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총리, '납치 아베' 로 불리며 평생 과업 삼아
28년간 양측 수교 협상의 고정 메뉴.....엎치락뒤치락
4년 전 '스톡홀름 합의' 후 북핵문제로 '원점'

【뉴욕=AP/뉴시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19일(현지시간) 유엔 총회 연설에서 13세 때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 요코타 메구미(横田めぐみ)에 대해 언급한 것과 관련, 메구미의 어미니인 사키에(早紀江·81·왼쪽)씨가 납치 문제에 대해 언급해준 트럼프 대통령에 대해 "고맙다. 큰 기회가 될 것으로 생각한다"며 감사를 표했다. 사진은 지난 2006년 4월 27일 사키에 씨가 미 의회를 방문해 납북된 딸의 귀환을 호소하는 모습이다. 뒷편으로 납북되기 전 메구미의 모습이 담긴 사진이 보인다. 2017.09.20.
【도쿄=뉴시스】 조윤영 특파원 =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가 다시 핫이슈로 부상하고 있다. 남북, 북중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정상회담 개최가 확정되면서 북일정상회담의 성사 여부도 현실감 있게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는 11일 일본 후지TV에 출연해 “북일정상회담이 실현되면 좋겠다”고 직접 밝히기도 했다.
북일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납치문제에 대한 진전이 필요하다. 납치문제는 북일관계의 심장에 박힌 가시와 같은 존재다.
특히 ‘납치 아베’로 불릴 정도로 납치 문제를 자신의 평생 과업으로 생각해 온 아베 총리로서는 납치 피해자 문제에 대한 가시적 성과없이 북일정상회담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2012년 12월 다시 정권을 잡은 아베 총리가 가장 먼저 한 일도 모든 국무대신들로 구성되는 납치문제대책본부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본부장은 총리, 부본부장은 납치문제담당 장관, 관방 장관, 외무상이 맡았다.
일본 정부가 북한에 납치문제를 처음 제기한 것은 1991년부터 시작된 북한과의 수교 협상에서였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일본 정부는 북한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에 대해 조사를 해달라고 했을 뿐 정식 의제로 삼지는 않았다. 그러다 1997년, 요코다 메구미(横田めぐみ) 부모를 비롯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가족들이 모여 '가족연락회'를 만들어 납치 문제를 호소하면서 납치자 문제에 대한 일본 국내 여론은 뜨겁게 고조되기 시작했다.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는 200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사상 첫 북일정상회담의 핫 이슈가 됐다. 이 정상회담에서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는 북한에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를 표명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고 사죄했다.
당시 북한은 일본 정부가 생존 확인을 요구한 정부 인정 피해자 13명에 대해 메구미를 포함한 8명은 사망했고 4명은 생존해 있으며, 1명은 북한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이때 일본이 조사를 의뢰하지 않은 소가 히토미(曽我ひとみ)에 대해서는 북한이 스스로 납치를 인정하고 생존도 확인해줬다.
이와 함께 북일 양국은 국교정상화 협상을 재개하는데 합의하고 과거청산 및 경제협력 등의 내용을 담은 `평양선언'을 내놓았다. 2002년 고이즈미 당시 총리와 함께 방북했던 아베 당시 관방 부(副)장관은 납치에 대해 김 위원장의 사과가 없으면 평양선언에 서명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후에 알려져 일약 스타가 됐다. 이때부터 '납치의 아베'로 불린 그는 2006년 52세로 전후 최연소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북한은 제1차 북일정상회담 때 생존을 확인해준 5명을 2002년 10월 15일 일본에 일시 귀국시켰다. 그런데 피해자 5명이 북한으로 돌아가기 전에 평양을 방문한 일본 정부의 납치문제 조사팀이 가지고 온 유골 및 사망 확인서에 문제점이 발견됐다. 특히 피해자 중 한 명인 마츠키 가오루(松木薫)의 유골은 다른 사람의 것으로 확인됐다.
아베 당시 관방 부장관은 일시귀국한 피해자들을 북한에 다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일본 언론들도 납치문제를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며 호응했다. 결국 일본 정부는 2002년 10월 24일 일시 귀국한 피해자들을 북한에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5일 뒤인 29일에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12회 북일 국교정상화 협상에서 북한이 보낸 사망 증거에 대해 150개 항목에 이르는 의문점을 제시하며 북한을 압박했다. 결국 북일 양국은 평양선언에 서명까지 하고는 납치문제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북한의 납치 피해자 유골 조작 문제 등으로 양측 관계가 악화된 가운데 2004년 5월 고이즈미 총리가 다시 평양을 방문하면서 협상의 돌파구가 열리는 듯했다. 이때 북한은 이미 귀국시켰던 피해자들의 가족들도 일본으로 돌려보내기로 하는 한편, 사망했다고 한 납치 피해자 8명에 대해서도 재조사를 실시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후 6개월 뒤인 2004년 11월 평양을 방문한 일본 정부 실무팀에 북한이 보낸 메구미 유골에서도 다른 사람의 DNA가 검출되면서 일본 여론은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결국 이후 양측은 여러 차례 실무협의를 가졌지만 북한은 "납치문제는 다 해결됐고, 생존자는 다 귀국시켰다”고 주장했고, 일본은 "제대로 된 정보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까지 겹치면서 전혀 진전이 없던 북일 양국은 2014년 5월 스웨덴에서 만나 납치자 문제를 다시 재조사하기로 합의했다. 이른바 '스톡홀름 합의'다. 일본 정부는 이때 대북제재의 일부를 해제해주기로 했고 북한은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납치 문제를 재조사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북한이 2016년 2월 제4차 핵실험을 감행하자 일본은 독자 대북제재를 강화하는 등 대북 압력 노선을 본격화했고 북한도 특별조사위원회의 해체를 선언해 스톡홀름 합의도 흐지부지돼 오늘에 이르렀다.
아베 총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에 납치 문제를 제기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지만, 북한은 "일본인 납치자 문제는 다 해결됐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 하고 있다. 납치 문제의 진전 없이는 북일관계가 한발짝도 나아가기 어려운 국면이고, 반대로 양국관계의 개선에 따라 납치 문제도 풀려갈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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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일정상회담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납치문제에 대한 진전이 필요하다. 납치문제는 북일관계의 심장에 박힌 가시와 같은 존재다.
특히 ‘납치 아베’로 불릴 정도로 납치 문제를 자신의 평생 과업으로 생각해 온 아베 총리로서는 납치 피해자 문제에 대한 가시적 성과없이 북일정상회담을 갖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렵다. 2012년 12월 다시 정권을 잡은 아베 총리가 가장 먼저 한 일도 모든 국무대신들로 구성되는 납치문제대책본부를 설치하는 일이었다. 본부장은 총리, 부본부장은 납치문제담당 장관, 관방 장관, 외무상이 맡았다.
일본 정부가 북한에 납치문제를 처음 제기한 것은 1991년부터 시작된 북한과의 수교 협상에서였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일본 정부는 북한에 다구치 야에코(田口八重子)에 대해 조사를 해달라고 했을 뿐 정식 의제로 삼지는 않았다. 그러다 1997년, 요코다 메구미(横田めぐみ) 부모를 비롯한 일본인 납치 피해자 가족들이 모여 '가족연락회'를 만들어 납치 문제를 호소하면서 납치자 문제에 대한 일본 국내 여론은 뜨겁게 고조되기 시작했다.
일본인 납치 피해자 문제는 2002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사상 첫 북일정상회담의 핫 이슈가 됐다. 이 정상회담에서 당시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郎) 총리는 북한에 식민지 지배에 대한 사과를 표명했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일본인 납치를 인정하고 사죄했다.
당시 북한은 일본 정부가 생존 확인을 요구한 정부 인정 피해자 13명에 대해 메구미를 포함한 8명은 사망했고 4명은 생존해 있으며, 1명은 북한에 들어온 적이 없다는 대답을 내놓았다. 이때 일본이 조사를 의뢰하지 않은 소가 히토미(曽我ひとみ)에 대해서는 북한이 스스로 납치를 인정하고 생존도 확인해줬다.
이와 함께 북일 양국은 국교정상화 협상을 재개하는데 합의하고 과거청산 및 경제협력 등의 내용을 담은 `평양선언'을 내놓았다. 2002년 고이즈미 당시 총리와 함께 방북했던 아베 당시 관방 부(副)장관은 납치에 대해 김 위원장의 사과가 없으면 평양선언에 서명을 보류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 후에 알려져 일약 스타가 됐다. 이때부터 '납치의 아베'로 불린 그는 2006년 52세로 전후 최연소 총리의 자리에 올랐다.
북한은 제1차 북일정상회담 때 생존을 확인해준 5명을 2002년 10월 15일 일본에 일시 귀국시켰다. 그런데 피해자 5명이 북한으로 돌아가기 전에 평양을 방문한 일본 정부의 납치문제 조사팀이 가지고 온 유골 및 사망 확인서에 문제점이 발견됐다. 특히 피해자 중 한 명인 마츠키 가오루(松木薫)의 유골은 다른 사람의 것으로 확인됐다.
아베 당시 관방 부장관은 일시귀국한 피해자들을 북한에 다시 돌려보내서는 안 된다고 주장했다. 일본 언론들도 납치문제를 철저히 규명해야 한다며 호응했다. 결국 일본 정부는 2002년 10월 24일 일시 귀국한 피해자들을 북한에 돌려보내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그리고 일본 정부는 5일 뒤인 29일에는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제12회 북일 국교정상화 협상에서 북한이 보낸 사망 증거에 대해 150개 항목에 이르는 의문점을 제시하며 북한을 압박했다. 결국 북일 양국은 평양선언에 서명까지 하고는 납치문제에 발목이 잡히고 말았다.
북한의 납치 피해자 유골 조작 문제 등으로 양측 관계가 악화된 가운데 2004년 5월 고이즈미 총리가 다시 평양을 방문하면서 협상의 돌파구가 열리는 듯했다. 이때 북한은 이미 귀국시켰던 피해자들의 가족들도 일본으로 돌려보내기로 하는 한편, 사망했다고 한 납치 피해자 8명에 대해서도 재조사를 실시하기로 약속했다.
하지만 이후 6개월 뒤인 2004년 11월 평양을 방문한 일본 정부 실무팀에 북한이 보낸 메구미 유골에서도 다른 사람의 DNA가 검출되면서 일본 여론은 다시 들끓기 시작했다. 결국 이후 양측은 여러 차례 실무협의를 가졌지만 북한은 "납치문제는 다 해결됐고, 생존자는 다 귀국시켰다”고 주장했고, 일본은 "제대로 된 정보를 내놓으라"고 요구했다.
북한의 핵미사일 문제까지 겹치면서 전혀 진전이 없던 북일 양국은 2014년 5월 스웨덴에서 만나 납치자 문제를 다시 재조사하기로 합의했다. 이른바 '스톡홀름 합의'다. 일본 정부는 이때 대북제재의 일부를 해제해주기로 했고 북한은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해 납치 문제를 재조사하겠다고 나섰다.
하지만 북한이 2016년 2월 제4차 핵실험을 감행하자 일본은 독자 대북제재를 강화하는 등 대북 압력 노선을 본격화했고 북한도 특별조사위원회의 해체를 선언해 스톡홀름 합의도 흐지부지돼 오늘에 이르렀다.
아베 총리는 문재인 대통령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기회 있을 때마다 북한에 납치 문제를 제기해 달라고 부탁하고 있지만, 북한은 "일본인 납치자 문제는 다 해결됐다"는 기존 입장을 되풀이 하고 있다. 납치 문제의 진전 없이는 북일관계가 한발짝도 나아가기 어려운 국면이고, 반대로 양국관계의 개선에 따라 납치 문제도 풀려갈 가능성이 없지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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