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J와 군사독재 저항하다 여러차례 고초
고문 후유증으로 오랜 기간 지병 앓아
5·18국립묘지에서 영면
【서울=뉴시스】김형섭 기자 = 향년 71세를 일기로 20일 별세한 김홍일 전 의원은 김대중(DJ) 전 대통령의 장남이자 정치적 동지로 우리 민주화 운동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1948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고인은 1060년대 상경해 서울에서 배재중학교와 대신고등학교,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운동의 선봉으로 떠오르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여러차례 탄압을 받았다. 1971년 고인은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돼 모진 구타와 고문을 겪었다.
이는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심재권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이신범 전 의원,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 사법연수생이던 조영래 변호사 등이 사제 폭탄을 이용한 정부기관 폭파를 꾀했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중앙정보부와 치안본부가 감금과 고문 등을 통해 이들 5명에게 허위 자백을 받아낸 것으로 후에 무죄가 밝혀졌다.
1980년에는 중앙정보부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명목으로 다시 체포돼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김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기 위해 민중을 선동해 일으킨 내란으로 조작한 사건이다.
훗날 그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니가 김대중이 아들이냐. 너는 절대로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한다"며 온몸을 짓밟고 끊임없이 구타했다.
이에 고인은 고문을 못이겨 허위자백을 할까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를 했다가 목을 다쳤다. 이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상태로 다시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결국 파킨슨병을 얻었고 후유증으로 큰 고통을 겪는다.
1948년 전남 목포에서 태어난 고인은 1060년대 상경해 서울에서 배재중학교와 대신고등학교, 경희대학교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했다.
그는 김 전 대통령이 민주화 운동의 선봉으로 떠오르자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여러차례 탄압을 받았다. 1971년 고인은 '서울대 내란음모 사건'의 배후자로 지목돼 모진 구타와 고문을 겪었다.
이는 당시 중앙정보부(현 국가정보원)가 서울대에 재학 중이던 심재권 더불어민주당 의원,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이신범 전 의원, 장기표 신문명정책연구원장, 사법연수생이던 조영래 변호사 등이 사제 폭탄을 이용한 정부기관 폭파를 꾀했다고 발표한 사건이다.
중앙정보부와 치안본부가 감금과 고문 등을 통해 이들 5명에게 허위 자백을 받아낸 것으로 후에 무죄가 밝혀졌다.
1980년에는 중앙정보부에 '김대중 내란음모사건'을 명목으로 다시 체포돼 극심한 고문을 당했다. 당시 전두환 신군부가 5·18 광주 민주화운동을 김 전 대통령이 정권을 잡기 위해 민중을 선동해 일으킨 내란으로 조작한 사건이다.
훗날 그의 진술에 따르면 당시 중앙정보부 수사관들은 "니가 김대중이 아들이냐. 너는 절대로 여기서 살아나가지 못한다"며 온몸을 짓밟고 끊임없이 구타했다.
이에 고인은 고문을 못이겨 허위자백을 할까봐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는 시도를 했다가 목을 다쳤다. 이때 적절한 치료를 받지 못한 상태로 다시 모진 고문을 당하면서 결국 파킨슨병을 얻었고 후유증으로 큰 고통을 겪는다.
그는 1980년 김 전 대통령의 외곽조직인 민주연합청년동지회(연청)를 결성해 아버지를 지원하며 군부독재에 함께 저항했다.
아버지가 당선되기 1년 전인 1996년 고향이자 아버지의 지역구이기도 했던 목포·신안갑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나서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정치에 발을 들였다. 1997년 대선에서는 연청과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해 아버지를 도우며 '대통령 김대중' 탄생에 기여했다.
이후 2000년 전남 목포에서 더불어민주당 전신인 새천년민주당 소속로 16대 의원을,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둘로 쪼개진 뒤 남은 민주당에서 17대 비례대표 의원을 지냈다.
하지만 거동에 불편을 겪을 정도로 고문 후유증은 날로 악화됐다. 이런 가운데 나라종금 사건에 연루돼 인사청탁 대가를 받은 혐의로 2006년 9월 의원직마저 잃자 외부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게 됐다.
현역 의원 당시 젊은 시절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당당한 풍채로 유명했던 고인은 지난 2009년 8월 아버지 빈소에 극도로 수척해진 모습으로 휠체어를 앉은 채 나타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때 고인은 거의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심해졌으며 '아버지'라는 한마디만 간신히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고인은 김대중 대통령님 장남이시며 정치적 동지이셨다"면서 "민주화 운동과 평화통일 운동에 헌신하셨으며 군사정권의 고문 후유증으로 10여년 이상을 투병하셨다"고 애도했다.
한편 고인의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23일 오전 7시이며 장지는 5·18국립묘지다.
[email protected]
아버지가 당선되기 1년 전인 1996년 고향이자 아버지의 지역구이기도 했던 목포·신안갑에서 새정치국민회의 후보로 나서 15대 국회의원에 당선되며 본격적으로 정치에 발을 들였다. 1997년 대선에서는 연청과 함께 혼신의 힘을 다해 아버지를 도우며 '대통령 김대중' 탄생에 기여했다.
이후 2000년 전남 목포에서 더불어민주당 전신인 새천년민주당 소속로 16대 의원을, 열린우리당 창당으로 둘로 쪼개진 뒤 남은 민주당에서 17대 비례대표 의원을 지냈다.
하지만 거동에 불편을 겪을 정도로 고문 후유증은 날로 악화됐다. 이런 가운데 나라종금 사건에 연루돼 인사청탁 대가를 받은 혐의로 2006년 9월 의원직마저 잃자 외부에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게 됐다.
현역 의원 당시 젊은 시절 아버지를 연상케 하는 당당한 풍채로 유명했던 고인은 지난 2009년 8월 아버지 빈소에 극도로 수척해진 모습으로 휠체어를 앉은 채 나타나 안타까움을 자아내기도 했다. 그때 고인은 거의 말을 하지 못할 정도로 병세가 심해졌으며 '아버지'라는 한마디만 간신히 할 수 있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 전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박지원 민주평화당 의원은 "고인은 김대중 대통령님 장남이시며 정치적 동지이셨다"면서 "민주화 운동과 평화통일 운동에 헌신하셨으며 군사정권의 고문 후유증으로 10여년 이상을 투병하셨다"고 애도했다.
한편 고인의 빈소는 서울 신촌세브란스 병원에 마련됐다. 발인은 오는 23일 오전 7시이며 장지는 5·18국립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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