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고재서 9년만의 개인전...농민화가→기록화가로
붉은 피켓 강렬 '광화문 촛불혁명' 5m 대작에 담아
세월호 사건 단원고 학생 그려낸 '학교 가자' 10점
손잡은 남북 두 정상 '봄이 왔다'로 생생하게 재현
【서울=뉴시스】 박현주 미술전문기자 = 임옥상도, 홍성담도 그렸다. 민중미술작가라면 놓칠수 없다. '광화문 촛불 혁명'이 또다시 그림으로 나왔다. 지난해 9월 제일 먼저 선보인 임옥상의 '광장에, 서’는 흙을 물감 삼아 그린 촛불 그림으로 '기념비적인 역사기록화'로 평가받고 청와대 로비에 걸렸다. 홍성담은 이순신의 전법인 학익진(학의 날개를 펴서 감싸는 진형)모양으로 촛불시위 항쟁을 역동적인 구도로 담아냈다.
이번엔 더 직설적이다. 앞선 두명의 민중미술작가도 깜짝 놀랄 만큼 강렬하다. 촛불을 형상하는 수천개의 노란 점들속에 '이게 나라냐' '내려와 박근혜' '박근혜 즉각 퇴진'을 쓴 붉은 피켓과 박근혜 전 대통령 사진이 담긴 액자는 유리가 깨진 채 맨 끝 밑에 붙였다.
하지만 늦게 나온 탓일까. 이미지 시대에 신선함보다 식상함도 감돈다.
"방식이 다르지만 서로 각자 그렸는데 전시를 누가 먼저 하느냐죠. 제일 먼저 한게 이기는 거죠. 뒤에 하면 그걸 넘어서야 되기 때문에…"
이종구 화백(61·중앙대 미대 교수)도 안다. 하지만 누가 뭐래도 "역사의 기록으로, 증거로 남기고 싶었다."
굳이 이렇게 노골적으로 그려야겠냐 혹평해도, 마땅히 "감수하겠다"는 의지였다. 화가로서 미학적인 부분을 손해보면서까지 '책에 각주'를 달 듯 사실적이고 구체적으로 그려낸 건 "예술가의 양심"때문이다..
"작가도 시민이고, 사람이다. 작품과 다른게 아니다. 둘 중에 하나가 다르면 예술가가 아니다. 내가 직접 참여했고, 양심에 의해서 그린 그림이라 부담도 없고, 하고 싶은 이야기를 명쾌하게 했을 뿐이다. 응어리가 풀어졌다."
이종구의 '광장-16,894,280개의 촛불' 작품은 그 날의 함성과 구호가 들리는 듯하다. 45개의 작품을 이어 붙인 가로 5m가 넘는 대작으로 광화문 촛불 시위의 힘, 즉 단결된 시민의 힘으로 탄핵을 만들어냈다는 것을 보여준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구속 수감되기까지 7개월 동안 23회에 걸친 촛불 광장에 참여한 총 1689만4280명 시민들의 총체적인 촛불 혁명 과정과 모습을 형상화했다. 광화문의 역사적 흐름을 촛불이 물결치는 듯 그렸고, 시위에 쓰였던 스티커를 주워모아 콜라주했고, 피켓에 자주 등장했던 문구들을 중간중간 배치하여 시간의 흐름과 당시 상황을 표현했다.
이 화백은 "2016년 겨울부터 2017년 4월까지 총 23회의 시위가 진행되었는데, 나도 10여차례 광장에 나가 촛불을 밝혔다"며 "'광장' 연작은 말할 것도 없이 그 해 겨울 광화문 광장에서 촛불을 들고 싸운 거룩한 시민들의 초상화이자 기록화"라고 강조했다.
격변의 시기, 리얼리즘 작가들은 불꽃이 된다. 민중미술이 탄생한 이유다. 엄혹한 세상에 맞서 그림으로 투쟁한다. 이 화백도 그 중 한명이다. '리얼리스트 화가'로 30년째 붓을 잡고 있다. 1976년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1988년 인하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했다. 1980년대 5.18 광주항쟁과 민주화 운동등 한국 사회 변혁의 흐름에서 그는 '리얼리스트 화가'를 택했다.
1980년대 이전 미니멀리즘과 추상화가 대세였던 흐름과 정반대로 '극사실주의 화풍'으로 비판적 리얼리즘에 불을 붙였다. 1986년 그림마당 민에서 연 '땅의 사람들'을 시작으로 우리나라 농촌 현실 문제를 고발, '농민화가'로 유명세를 탔다. 정부미 쌀포대에 주름진 농부 초상화를 그려낸 작품은 산업사회를 맞이한 농촌의 초상이자 기록이었다. 고향인 충남 서산 오지리 마을 농부들을 화폭에 담아내며 자본주의 팽창으로 황폐화되어가는 농촌 공동체 상황을 극명하게 보여줬다.
'농민의 삶'은 이 땅의 현실과 역사다. 20세기 후반 한국 농촌사회의 냉철한 기록을 담은 그림으로 2005년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로 선정됐다. 당시 김윤수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은 "이종구는 농민들이 어떻게 거덜나고 희망 없는 삶을 이어가고 있는가를 그려온 거의 유일한 화가"라며 "이종구는 단순히 농민화가가 아니라 동시대 진실을 그리고자 했던 유럽의 진실주의(verism)혹은 사회적 리얼리즘의 연장선에 위치한다고 하겠으며, 적어도 그런 화가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 미술의 지평을 넓혀 주었다"고 호평한바 있다.
'농민 화가'에서 '소 작가'(2009)로 변했던 그가 다시 드러난 건 세상이 혼란스럽다는 증거다. 리얼리스트 화가, 그를 다시 현장으로 불러들인건 그 만큼 참담했고 암울한 세상이었다는 것이다.
9년만에 연 이종구 개인전 '광장-봄이오다'는 과거로 돌아간 타임머신같다. 벌써 잊어버린 참담했던 4년전으로 우리를 이끈다. 서울 삼청로 학고재 갤러리에 지난 2년간 제작한 신작 33점이 걸렸다.
촛불 시위를 다룬 광장 연작과 함께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들을 일일이 그려냈다. 학생들의 단체사진이 이어져 걸린 전시장은 순간, 숨을 멎게 한다.
"이번 전시는 근래의 시간과 공간에서 시작된 예술적 기록이자 증언이며 상상의 결과물들이다. ‘별이 된 세월호의 아이들’을 깊은 바다 속에서 인양하는 마음으로 '학교가자'를 작업했고, 광화문 촛불현장에서 수집한 포스터 등을 증거로 제시하여 아이들을 세상에 부활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세월호 사건으로 희생된 단원고 학생과 선생님을 그려낸 초상화만 500여명이 된다. 단원고는 그 당시에 남자 반과 여자 반이 각각 5반씩이었고, 총 학생수가 350여명이었다. 세월호 사건 이후 그 중 75명만이 생존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도 모르고 그렸는데, 학교에 가서 영정 사진이 책상에 있어 놀라고 충격받았다. 혼자서 교실을 보는 것 자체가 힘들고 무섭더라."
그들에게 빚진 마음으로 해남에 있는 세월호 지나가던 뱃길 임하도(林下島)에 가서 3개월간 희생자의 넋을 추모하며 '학교 가자, 1반~10반 – 세월' 연작(10점)을 그렸다.
그림인데 진짜 단체 사진을 보는 것 같다. 자신의 구명조끼를 벗어 친구를 구한 정차웅 군도 있다. "초상화는 눈빛만 약간 달라도 입술이 조금만 달라져도 다르게 보인다. 그래서 정확히 그리려고 했다." 그는 고 노무현 전 대통령의 공식 초상화를 그린 작가다.
'봄이 왔다' 연작은 작가의 상상력이 현실로 구현된 작품이다. 지난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역사적인 판문점 만남을 보고 나서 여름 내내 그렸는데 뒷 배경이 백두산 천지다.
마치 9월 20일 두 정상이 천지에서 함께 할 것을 예견이라고 한 것일까. 그는 "판문점 대신 상상의 영역으로 배경을 백두산 천지로 그렸는데, 실제 현실이 돼 놀랐고 감동이 컸다"고 했다. 그러나 "워낙 갑작스럽고도 감동적인 역사적 사건이어서 채 가시지 않은 격정의 감정으로 시작되어 완성도에 앞서 다소 추상적인 감상이나 민족적 감상주의를 드러낸 면이 없지 않다"고 고백했다.
'노골적이다 기록적이다'를 구분하기 전에 섬세한 붓질로 완성된 그림들은 정성을 칭찬할 수 밖에 없다. 화려한 날만 역사가 아니다. "기록화"로 가져온 이번 전시는 이 땅을 지키는 소시민의 삶과 역사, 결국 '사람이 먼저인 세상'을 알려준다.
"그가 주목한 것은 그들이 단순한 희생자가 아니라 잠든 우리의 영혼을 깨우고 광장으로 불러내 부조리로 가득한 세상을 바꾸게 만든 구원자로서의 면모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봄의 근원은 바로 그들로부터 온 것이다."(소설가 방현석)
4년전 위암 수술을 받았기 때문일까. 자기애적 태도도 보인다. 그림 곳곳에 자신과 가족들의 얼굴까지 그려넣었다.
문구가 비어있는 붉은 카드를 든 '광장-가족' 작품은 모두 환히 웃고 있지만 경고를 하는 듯 하다.
"촛불혁명으로 탄생시킨 정부지만 권력을 사유화하거나 한다면 사정없다. 거시적인 것에 밀려 미시적인 부분이 문제가 되고 있는데 복지문제등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해주길 바란다. 항상 사람을 중심에 두기 때문에 사회에 대한 날카롭고 비판적인 시각은 계속 유지될 것이다. "
그러면서도 "시행착오는 당연히 있다"며 문재인 정권에 기대감을 보였다. "저도 40년 그림을 그렸는데, 이번 봄이왔다 연작중 두 정상 만나는 배경 하늘색을 다섯번이나 칠했어요. 한번에 절대 안나옵니다. 정치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주로 황갈색풍 농촌 그림으로 '농민 화가'로 불렸지만 붉은색과 푸른색이 많은 이번 전시로 30여년간 붙어있던 '농민 화가' 타이틀을 뗄 것 같다.
그도 그 수식어가 "싫다"고 했고, '민중 작가'라는 호칭은 "과분하다"고 했다. "사회적 약자와 사회 현실을 그리는데 한 가지 수식어로 규정해버리면 단순해진다며 틀에서 벗어나고 싶다"며 "농민화가는 내게 편협한 말이다. 그냥 '화가'로 불러달라"고 주문했다.
또 '서양화가'로 불리는 것에 대한 시골 고향 친구들의 반응도 전했다. "야 네가 왜 서양화가냐? 네 그림이 오지리 사람들 그리고 소 그리는데...?"
그는 "그 말을 듣고 보니 정말 이상했다"면서 "나는 한국 사람이고 한국의 역사와 현실을 특히 한지로 그리는데 서양화가로 분류된 건 잘못된 말"이라며 이분법적으로 단순 구분된 미술장르를 현실적으로 지적했다.
우리시대 역사적 사건을 대하 소설처럼 완성해낸 그는 환갑이 지났지만 여전히 날이 서있다. 4년전에 비해 20kg이 빠져 깡마른 체구로 더욱 날카로워 보인다.
이전 작품과 화풍(색상)이 달라진 이번 작업들에 대해 이 화백은 "다시 말하지만 미학적 완결성보다 시대의 서사와 내용을 더 중요시하고 강조 한 측면이 크다"고 했다. "그것은 내가 1980년대 초 그림을 시작하면서 다짐했던, 우리 시대의 현실과 역사를 기록하고 증언하는 일로서 나의 예술적 책임과 임무를 다하겠다는 생각의 확인과 실천이다."
현장 속으로 들어가 '단순히 화가가 아니라 사람이 되는 것, 살아있는 예술을 만들겠다'는 의지다. 그는 이제 '농민 화가'에서 '기록 화가'로 자기 길을 다시 만들고 있다.
"앞으로도 거듭 우리시대의 역사와 현실과 현장을 기록하고 증언하는 작가로서 역할을 다 하고자 한다. 나의 궁극적인 예술적 지향은 인간다운 삶의 가치와 세상에 있으므로." 전시는 10월21일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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