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 걸으니 내가 보였다···'천사-유보된 제목'의 마술

기사등록 2017/08/28 09:37:15

【서울=뉴시스】 남산예술센터 '천사 - 유보된 제목'. 2017.08.28. (사진 = 서울문화재단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남산예술센터 '천사 - 유보된 제목'. 2017.08.28. (사진 = 서울문화재단 제공) [email protected]
■남산예술센터 '천사 - 유보된 제목' 프리뷰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캄캄한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 입장하자 B9-1 좌석만 핀조명이 비추고 있다.

자리에 앉자 공연장 내 조명이 환하게 켜진다. 고대 그리스로마극장의 형태와 우리나라 전통놀이의 야외무대 형식을 모두 차용한 극장 객석 400석이 한 눈에 들어온다.

반대편에는 흰색 옷을 입은 소녀가 앉아 있다. 흰 토끼를 따라 굴로 들어간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그 소녀를 따라 남산예술센터 구석구석을 돌아보게 된다.

서울문화재단(대표이사 주철환) 남산예술센터(극장장 우연)가 오는 29일부터 내달 3일까지 아트선재센터와 공동제작한 '천사 - 유보된 제목'(연출 서현석)을 선보인다.

개막전인 27일 오후 미리 경험한 '천사 - 유보된 제목'은 최근 공연계에서 세계적으로 보편화·확산되고 있는 형식 '이머시브 연극(Immersive Theater)'을 떠올리게 했다. 무대와 객석이 사라진 형태로, 일반적으로 관객들이 공연장을 자유롭게 돌아보면서 둘러보거나 참여할 수 있는 작품을 가리킨다.

【서울=뉴시스】 남산예술센터 '천사 - 유보된 제목'. 2017.08.28. (사진 = 서울문화재단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남산예술센터 '천사 - 유보된 제목'. 2017.08.28. (사진 = 서울문화재단 제공) [email protected]
단순 관객 참여가 아닌 극장 공간 자체를 감각하는 의미를 담아야 의미가 있다고 평가 받는다. 60분 동안 홀로 극장을 돌아보는 '천사 - 유보된 제목'은 걷고 느끼고 기억하고 위로 받는 공연으로, 극장을 감각하는 것을 넘어 자신에게 몰입하게 만드는 마술 같은 경험을 선사한다.


출발점은 남산예술센터 앞마당. 임시로 세워진 박스 안에 들어가 지급 받은 MP3 플레이어의 이어폰을 꽂으면,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출발, 인생 등에 대한 관조적인 시선을 나긋한 목소리로 풀어놓는다. 가상현실(VR) 헤드셋 기기도 함께 착용하는데, 평소 보지 못한 남산예술센터 깊숙한 곳에 들어가기 전 준비 운동이다.

'천사 - 유보된 제목'이라는 작품의 제목은 나치를 피하는 긴 여정 도중 스스로 목숨을 끊은 철학가 발터 벤야민의 '역사철학테제'를 인용한 것이다. 이 글에서 벤야민은 본인의 애장품이기도한 파울 클레의 드로잉 '새로운 천사'를, 도래하지 않은 구원에 대한 희망과 절망이 섞인 그의 문학적 사상의 중심에 놓는다.

서현석 연출은 다소 어렵게 느껴지는 이 설정을 온 몸으로 체험하게 한다. 벤야민의 중요한 화두는 '걷기의 철학'이었다.
거리 또는 건물에 파편처럼 분산돼 있는 흔적들을 걷기 또는 산책을 통해 수집, 문명의 폐허 또는 흔적을 저마다의 방법으로 그려내는 것이다.

【서울=뉴시스】 남산예술센터 '천사 - 유보된 제목'. 2017.08.28. (사진 = 서울문화재단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남산예술센터 '천사 - 유보된 제목'. 2017.08.28. (사진 = 서울문화재단 제공) [email protected]
이날 관객들 역시 마찬가지다. 남산예술센터를 수도 없이 들락날락했지만 이런 공간이 있었나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낯선 장소를 둘러보게 되는데 그곳에는 파편들이 숨겨져 있다.
 
그 파편들은 클레의 '새로운 천사'에서 확장된 것이다. 클레는 현대 추상회화의 시조로 통하지만 독일 나치로부터 정신병자 작가라는 모욕을 받을 정도로 기괴한 작품들을 선보였다. 그는 평소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게 만드는 것을 그린다고 했는데, 그 만큼 본인의 경험이 중요한 그림을 그려왔다.

'천사 - 유보된 제목'은 벤야민과 클레의 철학을 관객이 경험하게 만든다. 온통 하얀 색으로 치장된 분장실에 걸린 거울, 검은 날개가 천장 위에 매달려 한껏 그로테스크한 풍경을 풍기는 방에서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MP3의 음성, 남산서울타워가 보이는 남산예술센터 뒷면 야외 계단 등이다.

관객이 거기서 맞닥뜨리게 되는 건 자신의 내면이다. 벤야민처럼 산책하며 파편을 끌어모으고, 클레처럼 개별 경험을 끌어낸다.

【서울=뉴시스】 남산예술센터 '천사 - 유보된 제목'. 2017.08.28. (사진 = 서울문화재단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남산예술센터 '천사 - 유보된 제목'. 2017.08.28. (사진 = 서울문화재단 제공) [email protected]
마지막으로 남산예술센터 맨 위층 방에서 휠체어에 앉게 되면 가상현실 헤드셋을 다시 착용하게 된다. 마술사가 등장해 비둘기가 나오는 등의 마술을 선보인다.

한켠에는 하얀 날개도 달려 있다. 이어 자신이 거쳐 간 남산예술센터의 공간들이 하나둘씩 지나간다. 그리고 맨 처음 들었던 목소리의 주인공인 할머니가 자신에게 다가온다.

그녀는 판에 박은 듯한 문구 또는 진부한 표현을 가리키는 클리셰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데, 이미 각자의 경험이 녹아든 이 상황은 진부함이 아닌 특별함이 된다. 자신도 돌아보지 않은 채 스스로를 지치게 한 자신과 대면하며 위로를 안기는 순간이기도 하다. 기형도의 시 '빈집'의 한 구절이 떠오른다. '가엾은 내 사랑은 빈집에 갇혔네.'

지난 2014년 크리에이브 바키 대표인 이경성 연출이 선보인 '남산 도큐멘타, 연극의 연습-극장 편'은 1962년 남산 드라마센타가 개관한 이래 이 극장에서 만들어진 연극과 사건들, 사람들의 자취를 다양한 방식으로 좇아가며 공통의 기억을 끄집어냈다.

그 동안 수많은 공동체적인 아픔과 상처를 겪은 현재 서 연출의 '천사 - 유보된 제목'은 개인의 기억을 끄집어낸다. 우연 남산예술센터 극장장은 "극장의 집단체험이 아닌 극장의 개인적 체험을 선사한다"고 했다. 공연에 참여하는 관객의 감정 상황, 시간대, 날씨 등이 감상 또는 체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는 이유다.
【서울=뉴시스】 남산예술센터 '천사 - 유보된 제목'. 2017.08.28. (사진 = 서울문화재단 제공) photo@newsis.com
【서울=뉴시스】 남산예술센터 '천사 - 유보된 제목'. 2017.08.28. (사진 = 서울문화재단 제공) [email protected]

한 사람을 위한 60분 공연에는 총 20~30명이 투입된다. 그들은 대부분 보이지 않는데 개별적 체험에는 다른 사람들의 상당한 수고가 있음을 깨닫게 한다. 관객들은 공연 도중 파편화된 이런 문구를 선물로 받는다. "이것들은 작고 먼 세계로부터의 선물입니다. 나의 소리, 나의 움직임, 나의 음악, 나는 당신의 시간에서 살아남기 위해 나의 시간을 버텨야 합니다."이번 공연은 이미 매진됐다. 총 270명만 특별한 선물을 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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