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기념관, 27m 높이 6.25 상징 조형물' 제작 작가
13년만의 변신...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구' 신작전
'건강한 생명체' SF영화 같은 분위기...웅갤러리서 개인전
【서울=뉴시스】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미술관이 아닌 화랑, 갤러리에서 조각전이 뜸해진지 오래다. 조각은 일단 크고 무겁고 거대함으로 인식된다. 그래서 동시대 조각은 공공미술 '거리 미술'로 나가 도시의 풍경을 잠식하고 있다. 미술애호가들이 조각보다 회화를 선호하는 탓도 있다. 화랑가는 '조각전보기를 돌 처럼'하고 있다. 이런 추세속 물길을 거슬러 오르는 연어처럼 현대화랑이 튀어올랐다. 지난 7월 조각가 박상숙의 개인전을 21년만에 열어 주목받았다.
스테인리스 스틸을 풍선처럼 부풀게 만든 대형 조각전이었다. 그 전시는 박상숙 작가보다 조각을 지배했던 브론즈와 대리석의 영광을 이젠 스테인리스 스틸로 넘겨준 시대라는 것을 입증했다.
반짝임과 동시에 반사반사하며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스테인리스 스틸은 동시대 무엇보다 매혹적인 재료다. 동시대 세계미술시장을 접수하고 있는 미국 현대미술가 제프쿤스나 인도 출신 영국 조각가 아니쉬 카푸어의 무기도 스테인리스 스틸이다.
제프 쿤스가 1986년 스테인리스 스틸로 만든 약 1m 높이 '토끼' 조각은 지난 5월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9110만달러(약 1084억원)에 낙찰되어, 현존 작가의 작품가격(k-artprice.newsis.com)으로는 가장 비싼 예술품이 됐다.
쿤스의 작품은 2011년 서울 명동 신세계백화점 옥상에 거대한 '보라색 하트 모양' 사탕 작품 '세이크리드 하트'가 설치되어 있다. 또 아니쉬 카푸어는 미국 록펠러 건물앞에 '하늘 거울'(2006), 시카고 밀레니엄 파크에 있는 '구름 문' (2004)을 설치해, '마법같은 거울 조각'으로 수많은 관광객을 빨아들이고 있다. 그의 작품은 우리나라 최고 미술관 이태원 삼성 리움 미술관 정원에도 세워져 있다. 높이 15m, 73개의 스테인리스 스틸공이 마치 알알이 포도송이가 세워진 것 같은 모습으로 하늘을 찌르는 반짝임을 자랑한다.
이런 유명세탓에 스테인리스 스틸 작품은 모두 제프 쿤스나 아니쉬 카푸어 작품으로 치부되는 현실이다.
그도 전시장에서 늘 이런 소리를 듣는다. "제프쿤스 같다, 아니다. 아니쉬 카푸어 같은데?"
차별화가 생명인 미술계에서 조각가 신한철(61)은 면역력이 강했다. 그 무성한 말들을 스테인리스 스틸 재료처럼 받아들였다.
"그래요. 그 색은 제프쿤스가 많이 쓴 색이죠. 저도 그게 내 작품과 적합하다 생각해서 차용을 했어요."
붉은색과 보라색, 미술 좀 안다고 한다면 바로 '제프 쿤스'가 떠오르는 그 색을 한 '풍선같은 작품'앞에서 그가 환한 웃음을 보이며 말했다.
"옷(색)을 입히면 가볍고 비조각적인 느낌이 있어요. 그렇게 조각의 무거움을 떨쳐버리는게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 모릅니다"
지난해부터 KIAF등 아트페어에 선보여 눈길을 끌어온 '신한철의 증식'이 서울 종로구 자하문로 웅갤러리에서 열리고 있다.
그는 "올해 환갑이다. 70, 80세를 준비하며 이제야 작가로 가는 것에 시동을 걸었다"며 흰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러자 빨간 풍선을 묶은 것 같은 작품이 그를 품어내며 수십명으로 분신시켰다.
"안에는 비어 있어요. 가볍죠"
그가 가느다란 선에 매달린 뭉친 원들을 손가락으로 툭 건들자, 흔들 흔들 움직인다.
뉴턴처럼 중력의 법칙이 적용됐다. "무게중심이 딱 맞았어요. 결국 균형이 잘 맞았다는 것인데 무중력적인 상태를 느끼게 하지 않나요?"
과학과 직관은 가벼움의 미학에 날개를 달았다. 빨강, 초록, 보라색...가는 선 하나에 중심을 잡고 있는 원형 뭉터기들은 발레리나 몸짓처럼 우아함도 발산한다.
동시대 미술은 모방과 차용의 치열한 경쟁이다. 하늘 아래 새로운 것 없다. 무한반복속 새로운 시선, 새로운 발견이 힘이다.
수년간 훈련하다보니 이젠 어떤 형태도 딱 세울 수 있게 됐다는 그는 원래도 '구(sphere, 球)작가'였다.
변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올해로 환갑의 작가가 가벼워진 건 수십년간 무거움의 터널을 지나왔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소과를 졸업할때도 그랬다. "동기들이 조형적으로 풀어낸 조각으로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고 다들 잘나가고 있는데, 나는 여전히 영, 감을 못잡고 헤매었다."
대학때부터 '생명의 에너지'가 화두였다. '이것을 어떻게 구현 할 것인가' 몰입과 번뇌는 구(원형)로 이르렀다. "구를, 동양의 정신성인 음과 양의 합일된 생명체로 보자" 작업이 풀렸다.
그때부터 흙으로 원형을 끊임없이 만들었고, 구는 작업의 모티브가 됐다.
'생명의 에너지'로 풀어낸 구는 1997년 첫 개인전에 선보인 후 작업실에서 빛이 났다. 수십개의 구가 구르던 작업장에 현대화랑 박명자 대표가 방문하면서다. 크고 작은 구들을 발견한 박 대표는 자연스럽게 '관계'가 형성된다며 1999년 개인전을 열었고, 그때부터 '구 작가'가 됐다.
이후 급기야 쟁쟁한 선배 조각가들을 제치고 전쟁기념관 6.25전쟁 상징조형물 제작 작가로 선정됐다. '6.25전쟁 상징 조형물'은 80억 프로젝트로, 그가 3년간 투지를 발휘한 역작이다.
2003년 전쟁기념관 입구 중앙에 자리 잡은 조형물은 '청동검과 생명수 나무'를 제목으로 높이가 27m에 달한다. 그 때에도 '신한철의 구'는 하늘 높이 솟은 청동검의 받침으로 쓰였는데, "유구한 역사와 민족의 번성을 기원하는 정화수를 형상화했다."
40대 초반 온 힘을 6.25 상징 조형물에 다 쓴 그는 '생명의 에너지'의 변신을 추진했다. '구의 현대성'의 자기분석에 돌입했고, 그 이미지를 유지한채 그렇게 크고 작은 구 형태의 증식이 시작됐다.
"'누구 누구 모작같네'라는 말에 개의치 않아요. 구로 만든 작품은 어쩌면 제프쿤스나 아니쉬 카푸어보다 더 먼저 썼지만 제가 노출이 안된거잖아요."
그는 "나는 구를 발명한 작가"라는 자부심이 있다. "2000년대 초반 국내에서 조각품 심의할때 원형으로 된 작품은 다 떨어졌을 정도로 '구=신한철'로 각인 됐었다"며 '구 작가'로서 이젠 '구의 변용'을 선언했다
"구는 하나의 오브제이니까 이제는 누구나 쓸수 있는 것이고, 또한 포스트 모던시대에 차용도 예술입니다. 저는 그동안 6m짜리 구도 만들어봤어요. 이젠 구를 자유롭게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시기에 이르른거죠."
생명의 에너지를 담은 '구의 변신'은 점점 '신한철'로 이름을 알리고 있다.
"내 작품은 증식된 형태의 구의 이미지로 만들어진겁니다. 그래서 형태가 같은게 하나도 없어요."
실제로 크고 작고 그보다 작고, 그보다 좀 더 큰 구들로 '증식'한 작품은 서로 뭉쳐 떨어지지 않고 어우러져 '신비의 조합'을 보인다.
'생명의 에너지'를 화두로 힘, 운동, 성장, 삶의 순환을 호흡하며 40여년간 자기존재를 확인해온 작가는 스테인리스 스틸로 '증식'한 새로운 버전에 "'건강한 생명체' 염원을 담았다"고 했다.
"현재 우리 사회의 부조화가 심하지 않나요? 이념, 경제 갈등...조화를 이루려면 계층간, 가족간, 세대간 이해하고 양보하고, 배려해야합니다. 이 중 뭐가 하나가 없다고 하면 균형이 깨지는 거죠. 같은 형태 없이도 완벽하게 서 있는 내 작품은 조화이고 공존을 보여줍니다. 다름과 다양이 존재하는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다는 것을 조각가로서 말하고 싶었습니다"
공공미술에 취해 갤러리에 들어오지 못한 조각 전시. 그는 15년만에 갤러리에서 여는 전시를 위해 "화이트 큐브 공간에서 어필할 수 있는게 무엇일까"를 고민했다.
조각은 모두 중력의 시녀다. 세워지는 조각, 그는 모더니즘에서 방향을 찾았다. 구의 형태는 바꿀수 없었다. "작가들이 안 건드린게 뭘까?" 그래서 "결국은 뒤집은 겁니다. '세운다'라는 전통을 깨고 중력을 거슬러 매달은 거죠."
전시장 천장에서 탄생한 듯 거꾸로 매달린 구의 '증식은 SF영화에 나오는 '외계 생명체' 같다. 현대적이면서 세련된 분위기로 '시대성을 뛰어넘는 듯한 조화'도 보여준다.
매달렸지만 편안하게 보이는건 그의 '번뇌의 덩어리'가 가벼워진 덕분이다. "알수 없는 과학자처럼 크기와 배치를 면밀히 계산해 나온 작품"이라는 그는 재치있는 시각으로 자신의 조각에 생기를 선사했다.
둥근 오브제에 조화와 공존의 모든 것을 품고 무엇으로도 변태(metamorphosis)하며 반사 반사하는 작품앞에서 그가 속삭이듯 말했다.
"왜 작품을 투명하게 하느냐고 물어보는데, 할 말이 있다"며 화랑주를 슬쩍 바라보며 의외의 말을 전했다.
"사실, 나는 이것을 움직이게 하고 싶었어요. 관객들이 와서 잡아보고 돌려보다 떨어지면 다시 붙이고, 그런 일이 생겼으면 했는데..."
"작품의 본래 형태미만 강조하는 시대는 과거 얘기잖아요. 모두 친절했으면 좋겠다"며 자신의 신작이 작품이 관객들과 좀 더 가깝게 접근하기를 바랐다.
조각의 무거움과 위엄을 떨쳐낸 작가는 '비싼 작품 만지지 마시오'라는 화랑의 무언의 메시지도 떨쳐내고 싶은 마음이다. "만져보세요. 절대 안 떨어져요. 하하하~" (화랑 주인은 깜짝 놀라는 표정이다.) 산뜻하게 변신해 '응시의 진지함'을 다채롭게 반사하는 신한철의 '증식'전은 19일까지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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