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시구개정으로 파괴된 청주·충주읍성…일본인 거주 증가

기사등록 2018/08/28 14:38:31

경술국치 108년 맞아 '탈환 기념 행사' 열려

1910년대 청주시가도(청주연혁지).
1910년대 청주시가도(청주연혁지).
【청주·충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29일은 일제에 국권을 공식적으로 빼앗긴 경술국치(庚戌國恥) 108년이 된다.

28일 충북 청주시와 청주문화원에 따르면 다음 달 1일부터 2일까지 '청주읍성 탈환 426주년 기념 2018 청주읍성큰잔치'가 열린다.

이번 행사는 2013년 일부(35m) 복원된 옛 청주읍성을 중심으로 중앙공원과 성안길 일대에서 펼쳐진다.

충주시 성내동 '구 조선식산은행 충주지점'은 충주지역 첫 등록문화재(683호)로 지정된 이후에도 건물 보존·철거 논란이 여전하다.

현재 일부 복원된 청주읍성이나 흔적도 없는 충주읍성은 일제강점기 초기에 '시구개정(市區改正)'이라는 명목의 도시계획으로 철저히 파괴됐다.

일제는 앞서 대한제국의 무장을 해제하고자 친일내각을 움직여 1907년(광무 11) 8월1일 자로 '내각령 1호 성벽처리위원회에 관한 건'을 공포하게 한다.

읍성을 철거해 항일의병이 점령해 항전하는 근거지를 없애겠다는 일제의 의도라는 게 학계의 견해다.

청주읍성과 충주읍성은 이를 근거로 하고 시구개정을 통해 흔적 없이 사라졌다.

조선신문 1914년 2월19일 자에 따르면 청주읍내 시구개정은 1911년(명치 44) 성벽 철거에 들어가 1912년(대정 1) 일단 종료했다.

조선총독부가 1912년 10월7일 각도 장관에게 훈령 9호를 시달해 시구개정을 시행하기 전 이미 청주지역 시구개정은 시작됐다.

청주읍성은 시구개정 사업인 읍성 철거와 도로 개수가 1914년 이전 거의 마무리됐다.

충주읍성 역시 비슷한 시기에 사라졌다.

'충주발전지(忠州發展誌)' 등에 따르면 1913년(대정 2) 9월부터 1916년(대정 5) 9월까지 3년간 충주지역 시구개정이 진행됐다.

이 책에서는 '동서남북 누문(樓門)은 제거되고 읍내를 둘러싼 성벽은 철거됐다. 슬픔에 젖어 있는 그림자는 사라지고 상쾌한 현대적 색채로 장식됐다'고 적고 있다.

앞서 1907년 7~8월 황성신문에 따르면 충주공립보통학교(현 교현초) 교사 신축에 필요한 석재로 충주읍성 성돌을 사용하도록 정부에서 성벽 사용 승인도 났다.
【충주=뉴시스】1912년 작성된 '충주시구개정도(忠州市區改正圖). (사진=충주발전지) photo@newsis.com
【충주=뉴시스】1912년 작성된 '충주시구개정도(忠州市區改正圖). (사진=충주발전지) [email protected]
일제의 시구개정으로 파괴된 읍성 성돌은 하수구 축대 정비나 도로 건설 등에 쓰였다.

읍성을 허물고 추진된 시구개정은 수많은 가옥도 철거되면서 그 자리에는 조선인 대신 일본인이 자리를 잡았다.

전홍식 충주지역사회연구소장은 2015년 박사학위논문 '식민통치전략과 도시공간의 변화-일제시기 충주를 중심으로'에서 "충주읍 조선인 호구수의 변화는 시구개정이란 도시계획 명목 아래 수많은 가옥이 파괴되고 조선인이 충주읍에서 강제로 퇴출된 것이 그 원인"이라고 분석했다.

'아이들의 하늘' 주비위원회 간사 김희찬씨도 지난해 12월 충주문화원에서 펴낸 '중원문화' 30집에 실은 '1913~1916년 충주시구개정의 의미 고찰'이란 글에서 '조선총독부 통계연보'와 '충청북도일반' 등 통계자료를 분석했다.

이에 따르면 1914년 575가구 2555명이었던 충주 시가지 한국인은 1915년에는 199가구 1000명으로, 376가구 1555명이 줄었다.

김씨는 1년 동안 시가지 한국인 수가 60.9%나 급감한 원인을 1913년 9월부터 1916년 9월까지 3년간 일제가 진행한 충주시구개정에서 찾았다.

하지만 충주읍 시가지 일본인 수는 1910년 162명에서 충주 시구개정이 시작된 1913년에는 520명으로 3년 새 3배 이상 늘었고, 시구개정이 완료된 1916년에는 697명의 일본인이 충주읍 시가지에 거주했다.

광복 3년 전인 1942년에는 시가지에 일본인이 1192명까지 살았다.

청주지역도 양상이 비슷하다.

청주읍 시가지 일본인 수는 1910년 717명에서 시구개정이 시작된 1911년 1114명으로 크게 늘고 1912년 1494명, 1913년 1579명, 1914년 1610명으로 해마다 늘었다.

1942년 청주읍 시가지에는 3565명까지 일본인이 늘어났다.

청주·충주지역 모두 시구개정이 시작되는 시점부터 시가지에 일본인 거주가 늘면서 철거한 읍성 공간을 중심으로 일본인들의 상권이 형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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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시구개정으로 파괴된 청주·충주읍성…일본인 거주 증가

기사등록 2018/08/28 14:38:31 최초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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