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공수여단 1980년 5월21일 상황일지서 기록
1985년·1988년 새로 작성한 일지서 사격 삭제
자위권 차원 발포 거짓 증명, 왜곡 실체 규명을
【광주=뉴시스】신대희 기자 = '1980년 5월21일 계엄군이 옛 전남도청에서 시민 사살 명령을 하고, 실제 사살 시범을 보였다'는 내용이 담긴 군 상황일지가 공개됐다.
이는 '자위권 차원에서 발포가 이뤄졌다'는 신군부의 주장이 '거짓'임을 증명하는 기록이다. 군 당국은 해당 기록을 은폐·왜곡한 것으로 밝혀졌다.
25일 전남대학교 5·18연구소 김희송 연구교수가 공개한 11공수특전여단 상황일지에 따르면, 1980년 5월21일 일지에 옛 도청 앞 사격 과정이 기록돼 있다.
'오후 1시: 폭도(시민) 1명이 버스를 몰고 도청 앞 분수대를 돌아나가려는 의도를 알고 00(판독 불가)를 지시 그 자리에서 사살, 폭도들 앞에서 시범을 보였음'이라고 적혀 있다.
'이후 폭도들은 감히 도청을 향해 돌진해오지 못했다. 500m 이격된 가운데 APC(장갑차)를 이용, 강습돌파작전을 감행할 의도임을 인지하고 폭도 APC가 움직일 때마다 계엄군 APC의 CAL50(기관총)으로 위협사격을 실시했음'이라고 기록했다.
'35대대가 동시에 공포를 사격, 주춤한 폭도들 앞에서 61·62·63대대는 즉각 전열 재정비, 기관총 사격토록 지시했다'고도 쓰여 있다.
상황일지에 첨부된 군 기록에도 '버스가 오고 있을 때 저건 죽여도 좋다는 대대장의 말씀이 떨어지자 중대장이 병사에게 실탄을 줘 즉시 조준 사격, 운전사는 비상구를 열고 내리다 쓰러졌다'고 나와 있다.
기록에 따라 80년 5월21일 61·62대대는 전열(금남로), 63대대는 도청 15m 후방, 35대대는 도청 울타리 벽에 있었고 특정 대대장의 명령에 따라 11공수 등이 시민을 사살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1985년과 1988년 군이 새로 작성한 11공수 상황일지엔 계엄군 사격 내용이 모두 삭제된 것으로 나타났다.
1985년 작성 일지엔 버스가 도청 앞 분수대를 돌아서 다시 나갔고 CAL50(기관총)으로 버스를 사격했다는 내용을 지웠다.
1988년 만든 일지엔 바리케이트를 설치해 방어했고, 오히려 계엄군이 시민의 사격으로 부상을 입었다고 조작했다.
'35대대가 동시에 공포를 사격했다'는 일지 내용도 "실탄 집단 발포를 은폐하려는 왜곡된 기록으로 보인다"고 김 교수는 설명했다.
실제 정부 차원의 여러 조사와 기록(전남경찰청 보고서)에서 시민들은 계엄군이 옛 도청서 집단 발포한 80년 5월21일 오후 1시 이후 무장(기록상 오후 1시30분 최초)한 것으로 드러났다.
1985년과 1988년은 전두환·노태우 정권에서 5·18에 대응하기 위해 범정부 차원의 군 비밀 조직(80위원회·511연구위원회 등)을 결성, 활동한 시기다. 보안사는 5·18 관련 자료를 1996년 일괄 폐기했다.
군에 불리한 사실을 왜곡·은폐, 신군부의 내란 목적 살인 행위를 정상적인 군 작전으로 호도하려 한 것으로 보이는 만큼, 실체 규명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김 교수는 "새롭게 확인된 11공수 상황일지는 계엄군이 시민들을 대상으로 집단 발포는 물론 위협 사격과 확인 사살까지 자행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살 명령과 집단발포 실체를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이어 "보안사는 철저한 관리·폐기 과정을 거쳐 문제 소지가 없다고 판단한 일부 자료만 5·18기록물로 남겼다. 11공수 상황일지도 이런 사례 중 하나"라며 "특정 시기 군 기록이 체계적으로 은폐·조작된 정황을 규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편 이 상황일지 오후 3시 이후 기록에는 '경계헬기 1대가 왔다. 도청 인근 고층 건물에 계엄군을 배치하라. 20사단과 교체할 예정이니 헬기장을 확보하라'고 기록돼 있다. 고 조비오 신부 등이 헬기사격을 목격한 시점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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