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88올림픽 30주년, 올림픽 전후 서울 비교. 자료:서울시
【서울=뉴시스】손대선 기자 = 서울역사박물관은 서울올림픽 30주년을 맞아 올림픽을 기점으로 세계적인 도시로 성장한 서울의 변화상을 조명한 '서울기획연구2 – 88서울올림픽 서울을 어떻게 변화시켰는가'를 2일 발간했다.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김정빈 교수가 주축이 돼 찾은 당시 올림픽 준비상황과 관련된 문서와 기록물에 담긴 얘기를 짚어봤다.
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1981년 867만 명이었던 서울인구는 올림픽을 치른 직인 1989년에는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예산규모는 2조 원 넘게(1조32억 원→3조5585억 원) 확대됐다. 도시정비사업이 급물살을 타면서 도심재개발 지구는 4.5배(21개→93개), 아파트 건립도 1.8배(1만7060가구→3만802가구) 증가했고, 1개 노선(9.5km)에 불과했던 지하철은 4개(115.3km), 공원은 1578개(188.44㎢)에서 2190개(240.89㎢)로 각각 늘어 도시경관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1970년대 강남의 확장으로 서울의 중심은 한강으로 재편됐다. 1980년대 한강은 서울을 강남·북으로 가르는 경계가 아닌, 시민들의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1982년~86년까지 진행된 한강종합개발사업은 한강의 수질을 개선하고, 수로 폭을 확보해 유람선의 운항을 원활하게 하는 한편, 고수 부지 일대를 시민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이 핵심 사업이었다. 그 결과 88서울올림픽의 개막을 알리는 강상제(江上祭)가 한강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강 주변의 도로를 확보해 올림픽도로와 강변도로를 확충하고 서울 동서간의 흐름을 원활히 하고, 김포공항에서부터 잠실 올림픽경기장까지의 교통이 한 번에 이루어지도록 했다.
1981년 올림픽 유치가 결정되면서 서울 도심 곳곳의 판자촌과 노후화된 건물들이 골칫덩어리였다. 이에 서울시는 올림픽 개최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주요 가시권 위주의 도시 정비를 추진했다.
1970년대 일부 진행된 도심재개발 사업이 급물살을 타 93개 지구의 도심재개발이 시행됐다. 특히 김포공항에서 여의도를 거쳐 도심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귀빈로(마포로) 등 주요 간선도로변과 도심 중요 지역에서 재개발이 이루어졌다. 또한 불량주택재개발사업이 1983년부터 합동재개발 방식으로 활성화됨에 따라 박차를 가해 1985년에는 9개에서 32개 재개발 구역으로 확대됐다.
88서울올림픽의 특수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어 냈다. 이러한 변화는 여가문화의 활성화, 대중문화의 성장 등 서울시민 삶 전반을 바꿔놓았다.
올림픽 체육 열풍은 야구(1982년 프로야구 출범), 씨름(1983년 천하장사 씨름대회) 등 프로스포츠의 창설로 이어졌고, 직장체육인대회, 학생체육, 생활체육 등 시민생활 전반에 체육여가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경제적 풍요는 소비 확산으로 이어져 부의 상징이었던 자동차가 생활에 주요역할을 담당하는 생필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마이카(My Car)' 시대를 열었다.
88서울올림픽대회의 방송을 주관하는 기구인 국제방송센터(IBC)가 여의도에 세워져 각종 특수 방송시설들이 마련돼 88서울올림픽의 경기를 전 세계에 방송하였다. 더불어 국내 TV, VTR 시장이 성장하해1981년 가구당 TV 보급률은 1981년 0.18에서 1989년 1.04로 크게 증가했다.
[email protected]
서울시립대 도시공학과 김정빈 교수가 주축이 돼 찾은 당시 올림픽 준비상황과 관련된 문서와 기록물에 담긴 얘기를 짚어봤다.
올림픽 유치가 결정된 1981년 867만 명이었던 서울인구는 올림픽을 치른 직인 1989년에는 1000만 명을 돌파했다. 예산규모는 2조 원 넘게(1조32억 원→3조5585억 원) 확대됐다. 도시정비사업이 급물살을 타면서 도심재개발 지구는 4.5배(21개→93개), 아파트 건립도 1.8배(1만7060가구→3만802가구) 증가했고, 1개 노선(9.5km)에 불과했던 지하철은 4개(115.3km), 공원은 1578개(188.44㎢)에서 2190개(240.89㎢)로 각각 늘어 도시경관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1970년대 강남의 확장으로 서울의 중심은 한강으로 재편됐다. 1980년대 한강은 서울을 강남·북으로 가르는 경계가 아닌, 시민들의 공간으로 재탄생했다.
1982년~86년까지 진행된 한강종합개발사업은 한강의 수질을 개선하고, 수로 폭을 확보해 유람선의 운항을 원활하게 하는 한편, 고수 부지 일대를 시민공원으로 조성하는 것이 핵심 사업이었다. 그 결과 88서울올림픽의 개막을 알리는 강상제(江上祭)가 한강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
한강 주변의 도로를 확보해 올림픽도로와 강변도로를 확충하고 서울 동서간의 흐름을 원활히 하고, 김포공항에서부터 잠실 올림픽경기장까지의 교통이 한 번에 이루어지도록 했다.
1981년 올림픽 유치가 결정되면서 서울 도심 곳곳의 판자촌과 노후화된 건물들이 골칫덩어리였다. 이에 서울시는 올림픽 개최도시의 모습을 갖추기 위해 주요 가시권 위주의 도시 정비를 추진했다.
1970년대 일부 진행된 도심재개발 사업이 급물살을 타 93개 지구의 도심재개발이 시행됐다. 특히 김포공항에서 여의도를 거쳐 도심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있는 귀빈로(마포로) 등 주요 간선도로변과 도심 중요 지역에서 재개발이 이루어졌다. 또한 불량주택재개발사업이 1983년부터 합동재개발 방식으로 활성화됨에 따라 박차를 가해 1985년에는 9개에서 32개 재개발 구역으로 확대됐다.
88서울올림픽의 특수는 한국의 경제성장을 이끌어 냈다. 이러한 변화는 여가문화의 활성화, 대중문화의 성장 등 서울시민 삶 전반을 바꿔놓았다.
올림픽 체육 열풍은 야구(1982년 프로야구 출범), 씨름(1983년 천하장사 씨름대회) 등 프로스포츠의 창설로 이어졌고, 직장체육인대회, 학생체육, 생활체육 등 시민생활 전반에 체육여가문화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경제적 풍요는 소비 확산으로 이어져 부의 상징이었던 자동차가 생활에 주요역할을 담당하는 생필품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고 어디든 자유롭게 여행과 여가를 즐길 수 있는 '마이카(My Car)' 시대를 열었다.
88서울올림픽대회의 방송을 주관하는 기구인 국제방송센터(IBC)가 여의도에 세워져 각종 특수 방송시설들이 마련돼 88서울올림픽의 경기를 전 세계에 방송하였다. 더불어 국내 TV, VTR 시장이 성장하해1981년 가구당 TV 보급률은 1981년 0.18에서 1989년 1.04로 크게 증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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