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가포르 연출가 옹켕센 "판소리, 언어 장벽 넘는 호소력 가져"

기사등록 2017/09/10 10:27:29

【싱가포르=뉴시스】 옹켕센 연출.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싱가포르=뉴시스】 옹켕센 연출.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싱가포르=뉴시스】 이재훈 기자 = 국립극장(극장장 안호상) 전속단체 국립창극단(예술감독 김성녀)의 '트로이의 여인들'이 지난 7~9일 싱가포르 빅토리아 시어터에서 3일간 전석 매진돼 약 1500명을 불러 모았다.

싱가포르예술축제(SIFA·Singapore International Festival of Arts)의 초청작으로 이 축제의 예술감독인 옹켕센이 연출했다.

지난해 11월 한국에서 이미 이 작품을 성공적으로 초연한 옹켕센 연출이 한국 전통음악을 처음 접한 건 1998년이다. 당시 '플라잉 서커스 프로젝트' 리서치를 위해 한국을 처음 방문했다.

처음부터 운이 좋았다. 가야금 명인 황병기가 그에게 한국 음악을 소개시켜준 것이다. '국악계의 혁신 아이콘' 원일이 이끄는 국악그룹 '푸리'의 가객 강권순을 만났고 지금은 고인이 된 문화기획자 강준혁과 함께 남도지방을 여행하면서 사물놀이와 만신 김금화의 굿판을 접했다.

무엇보다 명창 안숙선이 출연한 임진택 연출의 국립창극단 '춘향전'을 보게 된 것이 큰 행운이었다. 안 명창은 이번 '트로이의 여인들'에 작창으로 참여했다.

8일 싱가포르 호텔에서 만난 옹켕센 연출은 '트로이의 여인들'에 대해 "한국인이 가진 위엄을 보여주는 것 같다"고 여겼다.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역시 가장 중요했던 것 역시 여인들의 위엄이었다.

작품은 헤큐바(김금미), 카산드라(이소연), 안드로마케(김지숙), 헬레네(김준수)로 대표되는 네 명의 여인들이 벼랑 끝에서 선택하는 각기 다른 감정과 삶의 방식에 가슴이 덜컹 내려앉게 한다.

옹켕센 연출은 "저주 받은 운명 앞에 남겨진 것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도, 여인들이 갖고자 한 존엄성과 용기 그리고 남아 있는 위엄을 그리고자 했다"고 설명했다.

"판소리는 이런 부분을 보여주는데 최적화된 장르에요. 존경심을 갖게 될 수밖에 없는 문화죠. 여인들의 운명을 위대하게 보여줄 수 있는 점이 강점인데, 보편적으로 감정에 호소할 수 있는 힘이 있죠. 언어의 장벽을 넘을 수 있는 호소력을 갖고 있어요."

옹켕센 연출은 여기에 '트로이의 여인들'에서 가장 중요한 지점은 '권력을 가진 자와 쥐지 못한 자'에 대한 이야기라는 점이라고 짚었다.

【싱가포르=뉴시스】 옹켕센 연출·안호상 극장장.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싱가포르=뉴시스】 옹켕센 연출·안호상 극장장.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트로이의 여인들' 속 전쟁을 겪는 여인들이 고군분투하는 삶의 모습에서 한국의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이 겹쳐진 이유다. 한국에서 '트로이의 여인들'을 연습하는 8주 동안 주한일본대사관 근처 숙소에서 머물렀던 그는 위안부 소녀상을 지키기 위해 텐트를 치며 노숙하는 대학생들의 모습이 인상 깊었다고 했다. 

다만 한국적인 상황에 맞는 각색에 주안점을 둔건 아니라고 선을 그었다. "한국인의 정수에 다가갈 수 있는 작업이 중요했던 거죠. 한(恨)의 정서, 슬픔과 기쁨을 찾아가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진중하고 무거운 이야기지만 그 안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할 수 있죠."

'한국적 말맛'을 살리는데 일가견이 있는 배삼식 작가(동덕여대 교수)가 에우리피데스 '트로이의 여인들'(기원전 415)과 장 폴 사르트르가 개작한 동명 작품(1965)을 바탕으로 창극을 위한 극본을 다시 썼다.
 
한국에 남아 싱가포르 공연을 응원한 배삼식 작가(동덕여대 문예창작과 교수)는 "'트로이의 여인들'은 판소리의 전통적인 어법에 충실하면서도 현대적인 느낌의 조화가 잘 이뤄진 작품"이라면서 "음악적으로도 싱가포르를 비롯해 우리와 다른 문화권을 가진 관객들도 설득할 수 있는 힘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옹켕센 연출은 "한국작가인 배삼식 작가가 참여하는 것이 이번 작품에서 굉장히 중요했다"면서 "한국의 뿌리에 가까울 수 있는 방식으로 다시 각색하는 작업이 필요했는데 배 작가가 안성맞춤이었다"고 했다.

특히 배 작가는 원작의 강력한 신(神)인 포세이돈과 아테나 대신에 고혼(孤魂·孤는 고(高)와 중의적 표현)을 등장시켰다. 싱가포르 첫 날 공연에서는 안숙선이, 두 번째·세 번째 공연날에는 유태평양이 맡은 역할로, 트로이 여인들의 넋을 위로한다. 한국어로 공연한 이번 싱가포르 공연의 영어 자막에서는 이 배역을 '솔 오브 솔스'(Soul of souls)'로 번역했다.
 
옹켕센 연출은 "오늘날의 사람들은 불교, 기독교 등 각자 종교가 있지만 그리스 시대의 사람들처럼 신들을 믿지는 않는다"면서 "그래서 배 작가와 신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권력을 갖고 있는 이들이 어떻게 인간들을 다루고 통제하는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로 만들기로 했다"고 전했다.

【싱가포르=뉴시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 공연.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photo@newsis.com
【싱가포르=뉴시스】  국립창극단 '트로이의 여인들' 싱가포르 빅토리아 극장 공연. 2017.09.10. (사진 = 국립극장 제공) [email protected]
배 작가 역시 "원작에서 포세이돈과 아테나가 작품의 외부에서 인류에 대해 도덕적인 판단을 위에서 아래로 내리는 존재들이라면 고혼은 그보다는 인간화된 시선"이라면서 "불교를 특정한 것은 아니고, 고혼은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의 길로 인도하는) 관세음보살의 이미지가 강하다"고 했다.

"싸우고 미워하는 세상을 바라보면서 조용히 자비의 눈물을 흘리는 거죠. 마지막에 고혼이 노래하는 우매함과 공허함은 신처럼 꾸짖는 것이 아닌 자애로운 슬픔"이라고 부연했다.

그간 창극의 해외 진출은 유럽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프라이어 연출의 '수궁가' 독일 공연(2013), 고선웅 연출의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프랑스 공연 등이 예다. 특히 '변강쇠 점 찍고 옹녀'의 파리 공연은 현지를 들썩이게 하며 화제가 됐으나 '트로이의 여인들'은 같은 문화권인 아시아에서 공연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유럽에서 공연하는 창극에 어쩔 수 없이 배어있을 수 있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완전히 탈피, 작품으로만 승부를 볼 수 있는 것이다. 때마침 '트로이의 여인들'이 공연되는 빅토리아 극장 바로 옆인 내셔널 갤러리에서는 동남아시아의 근현대를 주제로 한 미술 전시회가 열리고 있었다. 더구나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았던 싱가포르는 다국적 성향이 혼합된 나라라 다양한 문화배경을 지닌 이들에 대한 반응을 확인할 수 있다.

옹켕센 연출도 "'트로이의 여인들'은 그리스와 트로이의 충돌을 통해 한 문화권이 다른 문화권을 파괴하는 걸 보여준다"면서 "고혼이 우매하다고 노래하는 건 문화 간의 경쟁이랑 충동이 재앙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는 걸 보여주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 작품을 싱가포르 국제축제에서 선보이는 것이 중요했다"고 강조했다.

"단순히 한국적인 것만 보여줬다면 덜 만족스러웠을 겁니다. 다양한 문화적인 특성을 가진 싱가포르에서 협업이 된 예술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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싱가포르 연출가 옹켕센 "판소리, 언어 장벽 넘는 호소력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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