천수 등을 서울에 파견했다.
그 결과 도상록(都相祿), 박시형(朴時亨), 김석형(金錫亨), 계응상(桂應祥)을 비롯한 20여 명의 학자들이 6월 말부터 8월 중순까지 평양에 도착했다. 교수진의 1/3 정도를 남쪽 초빙 교수로 채운 것이다.
이들은 1950-60년대 북한의 역사학, 물리학, 경제학, 화학 등 인문학과 자연과학의 토대를 마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된다.
북한 교수진 확충과 인재 양성을 위해 대학 개교 직후인 9월 18일 1차로 299명의 학생을 선발해 소련(러시아)의 모스크바종합대학, 레닌그라드종합대학, 우랄종합공과대학 등에 유학생으로 파견했고, 1년 뒤인 1947년 8월 24일 2차로 105명의 대학생과 15명의 연구생(대학교수, 중등교원, 고급기술자) 역시 소련에 파견했다.
‘북조선김일성대학’은 1947년 9월 개교 1년 만에 39개 학과, 93개 학급(예비과 포함)으로 늘어났고, 교수진도 165명(강사 포함)으로 두 배 이상 확충됐다. 그리고 1947년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이 있는 용남산 자락에 새 교사 건설착공식을 갖고, 다음 해 완공했다.
분단과 함께 서울대학교와 김일성종합대학의 학문적 경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