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문점선언 이후 급물살탄 비핵화, 하노이 '노딜'로 제동
文, 포괄적 로드맵 합의하고 단계적 이행하는 절충안 제시
美 '굿이너프딜 모른다' 北 '오지랖 넓은 중재자'…반응 냉랭
文, 톱다운 방식으로 돌파구 모색…'이행 방식 조율이 관건'
文, 트럼프 메시지 들고 金에 손짓…남북회담 성사에 주목
【서울=뉴시스】 안호균 기자 = 지난해 4월27일 판문점에서 열린 1차 남북 정상회담은 남북·북미간 긴장을 해소하고 북한 비핵화 협상을 궤도에 올려놓는 출발점이었다.
4·27 이후 남북미는 ▲5·26 판문점 2차 남북 정상회담 ▲6·12 싱가포르 1차 북미 정상회담 ▲9월 평양 3차 남북 정상회담 등을 잇따라 개최하며 '톱다운' 방식의 비핵화 해법에 다가서는 듯 했다.
하지만 지난 2월 27~28일 하노이 2차 북미 정상회담으로 비핵화 대화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북한의 비핵화 조치와 미국의 상응 조치를 담은 합의를 만들어낼 것이라는 기대가 컸지만 양측은 '노딜'로 회담을 끝냈다.
이후 비핵화 방식을 놓고 미국과 북한의 입장은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다. 미국은 일괄타결 방식의 '빅딜'을 북한은 단계적 방식의 '스몰딜' 해법을 고수하며 대치 상태를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그간 북한과의 협상 과정에서 단계적 해법의 도출 가능성을 시사했던 미국은 '선(先) 비핵화-후(後) 제재 해제'라는 원론적인 입장으로 회귀했다.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은 지난 15일 한 강연에서 '예측 가능한 미래에 대북 제재가 해제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나는 그러기를 원한다. 대북제재를 해제하는 것 이상 더 좋은 일은 없다. 그것은 우리가 성공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답했다.
폼페이오 장관은 "그것(제재 해제)은 북한이 더이상 핵무기나 대량살상무기를 보유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며 "우리가 그것(비핵화)이 사실이라는 것을 증명할 기회가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덧붙였다.
하지만 북한은 단계적으로 비핵화 조치와 상응 조치를 교환하는 방식이 아니라면 미국과 대화할 이유가 없다고 맞서고 있다.
김 위원장은 지난 12일 시정연설에서 "2차 조미(북미)수뇌회담은 우리가 전략적 결단과 대용단을 내려 내 짚은 걸음들이 옳았는가에 대한 강한 의문을 자아냈으며, 미국이 진정으로 조미관계를 개선하려는 생각이 있기는 있는가 하는데 대한 경계심을 가지게 된 계기가 됐다"고 지적했다.
이어 "미국은 실현 불가능한 방법에 대해서만 머리를 굴리고 회담장에 찾아왔다"며 "다시 말해 우리를 마주하고 앉아 문제를 풀어나갈 준비가 안 되어 있었으며, 똑똑한 방향과 방법론도 없었다"고 비판했다.
미국의 빅딜은 북한이 취해야할 비핵화 조치를 최대한 크게 설정하고, 이행을 검증한 뒤에야 상응 조치를 내놓겠다는 전략이다. 또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하려면 전체적인 로드맵에 대한 합의가 있어야 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북한의 스몰딜은 비핵화 조치와 상응 조치를 작게 나눠 미국과 단계적으로 주고받겠다는 생각이다.
북미가 의견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는 상황에서 문 대통령은 적극적인 중재에 나섰다. 북한이 포괄적이 비핵화 로드맵에 합의하게 하고 스몰딜(영변 핵시설 폐기)을 미국이 충분히 만족할만한 '굿이너프딜'로 만들어 단계적으로 이행하는 절충안을 구상하고 있다. 외교가에서는 미래의 핵(핵시설), 현재의 핵(핵물질), 과거의 핵(핵무기) 등으로 단계를 나눠 비핵화에 도달하는 방식이 거론된다. 비핵화의 의미 있는 진전을 위해 한두번의 연속적인 '조기 수확'이 필요하다는 게 청와대의 생각이다.
문 대통령은 북미 양측의 의견차를 좁히기 위해서는 정상간 '톱다운' 협의 방식이 유용하다고 보고 있다. 이를 위해 문 대통령은 지난 12일 미국 워싱턴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을 설득했고, 귀국 직후인 15일에는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했다. 북미 정상간 대화의 동력을 유지하면서 양측이 극단적인 선택을 하지 않도록 상황을 관리해 나가기 위한 움직임이다.
하지만 현재까지는 미국은 우리의 절충안에 크게 호응하지 않고 있는 상황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12일 한미 정상회담에서 '스몰딜' 수용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일어날 수 있는 다양한 더 작은 딜들(various smaller deals)이 있지만 지금 우리는 빅딜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며 "그리고 빅딜은 우리가 핵무기를 제거해야한다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해리 해리스 주한 미국 대사는 지난 22일 기자간담회에서 '굿이너프딜'에 대한 질문을 받고 "사실 중간 단계가 무엇인지 모르겠다. 한국 정부는 나와 중간 단계에 대해 정보를 공유하지는 않았다"며 "다만 트럼프 대통령과 문 대통령은 (제재)해제 문제는 FFVD(최종적이고 완전히 검증된 비핵화)에 달려있다는 데 워싱턴에서 공감했다"고 답변했다.
북한은 우리 정부가 미국에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김 위원장은 시정연설에서 "(남측은) 오지랖 넓은 '중재자', '촉진자' 행세를 할 것이 아니라 민족의 일원으로서 제정신을 가지고 제가 할 소리는 당당히 하면서 민족의 이익을 옹호하는 당사자가 되어야 한다"고 지적했다.
하노이 회담 이후 북미가 대치전을 이어가면서 양측 사이에 낀 우리 정부의 고심도 커지고 있다.
임을출 경남대학교 극동문제연구소 교수는 '굿이너프딜'의 현실화 가능성에 대해 "방향은 맞다고 보지만 (상황이) 현재 진행형이어서 판단하기 어렵다. 특히 미국이 부정적으로 보고 있어 지켜봐야 한다"고 말했다.
임 교수는 "미국은 스몰딜을 받으려면 북한이 정말 핵을 포기한다는 진정성을 보고싶어하는데 그게 충분치 않다고 보고 있는 것 같다"며 "북한은 (미국과의) 신뢰가 있다면 로드맵을 그릴 수 있다고 보는데, 미국은 어느 단계에서 제재 완화를 해줄수 있느냐를 제시하지 않고 '선 비핵화'만 얘기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북미 사이에서 중재안을 만들어내는 일이 불가능하진 않다는 의견도 있다. 양측이 신경전을 벌이고 있는 상황에서는 입장 차가 매우 큰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회담장에 마주앉을 경우 의견 차를 좁힐만한 여지가 충분히 있다는 설명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는 "(미국이 강조하는) 일괄타결은 합의에 대한 것이고 (북한이 강조하는) 단계적·동시적 방식은 이행에 대한 것"이라며 "일괄타결은 미국과 북한이 원하는것을 하나의 테이블에 올려놓고 그것의 시간표와 가는 경로를 배열하는 것이고, 합의 방식은 남북미 사이에서 접점 찾기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양 교수는 "그러나 이행 방식과 관련해서는 미국은 순차성(비핵화 조치 후 상응 조치)을, 북한은 동시성(비핵화 조치와 상응 조치의 동시 행동)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서 절충점을 찾는 것이 관건"이라고 짚었다.
문 대통령이 북미간 대화의 동력을 살려놓기 위해서는 '선 비핵화-후 제재 해제'라는 미국의 강경한 태도를 누그러뜨려야 하고, 북한이 로드맵 등을 수용해 미국에 비핵화 의지를 보여주도록 설득해야 한다. 우리가 한미 정상회담 직후 남북 정상회담을 제안한 것도 이 때문이다. 판문점 선언을 통해 북한 비핵화 협상의 물꼬를 텄던 문 대통령이 남북미 탑다운 대화를 통해 국면 전환을 이뤄낼 수 있을지가 주목된다.
북한이 아직까지 공식적인 반응을 내놓지 않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문 대통령에게 전달한 대북 메시지가 정상회담을 성사시키는 지렛대로 작용할 수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CNN은 지난 19일 한국 외교 소식통을 인용, 트럼프 대통령의 메시지에 대해 보도하면서 "(비핵화) 조치의 최근 과정에 있어 중요한 문제들과 북미 (후속) 정상회담에 긍정적인 요인들이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정성장 세종연구소 연구기획본부장은 "북한은 올해 연말까지 미국과 협상을 해보겠다고 한 만큼 미국의 입장에 변화가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관심사일 수 밖에 없다"며 "이 메시지는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게 하는 요인이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정 본부장은 "남북 정상회담과 관련해서는 이미 남북 간에 물밑 접촉이 이뤄지고 있을 것으로 본다"며 "실질적인 결정은 김 위원장이 러시아 방문을 마치고 와서 하게 될 것으로 본다"고 덧붙였다.
[email protect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