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3·1만세운동 발자취 발굴, 전시
【무안=뉴시스】배상현 기자 = '3·1 대한독립만세 함성'은 100년 전 전남지역 곳곳에서 울려퍼졌다.
전남도는 3·1절 100주년을 맞아 1919년 3월10일 광주를 시작으로 전남지역으로 확대된 만세운동을 발굴, 정리했다.
27일 전남도에 따르면 그해 3월 중순부터 4월 중순까지 전남 전 지역에서 전개된 만세시위에 참여한 군중수는 2863명으로 확인되지만, 실제 시위에 가담했던 수는 이 보다 훨씬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목포는 남궁혁 등 뜻있는 학생 청년들과 개신교 교인 서상봉 등이 영흥학교와 정명여학교 학생들과 함께 1919년 4월 오전 10시께 시내 곳곳에서 대한독립만세 운동을 전개했다. 두 학교와 목포 양동교회가 만세시위지다.
여수는 이웃 고을인 광양군에서 만세운동이 벌어질 무렵에 쌍봉·소라·율촌 등 부락 단위로 산발적인 만세운동이 벌어졌고, 야간을 이용해 남·돌산·화정·삼산 등 면내 해변지방에 불을 피워놓고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일부 어선에서는 태극기를 달고 독립만세를 부르기도했다.
'남도의 유관순'이라고 불리는 윤형숙 열사는 만세운동 중 일경에게 왼팔이 잘리고 눈까지 잃으면서도 만세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다. 여수시 화양면 창무리 마을 입구에 윤형숙 열사의 무덤이 있다.
순천은 3월 16일 오후 2시께 순천읍 난봉산에 개신교 청년회원 등 수백 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환호성을 올렸으며, 4월 7일 순천읍 장날 오후 1시께 읍 남문 문루인 연자루위에서 상사면 유생 박항래의 대한 독립만세의 함성이 올려지고 4월 13일 낙안읍에서 김종주 등이 선두에서 서서 150여명이 만세를 부르며 행진했다.
나주에서는 3월 15일 오후 읍내에서 최기정 등 수백 명의 만세시위가 있었으며, 이튿날인 16일 밤에 역시 읍내에서 태극기와 등불을 들고 행진하며 만세를 부르다가 헌병의 출동과 함께 해산됐다. 3월 23일 다시면에서, 4월3일 영산포 강가에서 수백 명의 만세 시위가 있었다.
광양에서는 3월 27일 광양읍 장날 오후 3시 시장 한가운데서 옥룡면 유생 정성련이 독립만세를 외쳤고 군중들이 모두 환호하며 대한 독립만세를 외쳤다. 다음 장날인 4월 1일 오후 4시 20분께 옥룡면의 서경식 등에 의해 ‘대한 독립만세’의 함성이 터져 나왔다
담양은 3월 18일 담양읍 장날 정기환·임문호 등이 담양 보통학교 학생들과 수백 명의 민중과 함께 만세를 부르고 시위행진을 했다. 이듬해 2월 22일 창평면에서 청년 조보근·한익수, 한봉준, 김길환 등이 태극기를 휘두르며 대한 독립만세를 부르고 창평리의 신작로를 행진했다.
4월 9일 순천군 낙안면 신기리 전평규 등이 벌교 아래 시장에서 조선 독립만세를 외치자 다수의 장꾼이 호응했다. 14일 벌교장에서 제2차 만세시위, 보성면 옥암리에서 4월 18일 웅치 장날을 기해 이용의를 선두로 해 서당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있었다.
화순에서는 남리 조국현의 주동으로 3월 15일에 동리 서당 학생과 마을 사람 등 10명이 함께 읍 앞 개미산 마루로 올라가서 산위에 태극기를 높이 세우고 대한 독립만세를 소리높여 외쳤다
곡성 옥과읍 시장, 곡성읍 장터, 구례읍 장날, 장흥 읍내시장, 강진 동성리 장터, 해남읍 장날, 영암읍 장날, 무안읍 장터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장날 만세 시위가 잇따랐다.
완도 고금도에는 보통학교 학생 정학균 등의 주도로 고종 황제의 1주기를 기회로 만세운동을 했으며 신안 장산도에서 3월18일 만세를 불렀다.
전남도가 발굴한 만세운동 자료는 전남도청 로비에 전시돼 있다.
전남도는 다음주까지 로비에 전시한 뒤 장소를 옮겨 1년간 도민들에게 알릴 예정이다.
전남도 관계자는 "3·1만세운동 100주년을 맞아 전남에서 전개된 만세운동을 파악해 도민에게 알리기 위해 발굴작업과 함께, 전시를 하게 됐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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