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독일, 의료물품 수출 금지…"도움 기대말라" 메시지
세르비아 "우리 도와줄 곳은 중국 뿐"…EU에 실망감
[서울=뉴시스] 양소리 기자 = '하나의 유럽'을 주장하며 통합과 연대를 내세워온 유럽연합(EU)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빗장을 걸어 잠갔다. 이탈리아, 프랑스, 독일 등 EU 주요국가가 자국의 국경을 닫은 데 이어 이번에는 EU가 유럽의 국경을 폐쇄하겠다고 발표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사태를 팬데믹(pandemic·세계적 대유행)으로 선언한 지 일주일 만에 벌어진 일이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샤를 미셸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17일(현지시간) 기자회견을 통해 27개 회원국 정상들이 30일 간 EU 외부 국경을 즉시 폐쇄하기로 합의했다고 밝혔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회원국들이 많은 지지를 보냈다. 이제 실행은 그들에게 달렸다. 회원국들은 즉각적으로 이행하겠다고 했다"고 말했다고 AP가 전했다. 이번 합의에 따라 외국인은 앞으로 30일 동안 관광 또는 비필수적 사업을 이유로 유럽을 방문할 수 없다. EU 회원국 장기 거주민, 외교관, 회원국 국민의 직계가족, 의료와 교통 인력 등은 예외 대상이다.
◇솅겐조약 35년…국경 폐쇄, '대참사'될 수도
EU는 1985년 체결한 솅겐조약을 통해 열린 국경을 유지해왔다. 지난 35년 간 이어진 사람과 상품의 자유로운 이동은 그야말로 유럽을 하나의 생활권으로 만들었다. 역내 국경이 사라진 유럽 각국에서 자급자족의 개념도 사라졌다. 한 나라가 생활에 필요한 모든 물건을 제조할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내부 봉쇄는 순식간에 대참사로 이어질 수 있다. 워싱턴포스트(WP)는 EU 회원국의 국경 봉쇄는 미 대륙의 50개 주(州)가 국경을 세운 것과 같은 파괴력이 발휘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이미 곳곳에서 혼란은 불거지고 있다.
17일 폴란드 국경지역에서는 화물차가 약 40㎞까지 늘어선 풍경이 연출됐다. 독일에서 들어오는 모든 운전자의 체온 등 건강상태를 확인하고 화물과 관련된 서류를 확인하는 작업을 거치면서다.
EU 회원국과 비회원국의 유일한 통로인 폴란드가 국경을 닫자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도 비상이 걸렸다. 이들 국가는 EU 회원국에서 귀국하는 시민을 데려오기 위해 항공기과 여객선을 동원한 구조작전을 펼쳐야 했다. 상품 이동의 제재도 피해가 만만치 않다. 라트비아 외무장관은 "정말 비참한 상태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 역시 전 세계 국가와 같이 경제난을 겪고 있다. 상품의 흐름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국경 폐쇄로 인한 참사를 막기 위해 EU도 안간힘을 쓰고 있다. 폰데어라이엔 위원장은 "EU 국민들이 유럽 내에서 발이 묶였다"며 "우리는 국가간 물자 수송, 특히 의약품의 수송을 이어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EU 지도부는 긴급한 물품을 수송하는 화물 차량의 빠른 통과를 위해 특별 차선을 만드는 데 합의했다고 설명했다.
◇위기의 순간에 무너진 EU 연대
그러나 이미 EU의 연대는 무너졌다는 평가다. 코로나19의 유럽 확산이 본격화된 지난주 프랑스와 독일, 체코 등은 자국에서 생산된 마스크 등 보호용품과 의료기기의 수출을 제한했다. 심지어 코로나19의 피해가 재난 수준에 달한 이탈리아로도 상품을 팔 수 없게 했다. EU 정상들의 요청으로 수출제한 수준은 완화됐으나 이들이 전한 메시지는 분명했다.
바로 '위기의 순간, 이웃에게 도움을 기대하지 말라'는 것이다.
스테파노 스테파니니 전 나토 이탈리아 대사는 "이번 사태는 EU의 실존적 가치에 대한 위협이다"고 설명했다. 그는 "만약 EU가 이같은 위협에 충분히 대응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EU가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놓고 의문을 품게 된다"고 말했다.
코로나19의 위기에 빠진 이탈리아를 구한 건 EU가 아닌 중국이었단 점도 아이러니다. 지난 15일 중국은 이탈리아 내 환자 치료와 방역 활동을 지원하기 위해 인공호흡 장비 150개와 마스크 500만개를 보냈다. 중국은 이탈리아에 9명으로 구성된 코로나19 전문 의료팀을 보내기도 했다. 유럽에서 벌어진 중국 혐오 분위기에도 먼저 손을 내밀고 국제적인 지원에 나선 것이다.
EU 가입을 추진 중인 세르비아는 EU 회원국의 의료물품 수출제한 조치에 격노를 표한 국가 중 하나다.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국제적 연대란 존재하지 않는다"며 "우리를 도울 수 있는 나라는 중국 뿐이다"고 실망감을 표했다.
◇높아진 극우 목소리…EU 통합 시험대 올라
2015년 난민 사태 이후 유럽에서는 '국경을 강화해야 한다'는 극우 정치인들의 주장이 계속돼 왔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코로나19 사태로 이들의 주장은 더욱 강력해질 것이고 더 많은 주류 정치인들을 설득하게 될 수도 있다고 전했다.
민족주의를 추구하는 스웨덴의 스웨덴민주당의 한 의원은 "코로나19 사태는 대규모 이민 문제, 그리고 국경의 중요성과 관련이 있다"며 물타기를 시작했다. 그는 "우린 심각한 상황이다. 스웨덴과 같은 유럽 국가들이 세계적인 전염병에서 국민을 보호할 능력을 되찾아야 한다"고 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10년 전의 금융위기, 5년 전의 난민 위기에 이어 코로나19의 확산이 EU의 연대를 시험대에 올렸다"는 분석도 내놨다.
코로나19로 생성된 EU 회원국 사이의 심리적 국경이 다시는 허물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정치적으로 확실한 종결을 맺을 수 2015년 난민 사태와 달리 바이러스의 확산은 종식 시점을 명확하게 선언할 수 없기 때문이다.
라트비아 외무장관은 "대체 언제쯤 우리는 현재의 제재와 금지 조치를 해제할 준비가 됐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만약 학교와 공공기관 등 우리가 폐쇄한 시설들을 다시 열고, 우리가 완전히 제거하지 못한 전염병이 다시 발발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WP에 되물었다.
그는 "국경 폐쇄가 코로나19의 확산을 막겠다는 EU의 목표에 기여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이제는 이 사태를 언제까지 지속해야 할 것인가를 논의할 때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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