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 황병기, 가야금 명인. 2018.01.31. (사진 = 뉴시스 DB) [email protected]
【서울=뉴시스】 이재훈 기자 = 31일 별세한 가야금 명인 황병기(82·이화여대 명예교수)는 우리음악계의 전무후무한 예술가로 통한다. 탁월한 연주력을 뽐낸 건 물론 가야금 창작곡을 개척한 주인공이다.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 동란 피란시절인 중학교 3학년 때 1951년 부산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운 황병기는 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법대 3학년 재학 중 KBS에서 주최하는 전국대회에 나가 1등을 하며 국악 재능을 알렸다. 1950년대 당시에는 국악과가 없었기 때문에 법을 공부했다. 서울대 음대가 생긴 건 1959년이었다.
음악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황병기는 1960년대 극장 지배인, 출판사, 화학공장 기획관리 등의 일을 했다.
1970년대 한양대, 이화여대 등에 국악과가 생기면서 국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로 결심했다. 1974년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하며 음악을 전업으로 삼았다.
1962년 서정주의 시에 곡을 붙인 '국화 옆에서'를 통해 가야금 연주자로 첫 발을 내디뎠다. 같은 해 한국 최초의 가야금 현대곡으로 통하는 '숲'을 창작했다.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나 6·25 동란 피란시절인 중학교 3학년 때 1951년 부산 국립국악원에서 가야금을 배운 황병기는 서울대 법과대학을 졸업했다.
법대 3학년 재학 중 KBS에서 주최하는 전국대회에 나가 1등을 하며 국악 재능을 알렸다. 1950년대 당시에는 국악과가 없었기 때문에 법을 공부했다. 서울대 음대가 생긴 건 1959년이었다.
음악만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 힘들다고 생각했던 황병기는 1960년대 극장 지배인, 출판사, 화학공장 기획관리 등의 일을 했다.
1970년대 한양대, 이화여대 등에 국악과가 생기면서 국악으로 생계를 꾸려나가기로 결심했다. 1974년 이화여대 교수로 부임하며 음악을 전업으로 삼았다.
1962년 서정주의 시에 곡을 붙인 '국화 옆에서'를 통해 가야금 연주자로 첫 발을 내디뎠다. 같은 해 한국 최초의 가야금 현대곡으로 통하는 '숲'을 창작했다.

【서울=뉴시스】 황병기, 가야금 명인. 2018.01.31. (사진 = 뉴시스 DB) [email protected]
'숲' 이후 왕성한 창작 활동과 다양한 음악적 실험으로 이름을 드높였다. 해외에서도 주목 받았다. 특히 1964년 국립국악원의 첫 해외 진출이기도 했던 요미우리 신문사 초청 일본 순회공연에서 가야금 독주자로 참여해 호평 받았다.
1965년 하와이에서 열린 '20세기음악예술제' 연주를 시작으로 뉴욕 카네기홀을 비롯해 세계의 주요 공연장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다.
창작음악 중에서는 1974년 신라 음악을 되살린 '침향무'가 대표작으로 통한다. 불교 음악인 범패의 음계를 바탕으로 동양과 서양의 공통된 원시 정서를 표현한 작품이다.
윤중강 국악평론가는 "'침향무'는 서울과 도쿄, 뉴욕, 파리, 런던 등 세계의 주요 도시에서 황병기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연주가 됐다"면서 "클래식 외에 세계에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곡이다. 한국음악의 상징으로 아시아권은 물론 유럽과 미국에서 현대음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라고 전했다.
1965년 하와이에서 열린 '20세기음악예술제' 연주를 시작으로 뉴욕 카네기홀을 비롯해 세계의 주요 공연장에서 활발한 연주 활동을 펼쳤다.
창작음악 중에서는 1974년 신라 음악을 되살린 '침향무'가 대표작으로 통한다. 불교 음악인 범패의 음계를 바탕으로 동양과 서양의 공통된 원시 정서를 표현한 작품이다.
윤중강 국악평론가는 "'침향무'는 서울과 도쿄, 뉴욕, 파리, 런던 등 세계의 주요 도시에서 황병기와 그의 제자들에 의해 연주가 됐다"면서 "클래식 외에 세계에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곡이다. 한국음악의 상징으로 아시아권은 물론 유럽과 미국에서 현대음악 중 가장 널리 알려진 곡"이라고 전했다.

【서울=뉴시스】 황병기, 가야금 명인. 2018.01.31. (사진 = 뉴시스 DB) [email protected]
윤 평론가는 황병기에 대해 현대음악 작곡가 윤이상에 버금가는 작곡가라면서 "클래식음악계에는 여러 유명한 작곡가가 많지만 민족음악 분야에서는 (인도의 싯타르 연주자인) 라비 샹카와 함께 대표적인 음악가"라고 말했다.
이와 함께 1975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초연한 '미궁' 역시 황병기의 대표작으로 통한다. '미궁'은 첼로 활과 술대(거문고 연주막대) 등으로 가야금을 두드리듯 연주하고 무용인 홍신자의 절규하는 목소리를 덧입은 파격 형식의 곡이었다. 2000년대 들어 미궁 관련 괴소문이 퍼지면서 젊은 층에서 관심을 가졌다. 2001년 발매된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에서 메인 BGM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황병기 전문가인 김희선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은 "황병기 선생님은 항상 동시대의 음악과 예술에 관심을 뒀다"면서 "국악을 전통 안에만 가두지 않고 동시대의 음악과 예술의 당대 경향을 녹여냈다"고 전했다.
2014년 '정남희제(制) 황병기류(流) 가야금 산조' 음반을 내고, 지난해 '광화문'을 작곡했고 그해 9월 인천 엘림아트센터 엘림홀에서 가곡(歌曲) 콘서트 '황병기 가곡의 밤', 롯데콘서트홀에서 '국악시리즈 II – 국립국악관현악단'을 펼치는 등 말년까지 활발한 연주 활동을 보였다.
윤중강 평론가에 따르면 황병기의 마지막 공연은 지난해 12월27일 경기 고양 소재 명지병원 뉴호라이즌힐링센터에서 열린 '가야금 명인 황병기 초청 뉴힐 하우스콘서트'였다.
이와 함께 1975년 명동 국립극장에서 초연한 '미궁' 역시 황병기의 대표작으로 통한다. '미궁'은 첼로 활과 술대(거문고 연주막대) 등으로 가야금을 두드리듯 연주하고 무용인 홍신자의 절규하는 목소리를 덧입은 파격 형식의 곡이었다. 2000년대 들어 미궁 관련 괴소문이 퍼지면서 젊은 층에서 관심을 가졌다. 2001년 발매된 '화이트데이: 학교라는 이름의 미궁'에서 메인 BGM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황병기 전문가인 김희선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은 "황병기 선생님은 항상 동시대의 음악과 예술에 관심을 뒀다"면서 "국악을 전통 안에만 가두지 않고 동시대의 음악과 예술의 당대 경향을 녹여냈다"고 전했다.
2014년 '정남희제(制) 황병기류(流) 가야금 산조' 음반을 내고, 지난해 '광화문'을 작곡했고 그해 9월 인천 엘림아트센터 엘림홀에서 가곡(歌曲) 콘서트 '황병기 가곡의 밤', 롯데콘서트홀에서 '국악시리즈 II – 국립국악관현악단'을 펼치는 등 말년까지 활발한 연주 활동을 보였다.
윤중강 평론가에 따르면 황병기의 마지막 공연은 지난해 12월27일 경기 고양 소재 명지병원 뉴호라이즌힐링센터에서 열린 '가야금 명인 황병기 초청 뉴힐 하우스콘서트'였다.

【서울=뉴시스】 황병기, 가야금 명인. 2018.01.31. (사진 = 롯데콘서트홀) [email protected]
평소 위트가 많던 황병기는 이날 무대까지만 해도 건강한 모습으로 재치를 뽐냈다. 황 병기는 그달 뇌졸중 치료를 받은 이후 합병증으로 폐렴을 앓은 것으로 알려졌다.
윤 평론가는 "당시까지만 해도 건강하셨다. 평소 지식과 정보, 위트가 많은 분이셨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면서 "음악평론가인 이소영 명지병원예술치유센터장이 사회를 보고, 제가 패널로 참여했는데 굉장히 음악 공력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손가락이 안 돌아간다고 농을 하시고 하셨다"고 전했다.
당시 공식적으로 마지막 말도 남겼다. 윤 평론가는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렸더니,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이 이상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 테니 잘 살아라'라고 하셨다"면서 "공식적인 마지막말까지 의미심장했다"고 전했다.
남북 교류에도 상징적인 예술가였다. 1990년 북한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에 공식 초청을 받았고 같은 해 송년통일음악회 집행위원장으로 일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지냈으며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있었다.
대한민국국악상, 방일영국악상, 호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후쿠오카아시아문화상 대상, 만해문예대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가야금 선율에 흐르는 자유와 창조 - 황병기의 삶과 예술 세계'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논어 백가락' 등을 펴냈다.
윤 평론가는 "당시까지만 해도 건강하셨다. 평소 지식과 정보, 위트가 많은 분이셨는데 그날도 마찬가지였다"면서 "음악평론가인 이소영 명지병원예술치유센터장이 사회를 보고, 제가 패널로 참여했는데 굉장히 음악 공력이 있다고 말씀을 드렸더니 손가락이 안 돌아간다고 농을 하시고 하셨다"고 전했다.
당시 공식적으로 마지막 말도 남겼다. 윤 평론가는 "끝으로 한 말씀 부탁드렸더니, '나이 든 사람들이 젊은 사람들에게 '이래라 저래라'하는 것이 이상하다. 나는 입을 꾹 다물 테니 잘 살아라'라고 하셨다"면서 "공식적인 마지막말까지 의미심장했다"고 전했다.
남북 교류에도 상징적인 예술가였다. 1990년 북한 평양에서 열린 범민족통일음악회에 공식 초청을 받았고 같은 해 송년통일음악회 집행위원장으로 일했다. 2006년부터 2011년까지 국립국악관현악단 예술감독을 지냈으며 이화여대 명예교수와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으로 있었다.
대한민국국악상, 방일영국악상, 호암상, 대한민국예술원상, 후쿠오카아시아문화상 대상, 만해문예대상 등을 받았다. 저서로는 '깊은 밤, 그 가야금 소리' '가야금 선율에 흐르는 자유와 창조 - 황병기의 삶과 예술 세계' '가야금 명인 황병기의 논어 백가락' 등을 펴냈다.

【서울=뉴시스】 황병기, 가야금 명인. 2018.01.31. (사진 = 롯데콘서트홀 제공) [email protected]
김희선 국립국악원 국악연구실장은 "황병기 선생님은 창작국악의 길과 국악의 세계화를 열어주셨다"면서 "국악계에서 남이 가지 않은 길을 여는 개척자의 역할을 하셨다. 특히 전통 안에만 남아 있던 국악을 동시대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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