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성 남쪽 왕릉 전쟁·개발로 많이 훼손
왕과 비는 화장하지 않고 목관에 매장
학문 뛰어나 文宗, 어진 임금이라 仁宗
북한 개성지역에 흩어져 있는 60여 기의 고려왕릉은 오랜 세월 역사의 풍파에 시달리며 능주를 확인할 수 있는 시책(諡冊)이 대부분 분실됐다.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며 대대적 발굴·정비에 나섰지만 18기의 능주만 확인했을 뿐이다. 남북을 아우른 500년 왕조의 유적이 처참하게 쇠락한 것이다. 이 왕릉들의 현재 모습을 살펴보는 것은 남북의 역사를 잇는 하나의 작은 발걸음이 될 수 있을 것이다. 뉴시스는 분단 75주년을 맞아 머니투데이 미디어 산하 평화경제연구소가 단독입수한 500여 점의 개성지역 고려왕릉 사진을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장의 글과 함께 매주 연재한다. [편집자 주]
[서울=뉴시스] 고려는 태조 왕건부터 왕권 강화로 고려의 기틀을 마련한 4대 광종(光宗)까지 초기 4대왕 중 태조는 서쪽에, 혜종은 동쪽에, 정종은 남쪽에, 광종은 북쪽에 분산해 안장했다. 이것은 우연이 아니라 의도적인 배치라고 판단된다. 사방에 초기 왕릉을 각각 배치해 그들을 신격화하는 동시에 도성을 보호하려는 풍수적 관념이 적용된 것이다.
고려시대는 불교가 융성하고, 국가 운영에서 유교가 본격 수용된 시기지만 풍수지리설 또한 크게 유행했다. 풍수지리설이란 땅속에 흐르는 기운이 사람의 길흉화복(吉凶禍福)에 영향을 준다는 이론으로 산천의 형세를 살펴 도읍이나 사찰, 주거, 분묘 등의 위치를 정할 때 많이 활용됐다. 풍수지리로 보면 개경은 힘찬 기상이 솟아나는 송악산을 진산(鎭山)으로, 자남산을 좌청룡(左靑龍)으로, 오공산(지네산)을 우백호(右白虎)로, 남쪽의 용수산을 사신사(四神砂)로 한 장풍국(藏風局, 주변을 둘러쌓은 산세)의 도읍지다. 개경은 송악산이 진산이기 때문에 송도(松都)라고도 불렸다.
고려 수도 개경(개성)은 당대 시대이념인인 유교, 불교적 이념과 풍수지리를 적절히 활용해 새로운 왕조 건설의 정당성을 확보하고자 조성된 계획도시였다. 고려는 진산인 송악산(490m) 남쪽에 궁궐(황궁)을 짓고, 그 주변으로 황성과 내성을 쌓았으며, 외곽에 서쪽의 오공산(지네산, 203m)과 남쪽의 용수산(178m), 동쪽의 부흥산(156m)을 잇는 능선을 이용해 외성을 쌓았다.
고려 중기 문인 이규보(李奎報)는 “아 대단하구나. 도성안의 수 만 채 집들은 잉잉거리는 벌떼들이 모인 것 같고 큰길 내왕하는 수 천여 사람들은 개미떼 굼질거리는 것 같구나”라며 도성 안 사람들을 묘사했다.
고려 중기 문인 이규보(李奎報)는 “아 대단하구나. 도성안의 수 만 채 집들은 잉잉거리는 벌떼들이 모인 것 같고 큰길 내왕하는 수 천여 사람들은 개미떼 굼질거리는 것 같구나”라며 도성 안 사람들을 묘사했다.
-도성 외곽 서쪽에 태조 현릉 조성
고려 왕릉은 궁궐(만월대)을 기준으로 도성 밖 동서남북에 고르게 분포된 것으로 확인된다. 조선 왕릉도 대부분 도읍지였던 한양 외곽에 터를 잡았는데, 왕릉을 도읍지의 4대문 10리(당시 10리는 4km가 아니고 5.2km) 밖 80리 안에 위치해야 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이러한 거리 설정은 궁궐에서 출발한 임금의 참배 행렬이 하루에 도착할 수 있는 거리를 기준으로 삼은 것이다. 왕릉의 배치로 봤을 때 고려 때도 왕릉을 잡는 기준이 세워져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고려 왕릉은 도성 서쪽에 가장 많이 분포하고 있고, 현재 남아 있는 왕릉들의 보존 상태도 가장 좋은 편이다. 도성 서쪽에 가장 숭배대상이던 태조 현릉이 조성되어 있고, 왕족들의 생활근거지인 궁성과 가장 가깝기 때문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만수산과 봉명산 등에서 뻗어 내린 얕은 야산과 구릉이 풍수적 조건을 잘 갖추고 있고, 불교의 서방 정토사상과도 방향성이 맞아 떨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소릉 등 송악산 북쪽 응봉(鷹峯, 매봉) 자락에 위치한 왕릉들도 상대적으로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반면 최근 촬영된 사진을 보면 고려 도성 남쪽 용수산과 진봉산의 낮은 구릉에 자리 잡은 왕릉들은 자연재해, 전란(戰亂), 개발 등으로 훼손이 많이 된 것으로 나타났다. 도성의 동남쪽에 자리 잡은 왕릉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고려는 왕릉 터를 잡을 때 풍수지리를 철저히 고려했다. 우선 고려의 왕릉은 산 중턱 경사면에 터를 잡았고, 능 좌우로 산줄기가 감싸고 그 사이에 천(川)이 흘러가는 지형을 선호했다. 그리고 터의 앞쪽에는 조산이 솟아 있는 곳으로 정했다. 이러한 여건을 충족시키지 못하는 곳에는 인공적으로 곡장(曲墻, 무덤 뒤의 주위로 쌓은 나지막한 담)을 세워 주산의 기능을 대신하게 하거나, 바람을 갈무리하게 하여 풍수적 여건을 충족시키고자 했다. 평지 또는 낮은 구릉에 자리하는 통일신라시대 왕릉과 능선 끝자락에 조성된 조선 왕릉과 다른 점이다.
능역은 남북 길이 30∼40m, 동서너비 20∼25m 내외로 조성됐고 산의 경사면을 따라 3~4단의 계단식으로 조성되었다. 계단식 구조는 산지의 지형 훼손을 최소화 하면서 능의 위엄을 높일 수 있었다.
-조선 왕릉과 비슷한 구조
왕이 죽으면 종묘를 신주에 모시는 과정에서 왕의 업적을 한 글자로 표현하고, ‘조(祖)’와 ‘종(宗)을 붙이고 묘호(廟號)라 했다. 예를 들어 학문에 뛰어났다는 뜻의 문종(文宗), 어질었다는 뜻의 인종(仁宗) 등이다.
원칙적으로 ‘조’는 창업한 왕에 대해서만 쓰는 호칭이었다. 즉 “왕업(王業)을 창시한 임금을 ‘조’라 일컫고 계통(系統)을 이은 왕을 ‘종’이라” 했다. 고려의 경우 첫 왕인 태조 왕건을 제외하고는 모두 종의 호칭이 부여되었다. 몽골 간섭 시기에는 왕의 호칭이 강등되어 ‘충’(忠)을 앞에 붙이고, ‘종’ 대신에 제후국을 상징하는 ‘왕’의 호칭을 사용했다.
고려시대 왕과 비는 화장하지 않고 시신을 목관에 넣어 매장하는 게 원칙이었다. 단 왕위쟁탈전에서 패해 살해당한 뒤 화장된 목종(997~1009)만이 유일한 예외이다. 장례의식은 일차적으로 국왕의 시신을 묻는 매장의식으로 일단락된다. 조선시대에는 사망 후 5개월 만에 장례를 지냈다. 왕릉터를 잡는 것부터 시작하여, 이후 그곳에서의 제례, 왕릉 형식, 장례 후의 관리까지 자세한 내용이 『국조오례의』 흉례 치장 편에 기록돼 있다. 이러한 절차는 똑같지는 않았겠지만 고려왕조도 기본적으로는 동일했을 것이다. 태조부터 7대 목종(穆宗)까지는 왕과 왕비를 합장했고, 그 뒤부터는 따로 능을 조성했다.
태조 때부터 왕의 무덤은 (반)지하식의 평면 (장)방형 횡구식단실묘(橫口式單室墓 · 무덤방이 1개로 3면의 벽을 먼저 쌓고 나머지 1면으로 드난든 후 밖에서 벽을 쌓아 막는 무덤 양식 )로 조성됐다. 일반적으로 묘실의 동·서·북 3면의 벽석은 모두 수직으로 쌓았고, 벽석 위쪽에 3∼4매의 대형 판석으로 천장을 덮었다. 묘실 내부 바닥 중앙에는 관대(棺臺)를 놓고 그 좌우에 유물 부장대를 마련하였으며 나머지 바닥에는 전이나 박석을 깔았다. 왕릉에는 고급 자기와 도기, 청동제품이 부장된다. 목관의 겉을 장식했던 금동장식이나 못 등도 확인되어 왕릉의 위상을 확인할 수 있다.
조선 성종 8년(1477년)에 개성을 다녀온 후 남긴 유송도록(遊松都錄)에서 유학자 유호인(兪好仁, 1445-1494년)은 “(공민왕릉을) 처음 만들 때에 구슬과 비단, 옥으로 된 상자, 금으로 만든 오리, 은으로 만든 기러기 등 많은 보물로 장식하여서 여산에 있다는 진시황의 무덤과도 비견할 만하였단다”라고 기록했다. 그러나 계속된 도굴로 고려 왕릉의 부장품은 태조 현릉을 제외하고는 온전한 형태로 출토된 것이 거의 없다.
무덤칸의 크기는 능마다 편차가 있지만 대략 남북 3~3.5m, 동서 2.5~3m이며 높이 2m 내외로 사람이 편하게 걸어 다닐 수 있을 정도다.
묘실의 벽면과 천장에는 회칠을 하고 벽화를 그렸는데, 벽면에는 12지신, 사신(四神), 건물, 매화, 소나무, 대나무를 그리고 천장에는 천체도(성좌도)를 그렸다. 이렇게 마련된 묘실에 목관과 유물을 넣은 후 나무문과 1장의 대형판석(문비석)으로 입구를 2중으로 폐쇄했다.
그리고 병풍석과 난간석을 두른 봉분을 쌓고(1단), 그 아래쪽으로 2-3층 단을 쌓아 2단에 장명등(석등)과 문·무인석, 3단에 정자각(제향각)을 배치했다. 현재 정자각은 태조와 공민왕의 무덤에만 복원돼 남아 있고, 다른 왕릉에서는 터만 확인된다.
신라시대의 능에 없던 망주석, 장명등, 정자각 등 새로운 요소들은 조선시대 왕릉으로 계승된다. 전체적으로 고려 왕릉은 우리에게 익숙한 조선 왕릉과 유사한 구조를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 왕릉이 기본적으로 고려 말 공민왕릉을 모태로 삼았기 때문이다.
다만 고려 왕릉은 돌을 쌓아 단을 만들고 돌계단을 만들어 그 상단에 봉분을 조성했지만, 조선 왕릉은 둥그스름한 토단(土斷 · 흙으로 쌓은 단) 상부에 봉분을 조성한 점이 다르다.
정창현 평화경제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