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 제삿날이 언제인지 알고 싶다"
"3살 때 헤어진 딸이 71세야…그 애가"
이산가족 남측 방문단으로 금강산에 가게 되는 이수남(77)할아버지는 68년만에 큰 형님을 만나는 게 지금도 믿기지 않는다고 전했다.
이 할아버지는 큰 형님의 생존 소식을 듣고 눈물을 훔쳤다. 이 할아버지는 "(돌아가신) 엄마, 아버지가 생전에 소식을 들었으면… 그게 제일 첫 번째 생각났다"고 말했다. 이 할아버지는 지금까지도 큰 형님 리종성(86)할아버지의 이태원국민학교 졸업증서를 보관하고 있다.
1950년 당시 북한군은 서울 시내에서 젊은 사람들을 데려가는 상황이었다고 이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이 할아버지의 어머니는 징집을 피해 큰 형님을 시골에 데려가는 길에 광진교 근처에서 북한군에 붙잡혔다.
형님은 북한군에 끌려가고, 어머니는 집을 나선 지 1시간만에 홀로 돌아왔다. 큰 형님의 친구 중에 돌아온 사람도 있었지만 이 할아버지의 형님은 그 길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 할아버지는 "(큰 형님이) 살아 계시는 게 너무 영광이고 고맙다"며 "우리 형님은 모든 걸 다, 모든 가족을 평생 잃어버리고 사셨을 것을 생각하면 너무 마음 아프다"고 말했다.
이 할아버지는 큰 형님에게 줄 선물로 연고, 소화제, 진통제 등 상비약과 용돈을 준비했다. 처음 만나는 형수 백옥녀(79) 할머니에게 줄 화장품도 준비돼 있다.
이 할아버지는 "영구적으로 상설면회소라도 생긴다면 더없이 좋겠다"고 바람을 밝혔다.
◇ "부모님 제삿날 언제인지 묻고 싶어"
박기동(82)할아버지는 북에 있는 여동생 박선분(73)할머니와 남동생 박혁동(68)할아버지를 만난다. 헤어질 당시 여동생은 6살, 남동생은 2살로 박 할아버지는 기억했다.
박 할아버지는 동생들의 특징을 아직도 기억했다. 박 할아버지는 "남동생은 왼쪽 이마가 반점 비슷하게 튀어나온 게 있고 지금 어떤 상태인지는 모르겠다"고 말했다.
여동생에 대해서는 "생김새가 특이하게 서양사람 비슷하게 생겨서 우리 형제들처럼 그렇지 않고 달랐다"며 "소련여자라고 로스키라고 어릴 때 놀리던 기억도 난다"고 회고했다.
박 할아버지는 전쟁 당시 서울 배제중학교를 다니던 중 강화군에 남은 가족들과 헤어졌다. 가족과는 멀리 떨어져 있어서 상세한 이야기는 아직도 다 알 수 없다.
박 할아버지는 "내가 알기로는 쌀을 쪄서 마굿간에서 묻어놓은 거 그걸 가지러 가다 인민군에 잡혔나 보다"며 "식량을 갖고 나오지 못하고 마침 가을철이라 농사지어놓은 것을 추수해야하니까 어머니가 막내동생 애들 데리고 집에 들어가다 영원히…이산가족된…"이라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러다가 강화군에서 의무대대 간호원으로 근무하는 동창생을 만난 계기로 8240부대에 입대한다. 할아버지는 배를 타고 건너가 유격전을 하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박 할아버지가 가장 그리워하는 부모님은 모두 북에서 돌아가셨다. 박 할아버지는 이번에 동생들을 만나면 부모님의 제삿날과 묘지가 어디인지를 물어볼 생각이다.
박 할아버지는 부모님을 만나면 무슨 말을 하고 싶냐는 질문에 "열심히 살고 동생들 잘 보살폈다고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거 같다"고 말했다.
박 할아버지는 이번 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인천에 사는 여동생과 함께 간다. 박 할아버지의 남동생은 가기를 원했으나 이번에 함께 하지 못한다.
남북은 지난 6월 적십자회담에서 거동이 불편한 경우 가족 1명의 동행을 허용하기로 합의했다.
박 할아버지는 동생들에게 줄 생활용품과 겨울 점퍼 등을 준비하고 있다.
68년 만에 부녀 상봉도 이뤄진다. 황우석(89)할아버지는 헤어질 당시 3살이었던 딸을 만난다. 70년 가까이 철책선이 남과 북을 갈라놓은 사이 딸 황영숙씨는 71세 할머니가 됐다.
황 할아버지는 "내가 고향 떠날 때 딸이 3살이었다. 그런데 지금 68년 지났다"며 "내 혈육이라곤 걔 하나 살아서 이번에…외손녀지, 자기 딸이 39세인데 데리고 온다"고 전했다.
황 할아버지는 1·4 후퇴 당시 북한군에 징집되는 것을 피해 3개월만 고향으로 피난을 하자는 생각으로 이남으로 내려왔다. 그러다가 68년의 세월이 흘렀다.
황 할아버지는 "(딸에게) 많이 미안하다"며 "(집안에) 남자라곤 아버님(황 할아버지의 아버지) 한 분 계셨는데 아버님은 일찍 돌아가셨더라"고 운을 뗐다.
그러면서 "가까운 친척도 없고 내 누이동생 셋은 시집을 여기저기로 갔을 것 아니냐"며 "그러니까 얘가 고생도 많이 했을 거고 어려움도 많이 겪었을 것 같다"고 말했다.
황 할아버지의 누이동생 3명은 이번 이산가족 생사확인에서 모두 생존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됐다.
황 할아버지는 딸을 위해 가락지를 선물해주고 싶지만 해줄 수 없는 아쉬움을 전했다. 황 할아버지는 "솔직히 가락지나 두어 개 해가서 하나씩 꽂아줄려고 했는데 안되더라"며 "안내문에 보니까 금, 은 이런 건 안되더라"고 아쉬워했다.
그러면서 "시계는 10만원 미만은 가능했다"며 "태엽 감는 시계와 자동시계는 10만원 미만은 가능하다. 그거나 갖다 줄까 싶다"고 말했다. 68년만에 딸을 만나는 할아버지의 시계는 1950년 당시로 되감아진 모습이다.
황 할아버지는 "이번 상봉도 통일부와 적십자사에서 협력을 해서 여러분들이 고생해서 성사시킨 것 아니냐"며 "그분들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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