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째 기부나선 전주 '얼굴없는 천사'의 선행…도둑들이 훔쳤다

[전주=뉴시스] 윤난슬 기자 = 전북 전주시 노송동의 '얼굴 없는 천사'가 두고간 성금이 도난된 지 4시간여 만에 회수됐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시민들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속적인 경기 불황 속에서도 20년째 어김없이 찾아와 세밑 한파 속 감동을 전하던 천사의 선행이 물거품이 될뻔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30일 전주 완산경찰서와 노송동 주민센터 등에 따르면 이날 오전 10시 3분께 얼굴 없는 천사로 추정되는 한 남성으로부터 "주민센터 인근에 성금이 담긴 종이박스를 놓아 뒀으니 확인해보라"는 전화가 주민센터로 걸려왔다.

전화를 받은 직원은 곧바로 지하 주차장 입구 등 센터 주변을 샅샅이 찾았으나 성금이 담긴 박스는 찾지 못했다.
 
몇분 뒤 이 남성으로부터 "성금을 찾았느냐"는 전화가 두차례나 걸려와 다시 주변을 살폈지만, 성금을 찾을 수 없었다.

결국 "누군가 박스를 가져간 것 같다"라는 4번째 전화를 받고서 주민센터 직원들은 이날 오전 10시 40분께 "성금이 사라진 것 같다"고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경찰은 목격자 진술과 주변 폐쇄회로(CC)TV 등을 분석해 지난 26일부터 주민센터 주변에 세워져 있던 SUV 차량 1대를 수상히 여기고 추적에 나섰다.

이후 사건 발생 4시간 30여분만인 오후 2시 40분께 A(34)씨와 B(35)씨 등 2명을 대전 유성과 충남 계룡에서 각각 붙잡았다.

이들은 이맘때면 얼굴 없는 천사가 방문한다는 것을 예상하고 수일 전부터 범행 현장 인근에 잠복해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용의자들이 갖고 있던 기부금 6000만원을 회수했다.

경찰 관계자는 "충남에서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차량을 발견하고 용의자 2명을 전주로 압송 중"이라며 "이들을 상대로 범행 경위 및 동기에 대해 조사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한편 '얼굴 없는 천사'는 지난 2000년부터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성탄절 전후로 노송동 주민센터에 전화를 걸어 수천만원이 담긴 종이박스를 몰래 놓고 사라져 붙여진 이름이다.

2000년 4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써 달라'며 58만4000원을 놓고 간 것을 시작으로 그의 소리 없는 기부는 해매다 연말을 기점으로 이뤄졌다.

그는 매년 A4용지 박스에 5만원권 뭉치와 동전 등을 채운 돼지저금통, 메모글을 남겼으며, 두고 간 성금은 그동안 전북도 사회복지공동모금회를 통해 노송동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위해 사용됐다.
 
이날 경찰이 회수한 성금이 주민센터에 전달되면 천사가 올해까지 20년간 놓고 간 돈의 총액은 모두 6억6800여만원에 달한다.
 
전주시는 그의 선행을 기리기 위해 2009년 노송동주민센터 옆에 기념비를 세우고 천사가 오가는 길을 보행자가 안전하게 다닐 수 있는 길로 만들었다.
 
노송동 일대 주민들도 매년 지속하는 천사의 뜻을 널리 기리고 그의 선행을 본받자는 의미에서 숫자 천사(1004)를 본딴 10월 4일을 '천사의 날'로 지정하고 지역의 홀로 사는 노인과 소년소녀가장 등 불우이웃을 돕는 다채로운 나눔과 봉사를 펼쳐오고 있다.

시민 강보은(30)씨는 "남에게 베풀지는 못할망정 성금을 훔쳐갔다는 이야기를 듣고 황당했다"면서 "돈을 찾게 돼 다행이지만 불미스러운 일로 천사의 발걸음이 끊길까 걱정된다"고 우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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