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완이법' 시행 2주년…장기미제 살인사건 잇따라 해결

기사등록 2017/07/05 14:18:33

최종수정 2017/07/05 16:57:52

【서울=뉴시스】호프집 여주인 살인사건 공개수배자 모습.
【서울=뉴시스】호프집 여주인 살인사건 공개수배자 모습.
서울청, 미제사건팀 꾸린 후 첫 살인범 검거
태완이법 시행으로 미제사건 수사에 활력

【서울=뉴시스】박준호 기자 = 오랜 기간 미제사건으로 남아 있던 호프집 여주인 강도살인사건의 진범을 경찰이 15년 만에 찾아냈다. 경찰이 장기 미제 사건이라는 부담을 떨쳐내고 재수사에 착수할 수 있었던 결정적인 계기는 일명 '태완이법' 때문이었다.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를 주된 내용으로 한 형사소송법 개정안, 이른바 태완이법 시행으로 기존 미제사건의 실타래도 점점 하나씩 풀리고 있다.

 태완이법이란 지난 1995년 5월 대구에서 발생한 김태완(당시 6세)군에 대한 황산테러사건을 계기로 추진된 법안이다. 온몸에 화상을 입고 패혈증에 걸려 투병하다 사망에 이르도록 황산테러를 가한 범인이 검거되지 않은 채 공소시효 만료가 임박해지자 살인범 공소시효 폐지 여론이 불거지면서 2015년 7월 국회에서 개정안이 통과됐다.

 살인죄 공소시효는 15년에서 2007년 25년으로 늘었다가 지금은 폐지됐기 때문에 수사기관에서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갖고 과학적이고 다각적인 기법으로 범행을 밝혀낼 수 있게 됐다. 최근 서울경찰청 형사과 강력계 중요미제사건수사팀이 호프집 여주인 강도살인사건 범인을 잡는 데에도 이러한 태완이법이 영향을 준 것이다.

 ◇태완이법 시행 후 서울경찰청 미제사건 살인범 첫 검거
 
 5일 서울경찰청 중요미제사건수사팀에 따르면 15년 전 서울 구로 일대에서 발생했던 호프집 여주인 강도살인사건의 유력한 피의자 장모(52)씨가 강도살인 혐의 등으로 지난달 29일 구속됐다.

 경찰에 따르면 장씨는 지난 2002년 12월14일 오전 1시30분께 서울 구로구 가리봉1동 소재 모 호프집에 손님으로 들어가 여주인(당시 50세)과 술을 마시던 중 미리 준비한 둔기로 머리, 얼굴 등을 수차례 내리쳐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다.

 장씨는 범행 후 현금 15만원과 피해자 딸 명의로 된 신용카드 한 장을 빼앗아 70만원 상당의 물품을 구입한 혐의도 있다.

 서울청은 2015년 일명 ‘태완이법’이 시행됨에 따라 형사과 강력계에 중요미제사건수사팀을 편성·운용하며 서울 시내에서 발생한 미제 사건을 들여다보고 있다. 그중 올해 1월 호프집 여주인 살인 사건에 주목하고 금천경찰서(옛 남부경찰서)로부터 사건 관련기록 일체를 인수받았다.

 수사팀은 사건발생 당시 상황을 시간대별로 재구성하고 증거물 중 현장에서 발견된 흔적들을 정밀분석해 장씨가 호프집에 간 사실을 입증했다.

 장씨가 쓴 도난카드 사용처에 대해서도 탐문수사 한 결과, 각각 4만8000원과 61만원 상당의 물건을 카드로 구입한 내역과 결제 당시 인상착의가 일치한다는 사실도 참고인 진술 등을 통해 확인했다.

 지난 달 26일 서울 모처에서 체포된 장씨는 범행장소에 간 사실조차 없다며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지만, 경찰이 확보한 증거자료를 바탕으로 범행 전 과정을 구증해 구속영장이 발부되자 뒤늦게 범행일체를 자백했다.

 수사팀이 15년 만에 진범을 찾아내 들이댄 결정적인 단서는 '쪽지문'과 '족적'이었다.

 장씨는 다른 곳에서 1차 소주를 마신 뒤 2차로 맥주를 마시기 위해 호프집에 갔다가 범행을 저질렀다. 당시 범행 현장의 깨진 맥주병에는 장씨의 쪽지문이 남아 있었다.

 여주인 신용카드를 훔치기 위해 지갑이 든 가방을 찾으러 호프집 내 계단을 올라가는 과정에서 특이한 족적도 남겼다. 보통 일반인에게서 나타나는 족적이 아닌 '특별한 신발'을 신고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장씨는 키가 165㎝에 못 미칠 만큼 작은 편이었지만 키높이 구두형태로 뒷굽이 높은 신발을 범행 당시나 15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신고 있었다.

 경찰 관계자는 "당시 현장감식반에서 현장의 완전치 않은 지문과 족적을 채취해 잘 보관하고 있었던 게 결정적인 수사단서가 됐다"며 "과거에는 지문을 분석하는 데 5일 정도 소요됐으나 유사지문이나 쪽지문을 기존 데이터베에스와 대조하고 빠른 시간내에 식별할 수 있도록 향상된 과학적 지문감식법이 개발돼 이 사건 해결에 기여했다"고 설명했다.
 
 범행 당시 건설현장의 타일공 보조로 일하며 일용직 노동자로 생계를 꾸렸던 장씨의 범행 동기는 경제적인 사정 때문인 것으로 경찰은 추정하고 있다. 생계 유지가 쉽지 않자 계획적으로 범행을 저질렀다는 게 경찰의 결론이다. 

 반면 장씨는 여전히 우발적 범행이라고 주장한다. 그 근거로 사전에 둔기를 준비한 것이 아닌, 호프집 앞에 있던 약 50㎝ 길이의 쇠파이프를 범행 도구로 이용했다는 점을 들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피의자는 쇠파이프를 미리 준비한 게 아니고 노상에 있던 걸 가져온 것이라고 주장하지만 국과수 감정이나 법의학 교수한테 당시 피해 흔적을 감정 의뢰한 결과 쇠파이프가 아니라 둔기, 망치 등으로 가격한 것이라는 감정결과를 통보받았다"며 "당시 피의자가 가방을 메고 있었는데 가방 안에 망치가 들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말했다. 

 강도상해 범죄전과 전력이 있는 장씨의 범행 수법도 호프집 여주인 살인 때와 일치했다. 일반적으로 강도를 저지를 땐 테이프 등으로 손, 발을 묶는 게 전형적인 수법이지만 장씨는 테이프 대신 둔기로 피해자의 반항을 제압했다.

 세간을 떠들썩하게 했던 사건으로 수사망을 피해 지방을 전전했던 장씨는 2003년부터 택시 운전기사로 착실하게 일해오며 평범한 시민처럼 살아왔다.

 그러나 15년 만에 검거된 장씨는 남은 여생을 교도소에서 복역하며 수감생활로 끝마쳐야 하는 영어(囹圄)의 신세가 됐다. 형법상 강도살인죄는 무기징역 또는 사형으로 처벌받는다.

【서울=뉴시스】고범준 기자 = 정지일 서울지방경찰청 수사팀장이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중요미제(강도살인)사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 사건은 지난 2002년 12월 14일 새벽 서울 구로구 소재 한 호프집에서 손님이 사장을 둔기로 머리와 얼굴 등 수회 내리쳐 살해하고 현금 15만원과 신용카드를 강취한 사건으로 15년만에 검거해 구속하였다. 2017.07.05. bjko@newsis.com
【서울=뉴시스】고범준 기자 = 정지일 서울지방경찰청 수사팀장이 5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서울지방경찰청에서 중요미제(강도살인)사건 관련 브리핑을 하고 있다. 이 사건은 지난 2002년 12월 14일 새벽 서울 구로구 소재 한 호프집에서 손님이 사장을 둔기로 머리와 얼굴 등 수회 내리쳐 살해하고 현금 15만원과 신용카드를 강취한 사건으로 15년만에 검거해 구속하였다. 2017.07.05. [email protected]
수사팀 관계자는 "처음엔 구속영장이 발부되기 전까지 지문, 족적 등에 대해 믿을 수 없다고 부인했다"며 "그러나 영장이 발부되고 담당 조사관이 다시 추궁하자 눈물을 흘리면서 모든 걸 자백했다"고 전했다.

 ◇태완이법 시행 후 미제사건→영구수사로 전환
 
 자칫 미제로 묻힐 뻔한 사건들이 태완이법 시행 이후 다시 활기를 띠며 수사에 속도를 내는 사례는 여러 건이 있다.
 
 '인천 계양구 놀이터 살인사건'의 경우 공소시효 4일을 남겨 놓고 태완이법이 공포됐다. 2000년 8월5일 인천 계양구 모 아파트 단지 내 놀이터에서 놀던 A양(당시 9세)에게 흉기를 휘두른 남성은 여전히 잡히지 않고 있다.

 2000년 8월 전북 익산시 영등동에서 발생한 '약촌오거리 택시기사 살인사건'도 2015년 8월 공소시효가 만료될 예정이었지만 태완이법 시행으로 시효의 제한을 받지 않게 됐다. 

 2001년 7월 울산에서 발생한 단란주점 여성 살인사건과 같은 해 12월 대전 국민은행 둔산지점 지하주차장에서 벌어진 강도살인 사건도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태완이법 시행으로 시효가 사라졌다.

 태완이법 시행으로 살인죄 공소시효가 폐지된 뒤 유죄가 선고된 사례도 있다. 이른바 '나주 여고생 살인 사건'으로 2001년 전남 나주 드들강에서 발생한 여고생 강간살인 사건의 범인 김모(39)씨가 16년 만에 붙잡혀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교도소에서 복역 중이다.

 2001년 경기 용인에서 발생한 '교수부인 살해' 사건도 경찰이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로 재수사에 나서면서 16년 만에 범인을 찾아내 죗값을 치르게 했다. 이 사건에서 강도살인 혐의로 기소된 김모(52)씨는 2001년 6월28일 오전 4시께 경기 용인에 위치한 A교수(당시 55세) 부부의 단독주택에 공범과 함께 침입해 A씨의 부인(당시 54세)을 살해하고 A씨에게도 중상을 입힌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정지일 서울경찰청 중요미제수사팀 경감은 "태완이법이 시행 안 됐으면 5개월 후에 공소시효가 만료돼서 수사를 못했을 것"이라며 "미제사건을 수사하면서 가장 어려운 건 아픈 상처나 정신적 고통을 잊은 상태에서 유족을 다시 찾아가 수 회에 걸쳐 만나는 것인데 수사관이 찾아가서 검거 과정과 범행 경위 등을 설명하자 '지금이라도 잡아줘서 고맙다'며 유족들이 고마워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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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완이법' 시행 2주년…장기미제 살인사건 잇따라 해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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