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어 이야기] <하> 수령과 백성도 제때 임금에게 진상하기 어려웠던 '은어'

기사등록 2017/07/17 08:03:29

2012년 2월 개최된 '안동 장빙제'에서 '진상품 은어' 저장용으로 만들어진 석빙고에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낙동강에서 채빙하는 모습이 재현되고 있다. (사진= 안동시 제공)
2012년 2월 개최된 '안동 장빙제'에서 '진상품 은어' 저장용으로 만들어진 석빙고에 얼음을 저장하기 위해 낙동강에서 채빙하는 모습이 재현되고 있다. (사진= 안동시 제공)
'진상품에 벌레?'···강원감사 곤장 80대
 '은어 맛 부적합?'···수령 5명 동시 파면

【봉화=뉴시스】김진호 기자 = 봉화은어축제는 지난해까지 3년 연속 문화관광체육부 우수축제로 선정된 우리나라 여름 대표축제다.

 지난해에는 70여만명이 봉화축제장을 찾았다. 올해는 오는 29일부터 8일간 내성천 일원에서 개막된다.

 이 처럼 은어축제가 성공을 거두면서 그 주인공인 은어는 이제 국민들로부터 사랑받는 친숙한 물고기가 됐다. 하지만 불과 150여년 이전까지만 해도 은어가 잡히는 지역의 백성들에게 은어는 고통이었다. 관청의 수령과 아전들도 이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18일 이하상 전 한국농촌경제연구원 선임연구원에 따르면 은어는 조선 왕실에서 종묘에 제사를 올리는데 꼭 필요한 제수품 중 하나였다. 조선의 종묘 예절을 기록한 '종묘의궤(宗廟儀軌)'에는 10월에 치러지는 종묘 제사물품으로 은어, 문어, 대구, 감귤, 금귤, 유자, 마, 은행, 곶감 등을 꼽았다.

 조선 후기 실학자 이긍익(李肯翊 1736~1806)이 쓴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는 종묘 제례 때 은어는 6월과 10월 두 차례 올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영조부터 순조까지 각 관아에서 종묘와 대왕대비전, 대전, 중궁전, 세자전에 진상한 물건의 품목을 예조에서 기록한 '진상등록(進上謄錄)'에도 은어가 진상품에 올라있다.

 각 전에 대한 진상은 생일이나 하례 등의 진상, 설날·입춘·단오·추석·동지 등 절기에 따른 진상, 각 전의 삭선(朔膳 매달 초하룻날에 각 도에서 나는 물건으로 차리던 수라상)에 대한 진상으로 구분된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는 은어 진상을 제대로 못해 처벌 받은 지방수령과 관련된 사건기록이 100여 건 수록돼 있다.  전라감사가 숙종에게 보낸 장계에는 "진상해야 할 은어를 바치지 못한 남원부사, 장흥부사, 순창군수, 보성군수, 임실현감, 곡성군수, 동복현감, 옥과현감, 강진현감 등을 내치시고 신 또한 대죄한다"고 적었다.

지난해 7월 경북 봉화군 내성천 일원에서 열린 '봉화은어축제' 중 반도잡이 행사에 참가한 관광객들이 은어를 잡기 위해 내성천으로 뛰어들고 있다. (사진= 봉화군 제공)
지난해 7월 경북 봉화군 내성천 일원에서 열린 '봉화은어축제' 중 반도잡이 행사에 참가한 관광객들이 은어를 잡기 위해 내성천으로 뛰어들고 있다. (사진= 봉화군 제공)
은어를 제 때 진상하지 못해 전라도 관내 수령 9명이 동시에 탄핵의 대상이 된 것이다. 당시 전라도에는 전염병이 돌아 수 만 명이 병에 걸리고, 죽은 자가 많은 정황 등이 참작돼 다행히 무더기 탄핵사태는 피했다. 

 하지만 몇 년 뒤 강원도에서는 수령들이 무더기로 파직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숙종 35년 (1709년) 강원도에서 7월 초에 진상한 생복 및 은어의 맛과 모양이 봉진에 부적합했다. 감원감사는 이에 해당 봉진관인 영양부사, 간성군수, 고성군수, 통천군수, 흡곡현령을 파직하고 자신에게도 죄를 물어달라고 장계를 올렸다. 장계를 받은 임금은 강원감사를 제외한 수령 모두를 파직했다.

◇영덕 현령들 '은어' 때문에 임기 2년도 안돼 파직

 경북 영덕의 경우 현령들의 임기가 2년이 채 안된 사례가 많다. 선조 때 정인함은 은어 공납을 못해, 광해군 때 이린기는 공물불납으로, 현종 때 이해관은 진상품이 부패돼, 숙종 때 심위는 진상을 못해 각각 임기 2년도 채우지 못한 채 파직을 당했다.   

 고성군수 홍우원(1605~1687)은 "이번 생은어 봉진에 크기가 적당한 것을 구할 수 없어 진상은 불가능하다"며 징계를 받기 전 스스로 사임하기도 했다. 이를 볼 때 강원도의 은어는 경상도산에 비해 크기가 작아 마땅한 크기의 진상품을 마련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파직만으로 끝나지 않고 실형까지 받은 경우도 많았다.

 인조 7년(1647년 8월) 전라도에서 진상한 은어젓갈이 수량이 부족했다. 해당 봉진관을 추고(推考)하고 진상물을 가져온 관리를 잡아가뒀다. 효종 7년(1654년 8월)에는 강원도 감사가 진상한 생은어가 색깔이 변하고 벌레가 생겼다. 이에 효종은 강원도 감사에게 곤장 80대를 수속(收贖 죄인이 돈을 바쳐 형벌을 면하는 것)하는 한편 벼슬을 3등급 낮췄다.

 현종 10년 (1669년 8월) 상주와 함창의 현령이 진상한 생은어가 색깔이 변해 진상에 적합지 않자 역시 곤장 80대를 수속케 하고, 벼슬도 3등급 강등시켰다. 숙종 33년(1707년 6월)에는 태묘에 천신할 은어가 크기가 작고 형태를 갖추지 못하자 강원감사 및 예조 담당자를 파직했다. 당해 봉진관은 잡아들여 죄를 물었다.

지난해 7월 경북 봉화군 내성천 일원에서 열린 '봉화은어축제' 중 반도잡이 행사에 참가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은어를 잡고 있다. (사진= 봉화군 제공)
지난해 7월 경북 봉화군 내성천 일원에서 열린 '봉화은어축제' 중 반도잡이 행사에 참가한 외국인 관광객들이 은어를 잡고 있다. (사진= 봉화군 제공)
◇가난한 역리들도 생은어 수송에 '가산탕진'
 
 이렇듯 진상 은어에 문제가 있을 경우 각 도의 감사, 해당 지역의 봉진관, 진상을 접수한 예조의 담당자까지 직급에 관계없이 줄줄이 문책을 받았으니 은어는 분명 그들에게 피해갈 수 없는 골칫거리였다. 특히 생은어의 진상은 더욱 그랬다.

 은어는 생은어, 말린은어, 절인은어, 은어알, 은어젓갈 등의 형태로 왕실에서 이용됐다. 하지만 당시에는 생은어의 신선도를 유지할 방법이 변변치 않았다. 조선시대 생은어 수송은 역마를 이용했다. 은어산지에서 300~400㎞에 이르는 한양까지 수송은 아무리 서둘러도 며칠이 걸릴 수 밖에 없어 신선도 유지는 어려운 문제였다.

 연산군 2년(1496년) 왕조실록이다. '생물을 진상할 때는 은어 10여 마리만 돼도 반드시 최고 좋은 말에 얼음덩어리까지 실어 뭉그러지지 않도록 몇 배 속도로 달린다. 이로 인해 말이 병들거나 죽는다. 말 한 마리의 값이 무명 100여 필에 이르니 가난한 역리들이 가산을 탕진하게 된다'

 다시 말해 고작 은어 10여 마리를 운반하기 위해 군사정보 및 공문서의 전달이 주요 업무이어야 할 역마와 가난한 역리들이 혹사당했다. 역마로 무사히 운반했다고 하더라도 한양에 도착하면 사옹원에서 조달품 감수를 받아 양이 부족하거나 규격미달, 또는 상했으면 현지 수령이 엄한 처벌을 피할 수 없었다.

 영조 24년(1748년 10월) 승정원일기 내용이다. '강원도에서 10월 1일 진상이 도착했는데 생은어가 모두 썩고 상해 있다. 비록 일기분순한 탓이지만 막중한 진상물이 이처럼 썩고 상한 것은 죄송한 일이다. 부득이 돌려보내고 다시 봉진토록 했다. 이에 해당 봉진관은 중죄로 추고하고, 도의 관원 역시 검품을 잘못한 죄를 면할 수 없어 추고하고, 물품을 가져온 사령의 죄도 다스릴까 한다. 이에 왕이 허락했다'

제59회 밀양아리랑 대축제 기간 중 삼문동 밀양강변에서 은어 맨손잡기 체험행사가 열리고 있다. (뉴시스 DB 2017.05.21)
제59회 밀양아리랑 대축제 기간 중 삼문동 밀양강변에서 은어 맨손잡기 체험행사가 열리고 있다. (뉴시스 DB 2017.05.21)
정조 16년(1792년 11월)에도 이와 비슷한 사건이 벌어졌다. '강원도에서 11월 1일 진상이 도착해 간품했는데 은어가 다 썩고 상해서 받아들이지 못하고 퇴송해 다시 봉진토록 했다. 당해 봉진관은 파직하고 도의 관원 역시 검품을 잘못한 죄를 면할 수 없어 무겁게 추고하고, 물품을 가져온 사령의 죄도 다스릴까 한다. 이에 왕이 허락했다'

◇'진상품 은어' 잡으려 강 인접지역 수령들 감정싸움도

 반면 궁중의 음식물 조달을 담당하고 있던 사옹원은 '은어 진상을 잘못한 지방 수령을 파직하라'고 고하는 등 위세가 막강했다. 예조, 선혜청, 봉상시, 숙녕전처럼 진상품을 소비하는 기관에서도 진상품이 불량한 것을 문제 삼아 관계자를 고발하는 등 역시 위세를 떨쳤다. 

 은어가 서식하는 강이라도 잡히는 곳은 따로 있다. 따라서 같은 강에서 은어를 잡아 진상하는 인접 지역 백성들 사이에서는 어로경쟁이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이는 곧 수령들간 감정싸움으로 비화되기도 했다. 가야천의 경우 성주 백성들이 매년 고령의 경계까지 와서 은어를 잡아갔다.

 고령현감으로 부임한 김숙자(金叔滋 1389~1456)는 성품이 강직했다. 그는 즉시 사람을 보내 그물을 빼앗고 어부들을 채찍질해 내쫒았다. 이에 성주목사가 크게 노해 경상도 감사에게 "장차 진상을 빠뜨리게 생겼다"고 공문을 보내 호소했다. 성주목사가 고령현감보다 직급이 높았지만 결국 감사가 중재에 나서면서 성주목사가 사람을 보내 고령현감에게 사과했다. 

 은어 진상과 관련해 말도 많고 탈도 많자 1547년 명종은 "임금의 식사에는 긴요치 않지만 민폐는 큰 것이다. 봉진하지 말게 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전교했다. 하지만 은어 진상은 이후에도 계속됐다. 결국 1864년 근세에 들어서야 은어 진상은 자취를 감췄다.

 고종 황제는 "각도의 6, 7월 음식물 재료 가운데 생전복과 생은어는 민폐에 크게 관계된다고 하니 내년부터는 영구히 봉진하지 말도록 해 생민의 고질적인 폐단을 제거토록 하라"고 지시했다. (승정원일기, 고종 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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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어 이야기] <하> 수령과 백성도 제때 임금에게 진상하기 어려웠던 '은어'

기사등록 2017/07/17 08:03:29 최초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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