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여관 주인과 어떤 남자 싸우는 소리에 잠깨"
"1층에서 검은 연기 가득 올라와 2층에서 뛰어내려"
착지 때 충격으로 발목과 허리 골절상…입원 치료 중
"휴대폰도 못 챙기고 직장 동료 깨울 경황도 없었다"
"방 하나 월 45만원에 직장도 가까워 1년 넘게 투숙"
【서울=뉴시스】채윤태 기자 = 10명의 사상자를 낸 '종로 여관 방화 사건'에서 가까스로 생존한 최모(53)씨가 화재 당시 '경보벨'도 울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20일 새벽 3시께 불이 난 것을 알아채고 서울장여관 2층에서 뛰어내려 목숨을 구한 최씨는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건물 벽에 경보벨이 붙어있었다. 그런데 화재가 발생했는데도 안 울렸다"고 밝혔다.
최씨는 이날 오전 2시50분께 여관업주 김모(71·여)씨가 투숙을 위해 찾아온 어떤 남자와 말다툼을 하는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깼다.
이후 최씨는 오전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에 김씨가 "불이야"라고 소리치는 것을 들었다. 그 소리에 놀라 둘러보니 최씨가 묵고 있는 205호에 검은 연기가 가득 밀려들고 있었다.
연기가 들어오고 30초 가량 지나 방 안의 전등이 모두 꺼졌다.
최씨는 이 연기가 1층에서 올라오고 있다고 판단해 무리해서 계단으로 내려가기보다는 창밖으로 뛰어내려야겠다고 결심했다. 2층이라 일순 망설였지만 목숨이 경각에 달린 상황이라 창문 밖으로 그냥 뛰어내린 것이다.
최씨는 이 때의 충격으로 발목과 허리에 골절상을 입어 입원 치료를 받고 있다.
최씨는 "핸드폰, 옷, 지갑 등 소지품을 못 챙기고 청바지와 여름 티셔츠 하나 입고 창문 넘어 나왔다"며 "1층에 머물던 직장 동료 박모(58)씨를 깨울 경황도 없었다"고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전했다. 동료 박씨는 기도와 안면부 등에 화상을 입어 현재 한 서울 대형병원 중환자실에서 치료 중이다.
최씨는 청계천 한 맞춤 정장 가게에서 미싱 보조(시다) 일을 하며 이 여관에 장기투숙을 하고 있다고 한다. 최씨는 "이 방은 한 달에 45만원인데다가 직장도 가까워서 혼자 1년 넘게 살고 있다"고 설명했다.
이날 오전 3시께 중국집 배달원 유모(52)씨가 술에 취한 채 서울장여관을 찾아 "여자를 불러달라"며 성매매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하자 홧김에 불을 질러 투숙객 5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했다.
서울장 여관 객실은 총 8개로, 한 방이 6.6~10㎡(2~3평) 정도 크기의 노후한 여관이다. 각 객실에는 작은 침상과 욕실이 달려있다. 인근 주민들은 "저렴한 쪽방"이라고 입을 모았다.
경찰 조사에 따르면 남성 투숙객 중 2명은 2년 전부터 묵고 있었으며, 또 한 남성은 3일 전에 장기 투숙을 위해 들어왔다. 장기투숙을 하면 저렴한 월세로 방을 내주기 때문에 주로 저소득층 노동자들이 이 같은 형태의 여관을 찾는 것으로 알려졌다.
최씨를 제외한 다른 부상자들은 신원을 확인하기 힘들 정도로 중상을 입은 상태다. 경찰은 "시신이 불에 탔고 부상자들 역시 화상이 심각해 말을 하지 못하고 있다"고 전했다.
"건물이 타고 있다"는 여관업주 김씨의 신고를 받은 경찰은 "내가 불을 질렀다"고 112에 직접 신고한 유씨를 여관 인근에서 현행범 체포했다.
경찰은 유씨를 상대로 현존건조물방화치사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할 방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