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지난 1일 99주년 3·1절을 맞아 충북 충주시문화회관에서 열린 '3·1운동 기념 공연 100년의 재회' 연극에서 충주 출신 독립운동가들이 참여한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소개되고 있다. 2018.03.04. [email protected]
【충주=뉴시스】강신욱 기자 = 3·1만세운동이 전국 방방곡곡에 들불처럼 번지고 4월에는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설립됐다.
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 지원단체로 6월에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조직됐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에 국내 상황 통보, 독립운동자금 모집·전달, 인쇄물 작성·반포, 독립 여론 조성 등의 임무를 맡았다.
4일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에 따르면 청년외교단 규모가 600명이라는 일제의 기록('조선민족운동연감')도 있지만, 재판 판결문이나 기타 자료에는 30명 정도가 확인된다.
박 교수는 "단원은 30대 약간 명과 20대 청년이 거의 주축을 이룬다"며 "출신지로는 충북 충주와 괴산(증평) 출신 인물이 가장 많다"고 밝혔다.
이병철, 정낙윤, 정석희(정태희), 류흥식(류자명), 류흥환, 윤우영(이상 충주), 김태규(괴산), 연병호(증평) 등이 충북 출신이다.
청년외교단은 서울에 중앙부를, 대전과 회령(함북), 충주에 지부를 각각 뒀고, 상하이에 국외 지부를 설치했다.
이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 지원단체로 6월에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조직됐다.
청년외교단은 임시정부에 국내 상황 통보, 독립운동자금 모집·전달, 인쇄물 작성·반포, 독립 여론 조성 등의 임무를 맡았다.
4일 충북대 사학과 박걸순 교수에 따르면 청년외교단 규모가 600명이라는 일제의 기록('조선민족운동연감')도 있지만, 재판 판결문이나 기타 자료에는 30명 정도가 확인된다.
박 교수는 "단원은 30대 약간 명과 20대 청년이 거의 주축을 이룬다"며 "출신지로는 충북 충주와 괴산(증평) 출신 인물이 가장 많다"고 밝혔다.
이병철, 정낙윤, 정석희(정태희), 류흥식(류자명), 류흥환, 윤우영(이상 충주), 김태규(괴산), 연병호(증평) 등이 충북 출신이다.
청년외교단은 서울에 중앙부를, 대전과 회령(함북), 충주에 지부를 각각 뒀고, 상하이에 국외 지부를 설치했다.

【충주=뉴시스】1920년 6월 대구지방법원의 대한민국청년외교단 이병철·안재홍·조용주·연병호 판결문. (출처='의열투쟁의 이론을 정립하고 실천한 류자명') [email protected]
중앙부 총무에 이병철, 재무부장에 김태규, 외교원에 연병호, 류자명, 특별단원에 정낙윤, 충주지부장에 윤우영 등 충북 출신이 청년외교단의 중심을 이뤘다.
류자명은 회억록에서 청년외교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대표단을 지원하고자 조직했고, 자신이 이병철, 김태규, 조용주와 함께 조직했다고 밝혔다.
비영리단체 '아이들의 하늘' 김희찬 간사는 "교현초 4회와 8회 졸업색인 류흥식과 류흥환은 같은 항렬의 집안이고, 교현초 10회 졸업생인 정태희는 정낙윤보다 한 항렬 아래의 집안 관계"라며 "이병철은 류자명의 외사촌 자형인 정운익의 매제이고, 윤우영은 정운익의 고종사촌 형이며, 김태규는 류자명의 처인 이난영과 같은 고향(괴산 소수) 사람"이라고 이들 인물의 인맥을 강조했다.
박 교수는 "청년외교단 중심 인사들은 (1919년) 10월 초 청년외교단 조직을 확대·개편하기로 하고 배달청년단으로 개칭하기로 했다"며 "청년외교단과 비슷한 성격의 활동을 펴는 각 독립운동 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으나, 실천에 옮기기 직전 11월 말 일제에 발각됐다"고 설명했다.
[email protected]
류자명은 회억록에서 청년외교단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대표단을 지원하고자 조직했고, 자신이 이병철, 김태규, 조용주와 함께 조직했다고 밝혔다.
비영리단체 '아이들의 하늘' 김희찬 간사는 "교현초 4회와 8회 졸업색인 류흥식과 류흥환은 같은 항렬의 집안이고, 교현초 10회 졸업생인 정태희는 정낙윤보다 한 항렬 아래의 집안 관계"라며 "이병철은 류자명의 외사촌 자형인 정운익의 매제이고, 윤우영은 정운익의 고종사촌 형이며, 김태규는 류자명의 처인 이난영과 같은 고향(괴산 소수) 사람"이라고 이들 인물의 인맥을 강조했다.
박 교수는 "청년외교단 중심 인사들은 (1919년) 10월 초 청년외교단 조직을 확대·개편하기로 하고 배달청년단으로 개칭하기로 했다"며 "청년외교단과 비슷한 성격의 활동을 펴는 각 독립운동 단체들을 하나로 통합하는 것이 기본 방침이었으나, 실천에 옮기기 직전 11월 말 일제에 발각됐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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