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서 대규모 회고전 18일 개막
뇌경색 이후 직접 제작한 신작 2점 최초 공개
"올초 10시간씩 그린 신작 1000만달러 준대도 안팔것..왜?"
1950년대 ‘원형질’~2000년대 ‘후기 묘법’등 총 160여 점
박서보 작품서 영감받은 '특별 메뉴' 계절 국수도 판매
【서울=뉴시스】박현주 미술전문 기자 = "이 그림은 치유와 수신을 동시에 경험하는 거지. 이거는 내가 절대로 팔지 않을거야. 1000만 달러를 준대도 안팔아."
단색화가 거장 박서보 화백(88)은 여전히 자신만만했다. 올해 새롭게 그렸다는 신작 '묘법(描法)No.190227’앞에서 큰 소리 쳤다
"앞으로 이 그림은 내가 시장에 내놓지 않을 거야. 왜? 내가 꼭 어느 놈(?)하고 한번 붙어보고 싶은 생각이야. 그게 가능해졌어"
싸리 빗질한듯한 화면에 회색과 분홍색이 섞여 묘한 색감을 발산하는 작품이다. 조수도 안시키고 직접 10시간씩 제작해 한쪽 다리가 장작개비처럼 마비될 정도로 몰두했다. 뇌경색으로 쓰러지고 몸 반쪽을 움직이기 힘들어진 뒤 "그 기본을 잊고 치유를 목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말했다.(2015년 심근경색으로 3차 수술까지 받았다.)
'한번 붙어보고 싶은' 이는 현재 서울시립미술관에서 떠들썩하게 전시중인 영국 작가 데이비드 호크니(82)를 염두에 둔 말이었다. 호크니는 지난해 미국 뉴욕 크리스티경매에서 '수영장의 두 사람’이 9030만달러(한화 1019억)에 팔려 전 세계 생존작가 작품중 가장 비싼 작가다. 박 화백은 1983년 일본 교토에서 열린 국제 종이회의에 참석, 호크니, 라우센버그와 함께 앉아 세미나를 열기도 했을 정도로 한국 현대미술계의 스타였다.
'1000만 달러를 준대도 안판다'는 박 화백의 자신감은 빈 말이 아니다. 지금은 황당하게 들리지만, 분명 실현 될 가능성도 있다. 10여년전 박 화백이 100만 달러, '밀리언 달러 작가'가 된다"고 했을때도 이런 기분이었다. 그의 말은 실제화됐다. 2017년 5월 홍콩 크리스티 경매에서 '묘법'이 14억7400만원에 팔려 작가 최고가를 기록했다.
작품이 비싸게 팔려야 대접받는 시대, 박서보의 '묘법'은 2012년부터 마법을 부렸다. 국립현대미술관에서 '한국의 단색화'전이 열리면서 기폭제가 됐다. 그동안 미니멀리즘, 모노크롬 추상화로 알려진 그림이 '단색화'로 존재감을 찾으면서 박서보는 더욱 빛이 났다. (비슷해보이는 추상 미술, '미니멀리즘이 우유이면 단색화는 곰탕'이라는 해석도 있다. 불과 7년년전, 서양의 모노크롬과 일본의 모노하와 비슷해 이 두 사조속에 편입된 듯 애매한 모양세였던 단색화는 'Dansaekhwa'로 영문이름까지 정해졌다)
그의 말처럼 "어느날 기가 막힌 시대가 오기 시작했다"
"평소에 영국의 세계적인 화랑에서 전람회를 해봤으면 했는데, 전람회를 해달라고 요청이 온거야. 그런데 그 메일이 스팸에 들어가 모르고 있었어~. 그쪽에서는 무시한줄 알았대. 나중에 조수가 찾아냈는데, 심장이 떨려서 죽겠더라고. 좋아서. 하하하"
진정하고 메일을 보냈다. "관심있습니다." 그랬더니 답장이 왔는데, "관심이 아니라 할거냐 안할거냐."하더라고. "하겠다 했지. 그쪽에서 그 다음날 비행기를 타고 와 그림을 쭉 보고 갔어"
그렇게 2016년 영국 런던 화이트 큐브에서 한국 작가 최초로 개인전을 열었다. 데이미언 허스트와 트레이시 에민 등 영국 스타 작가뿐 아니라 전 세계 거장들의 작품을 취급하는 세계 최고의 화랑에서 연 한국 작가 초대전은 한국 미술계의 쾌거이자 일대 사건이었다. 이후 세계 최고 화랑들의 러브콜이 이어져 파리 페로탕 갤러리, 국립 그랑팔레미술관, 도코갤러리, 홍콩 아시아소사이티등에서 전시를 열었다. '붓을 놓는다'는 팔순 이후부터 후끈한 봄날이 이어진 '행복한 화가'다.
"화이트 큐브 전시때 내가 못팔게 한 초기 작품이 오픈전에 솔드아웃 된거야. 그때 동경화랑사장이 1980년대에 100호가 300만원에도 안팔리던게 300배 정도 비싼값에 팔렸다고 하더라고. 그때 뉴욕 타임즈에도 기사가 났어. 박서보 그림이 화이트 큐브에서 솔드아웃됐다고. 또 뉴욕의 잡지 기자와 인터뷰하면서 '당신이 죽기전에 내 작품값이 1000만달러 가는 것을 보게 될 것'이라고 했는데, 그것도 기사로 썼더라고. 허허허"
실제로 그의 작품값은 10년전보다 최고 20배 정도 상승했다.박서보 화백은 평균 호당가격이 10여년 전보다 10배 올라 50만원이었던 호당가격은 2015년 400만원을 넘겼다. 100호 크기이면, 기본 4억선에 거래되는 셈이다.
16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대규모 회고전을 앞두고 만난 그는 끊임없이 이야기를 쏟아냈다. 박 화백이 한번 입을 열면 5시간은 이어진다는 전설이 미술계에 전해진다. '한국미술=박서보'라는 자부심이 강하다. 실제로 박서보는 그 이름 석 자만으로 미술시장에서 그대로 통하는 ‘바코드’ 같은 고유명사다. 지칠줄 모르게 옛 이야기를 발산하는 박화백은 그의 그림으로 둘러싸인 전시장에서 희열과 환희 사이, 쾌감 가득한 모습이었다.
“지난날 아날로그 시대엔 그림은 일방적으로 쏟아내고 발산하는 그림이었지만 21세기 디지털 시대에는 스트레스를 빨아들이는 치유하는 그림이어야한다"는 것. "이미지가 강하면 보는 사람이 부담된다"며 금년 봄에 개발했다는 '공기 색' 작품은 부드러운 회색이 도드라진다. "훅 불으면 날아갈 것 같이 가벼운데 날아가지는 않는 것"같은 색감을 만들려 노력했다고 했는데, 부들부들한 느낌으로 '먹빛처럼 주변의 빛과 공기를 흡수하여 깊이감을 드러낸다'
그는 "그림은 치유의 도구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나는 아날로그 시대를 70여년간 익숙하게 살았고, 디지털 시대를 10여년을 낯설게 살며 많은 고민을 했다. 21세기 디지털시대는 스트레스 병동과도 같다. 총기 난사 무차별 살인등 이런 게 모두 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그런데 여전히 아날로그 시대처럼 작가가 자기 생각을 쏟아 놓은 작품을 사람들이 사다가 걸어놓으면, 이는 예술이 또 다른 방식으로 폭력을 가하는 것과 같다. 21세기 작업은 흡인지처럼 보는 이의 스트레스와 불안한 심리를 빨아들여야 하며, 이것이 바로 디지털 시대에서 그림의 역할이다."
그가 50여년간 천착해온 '묘법'은 그 자신을 수행의 길로 이끌었다. 1960년대 옵아트, 팝아트를 수용한 '유전질‘ 시리즈 이후 무엇을 그릴 것인가가 아닌, '어떻게 그릴 것인가’ 의 문제를 고민했다. 반복적인 행위, 무념무상으로 나온 화면의 구조화가 특징이다.
'묘법'은 우연찮게 발견됐다. 1967년 둘째 아들이 그리고 지우고 또 쓰는 글씨 연습을 보고, '체념의 미학'을 발견하면서다.
"어느날 아들 녀석이 국어 공책에 숙제를 하면서 공책 네모 안에 닭자 하나를 써넣으려고 하는 걸 우연히 봤어요. 그 주먹만한 손으로 연칠을 잡고 네모 안에 예쁘게 글자를 집어 넣어야 하는데, 획 하나를 집어넣으면 다른 획이, 네모 밖으로 삐져나오고 몇번을 시도하다가 에라 안되는 구나 하고 신경질을 부리면서 쓴 글자를 죄다 직직하고 연필로 지워버리더라구요. 그걸 보고 갑자기 생각이 났어요. 프레임에 뭘 넣는다는게 불가능한거구나 하는 생각이요"(박서보 단색화에 담긴 삶과 예술-케이트 림과 인터뷰중)
연필로 비슷한 선을 무한히 긋는 ‘묘법(描法)’ 연작은 그렇게 시작됐다. '그리기도 아닌', '글쓰기도 아닌' 것.(초기 작품은 미국 추상주의 작가 싸이 톰블리(1928~2011)의 낙서같은 선묘 작업과 비슷하다는 소리도 들었다.)
이후에는 캔버스를 물감으로 덮은 뒤 연필로 선을 긋고 다시 물감으로 지우고 선을 긋는 행위의 반복으로 이어졌다. 지우는 행위의 반복과 그 과정 자체가 작품이다. 한국적인 정서가 녹아있는 말이지만 만약 외국어로 번역로 하자면 쉽지않은 말이다. 영문 제목은 미술평론가 방근택의 권유로 프랑스어로 '글을 쓰다'는 의미의 명사 ‘에크리튀르(écriture)’라고 쓰기 시작했고, 1970년 명동화랑 개인전에 나온 작품의 명제가 된 후 지금껏 같은 방식의 명제를 사용하고 있다.
자기 억제가 심한 작품과 관련 외국에서 '한국의 정치상황과 관련이나 독재성에 대한 항거인가'라는 질문도 받지만 "시대로부터 받아온 상처들이 내재적으로 풍겨나온 것이지 정치적인 데모스트레이션(demonstration)의 산물은 아니다"는 입장이다.
박서보의 '묘법'에 대해 박 화백의 후배인 한국추상미술 세계적인 거장 이우환은 1974년 '현대미술'지에 '이미지를 그리지 않으려는 뼈아픈 저항을 했다'고 분석했다. "아무것도 표현할 것이 자기 속에 없다는 것은 차츰 그것을 포기, 추방, 혹은 억누르며 표현이란 이미지를 단념시키는 작업으로 발전시킴으로써, 행위가 순수한 행위 자체로 정화하게 되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한국 추상미술거장 박서보 화백에 전시장을 아낌없이 내줬다.
18일부터 '박서보: 지칠줄 모르는 수행자'를 타이틀로 서울관 1, 2전시실에 1950년대 ‘원형질’ 부터 2000년대 ‘후기 묘법’, 2019년 신작까지 총 160여 점을 선보인다.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이끌어온 박서보의 삶과 작품세계를 한 자리에 조망한 대규모 회고전이다. 전시명 ‘박서보: 지칠 줄 모르는 수행자’는 현대인의 번민과 고통을 치유하는 예술이라는 궁극적인 목표를 위해 묘법을 지속해 온 수행자와 같은 그의 70여 년 화업을 지칭한다.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박서보는 ‘묘법(描法)’연작을 통해 독보적인 작품세계를 구축해왔다. 또한 평론가, 행정가, 교육자로서 평생을 한국 현대미술을 일구고 국내․외에 알리는 데 힘써왔다.
홍익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56년 김영환, 김충선, 문우식과 함께 '4인전'을 통해 반국전 선언을 발표, 한국미술의 전위적 흐름을 이끌며 앵포르멜, 단색화의 기수로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을 주도해온 미술가로 평가받는다. 1957년에 발표한 작품 <회화 No.1>으로 국내 최초 앵포르멜 작가로 평가받았다. 이후 물질과 추상의 관계와 의미를 고찰하며, 이른바 ‘원형질’, ‘유전질’ 시기를 거쳐 1970년대부터 ‘묘법’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이래 한국 추상미술의 발전을 주도했으며 현재까지 그 중심에서 역할하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박 화백이 "1000만달러를 줘도 안판다"는 2019년 신작 2점이 최초 공개되며, 1970년 전시 이후 선보인 적 없는 설치 작품 '허상'도 볼 수 있다.
또한 국내․외 전문가들이 박서보의 작품세계를 조명하는 ‘국제학술행사’(5월 31일), ‘작가와의 대화’(7월 5일 예정), ‘큐레이터 토크’(7월 19일) 등이 열린다. 미술관 1층 식당에서는 박서보의 작품에서 영감을 얻은 ‘박서보 특별 메뉴’도 선보인다. ‘자연에서 온 건강한 메뉴’ 한 계절국수 2종과 음료, 디저트 등을 전시 기간 동안 즐길 수 있다.
윤범모 국립현대미술관장은 “박서보 삶과 예술을 입체적으로 조망하는 이번 전시는 한국적 추상을 발전시키며 한국 현대미술의 흐름에 큰 족적을 남긴 박서보의 미술사적 의의를 재정립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박서보 화백은 “가장 치졸한 색을 가장 아름답게 쓸 줄 알아야 진짜 화가”라고 했다. 거무스레한 먹빛과 누리끼리한 '묘법' 작품속에 2000년대 초반 단풍 절정기의 풍경을 경험한 후 그려낸 화려한 색이 들뜨지 않은 세련미와 생동감을 발산한다.
“그림에서 비운다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경지다. 이제 탐욕이나 잡스러운 생각을 전혀 하지 않고 그 어떤 자극적인 얘기에도 흥분하지 않고 마음을 편안하게 갖고 산다."
그림 그리는 희열을 만끽해 나온 박서보의 그림은 세상에 둘도 없는 '한국의 그림'이다. 같은 듯 모두 다르게 그린 그림이 말한다. '변화하지 않으면 추락하고, 또한 변하면 추락한다'. 전시는 9월1일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