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열단100주년]③日경찰서장 처단하고 죽음 택한 박재혁…"뜻 이뤘으니 여한 없다"

기사등록 2019/08/15 06:30:00

【서울=뉴시스】박재혁 의사(1895~1921)의 모습. 2019.08.14. (사진=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박재혁 의사(1895~1921)의 모습. 2019.08.14. (사진=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제공) [email protected]

3·1운동과 임시정부 수립 이후인 1919년 11월10일. 만주의 한 시골 마을에 신흥무관학교 출신 젊은이 13명이 모였다. 이들은 대한의 독립을 위해 항일 무장 투쟁을 벌이기로 뜻을 모아 조선의열단을 결성했다. 뉴시스는 프랑스 레지스탕스 활동에 비견되는 의열단의 창단 100주년을 맞아 '조선의열단 100주년 기념사업 추진위원회' 도움으로 의열단의 대표적 인물들을 매주 소개한다. 독립운동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음에도 잊혀져만 가는 선인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을 광복절을 계기로 재조명해 본다.

【서울=뉴시스】김성진 기자 =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려 한다!"

1920년 9월14일 아침 한 조선인 사내가 당시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를 향해 소리쳤다.

혼비백산한 하시모토는 도망치려 했지만, 결국 사내의 폭탄 파편을 맞고 피투성이가 돼 병원 이송 중 죽음을 맞이했다.

대담하게도 백주에 경찰서 한복판에서 거사를  감행한 사내는 바로 조선의열단의 이름을 처음으로 드높인 부산 출신 박재혁 의사(1895~1921)다.

박 의사는 27년 짧은 생애를 독립운동과 항일투쟁에 바친 '의열지사'이자 '불꽃청년'이었다.

박 의사는 1895년 지금의 부산광역시 동구 범일동에서 1남1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 여동생과 생활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학업에 정진해 1911년 부산진보통학교를 수료하고 1915년 부산공립상업학교를 졸업했다.

어릴 때부터 의협심이 강했던 박 의사는 이미 학생 시절부터 민족의식을 가지고 항일운동에 참여했다.

부산상업학교 재학 시절 최천택·김병태·박홍규 등과 함께 대한제국에서 간행한 '동국 역사'(東國歷史)를 비밀리에 등사(복사)해 배포했다.

1913년에는 최천택·김병태·박홍규·오택 등과 구세단(救世團)을 결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등사판 잡지를 발행해 부산과 경상남도 일대의 학생들에게 배포하고 그들을 규합했다.

그러던 중 일제 경찰에 조직이 발각되고 박 의사는 주도자들과 함께 붙잡혀 심한 고문을 당한 뒤 풀려났다.

박 의사는 1915년 부산상업학교를 졸업한 후에도 지역 청년과 남몰래 만나면서 항일운동의 뜻을 버리지 않았다. 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조선가스전기주식회사에 근무하기도 했다.

1917년 무렵부터는 해외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상하이를 중심으로 중국 각지와 싱가포르 등 동남아 지역을 다니는 한편, 국제정세에 눈을 뜨게 된다.

1920년 4월 상하이에서 의열단장인 약산 김원봉을 만나 그의 열변을 듣고 의열단에 가입한 뒤, 조국의 독립을 위해 한목숨을 바치기로 다짐하게 된다.

비슷한 무렵 의열단이 감행한 진영·밀양 폭탄 사건이 실패로 끝났고 곽재기·윤치형·윤세주·이성우 등이 대대적으로 검거됐다.

의열단은 1920년 4~5월 두 차례 걸쳐 안둥현의 한국 독립운동 비밀 아지트였던 이륭양행을 통해 폭탄 13개, 권총 2정 등을 보냈지만 그만 일경에게 탐지된 것이다. 하지만 이 시도만으로도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이후 의열단이 계획한 거사가 바로 진영·밀양 폭탄 사건에서 의열단 탄압에 가장 앞장선 하시모토 부산경찰서장에 대한 응징이었다.

의열단장 김원봉은 이 일에 부산 출신이자 무역업을 했던 박 의사가 적임이라고 여겼고, "지금 곧 부산으로 가서 부산경찰서장을 죽이고 오라"고 말했다. 박 의사는 흔쾌히 행동에 나설 것을 결심했다.

박 의사는 김원봉에게 폭탄 1개, 군자금 300원, 여비 50원을 받고, 일본 나가사키에서 대마도를 거쳐 부산으로 귀국했다.

이 과정에서 상하이의 동지들에게는 이를 알리기 위해 보낸 엽서에 상업 현황, 장삿길, 수익과 같은 용어를 써서 상업 활동을 보고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등 기지를 발휘했다.

박 의사는 부산에 도착하자마자 최천택, 오택 등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거사를 준비했다.

거사 준비 과정에서 부산경찰서장 하시모토가 고서적을 좋아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무역업을 하던 경험을 살려 중국 고서적 상인으로 위장했다.

1920년 9월14일 아침, 고서적 상인으로 위장하고 부산경찰서로 찾아간 박 의사는 하시모토와의 면담을 신청했다.

고서적을 좋아했던 하시모토는 박 의사를 아무 의심없이 자신의 방으로 불러들였다. 서장실에서 탁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박 의사가 풀어놓은 고서적 보따리에 여념이 없던 하시모토 앞에 잠시 뒤 의열단의 전단(傳單)이 날아들었다.

박 의사는 유창한 일본말로 "나는 상하이에서 온 의열단원이다. 네가 우리 동지를 잡아 우리 계획을 깨뜨린 까닭에 우리는 너를 죽이려 한다"고 말한 뒤 폭탄을 던졌다.

이 폭발로 하시모토가 중상을 입고 병원으로 후송 중 죽었으며, 부산경찰서가 크게 파괴되고 일제 경찰 2명도 중상을 입었다.

박 의사도 폭탄 파편으로 오른쪽 무릎뼈에 중상을 입었으나 끝내 탈출하지 않고 현장에서 체포됐다. 이 사건으로 친구였던 최천택·오택 등이 모두 공범으로 몰려 구속됐다.

박 의사는 부산부립병원에서 응급치료를 받은 뒤 경찰서로 끌려가 혹독한 취조를 받았다. 이후 부산지방법원과 대구복심법원, 경성고등법원을 거쳐 1921년 3월 사형을 최종 선고받았다.

그는 중상을 입은 다리를 이끌고도 재판을 받을 때 당당하게 진술해 일본 검사와 법관들을 놀라게 했다.

박 의사는 대구형무소에 수감돼 혹독한 고문과 폭탄 투척 당시 상처로 고통을 겪으면서도 일제에 항거했다.

그는 일제의 형률에 따르느니 차라리 스스로 죽는 길을 택했다. 박 의사는 면회 온 친구에게 "내 뜻을 모두 이뤘으니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말을 남겼다.

친구의 단식 중단 권유에도 "왜놈 손에 사형당하는 것이 싫다"며 결기를 드러냈다. 박 의사는 오랜 단식으로 몸이 크게 쇠약해졌지만 끝내 일제에 투항하지 않았다.

일제가 내주는 물 한 잔, 밥 한 톨까지 거부하고 항거한 박 의사는 결국 1921년 5월11일 차디찬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했다.

일제 경찰은 박 의사의 장례까지 엄격히 통제해 가족을 제외하고는 친구들마저 참석을 못 하게 했다.

정부는 의사의 공훈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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