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뉴시스】'미군은 북한군의 남침을 예견하지 못했나?'(사진=국립중앙도서관)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21일 국립중앙도서관 본관 1층 전시실에서 개막한 '6·25 전쟁, 미 NARA 수집문서로 보다'전시는 6·25 동란을 다시 살펴보는 자리다.
전쟁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미군은 정말 북한군의 남침을 몰랐을까. 이번 전시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연구부장과 함께 주요 문서를 살펴봤다.
◇미군, 북한 남침 알고있었다?
6·25 동란이 발발한 직후부터 미국 정부 내에서는 북한군의 남침 예견 실패를 놓고 책임 공방이 뜨거웠다. CIA, 극동군사령부를 비롯한 합동참모본부 등의 정보 부서들은 서로 책임을 회피하느라 바빴다.
그러던 중 '워싱턴 뉴스'가 1950년 9월 1일과 10월 5일에 "극동군사령부의 정보참모부장인 윌러비 소장이 1950년 3월10일에 북한군의 남침을 정확하게 예측했었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미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미 극동군사령부가 "1950년 3월 10일에 6월 경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부에 보고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아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했다.
전쟁은 어떻게 일어났을까. 미군은 정말 북한군의 남침을 몰랐을까. 이번 전시 기획위원으로 참여한 양영조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연구부장과 함께 주요 문서를 살펴봤다.
◇미군, 북한 남침 알고있었다?
6·25 동란이 발발한 직후부터 미국 정부 내에서는 북한군의 남침 예견 실패를 놓고 책임 공방이 뜨거웠다. CIA, 극동군사령부를 비롯한 합동참모본부 등의 정보 부서들은 서로 책임을 회피하느라 바빴다.
그러던 중 '워싱턴 뉴스'가 1950년 9월 1일과 10월 5일에 "극동군사령부의 정보참모부장인 윌러비 소장이 1950년 3월10일에 북한군의 남침을 정확하게 예측했었다"라는 기사를 실었다.
미 국무부 문서에 따르면, 미 극동군사령부가 "1950년 3월 10일에 6월 경 북한군이 남침할 것이라는 정보를 입수하고 상부에 보고했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후 북한은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약속받아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38선 전역에서 남침을 개시했다.

【서울=뉴시스】'구 소련의 한국 전쟁 개입시 미 합참의장의 복안'(사진=국립중앙도서관)
양 군사연구부장은 "윌러비가 전쟁 가능성을 예측했다는 건 그 분의 증언 등으로 이미 알려진 사실"이라며 "하지만 대중이 이 문서 자체를 실제로 보는 건 이번이 처음"이라고 말했다.
◇소련의 한국전쟁 개입시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의 복안
6·25 동란 초기인 1950년 7월10일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이 소련군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에 취해야 할 방책에 관해 논한 문서다. 소련군의 개입은 곧 제3차 세계대전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당시에 소련이 한국전쟁에 대한 개입을 극비로 추진하고 있어서 미 정보당국은 소련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 문서는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이 소련군의 직접적인 개입이 확인될 경우 미군은 무조건 일본으로 철수하거나, 전면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양 군사연구부장은 "전 세계의 정보력을 동원해서 소련군이 개입 여부를 판단, 직접 개입하지 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소련군이 개입할 경우의 정책 노선을 적은 문서"라고 설명했다.
◇소련의 한국전쟁 개입시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의 복안
6·25 동란 초기인 1950년 7월10일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이 소련군이 전쟁에 개입할 경우에 취해야 할 방책에 관해 논한 문서다. 소련군의 개입은 곧 제3차 세계대전을 의미하는 것이었기에 신중할 수밖에 없는 문제였다.
당시에 소련이 한국전쟁에 대한 개입을 극비로 추진하고 있어서 미 정보당국은 소련이 직접적으로 개입하고 있지 않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이 문서는 미 합참의장 브래들리 장군이 소련군의 직접적인 개입이 확인될 경우 미군은 무조건 일본으로 철수하거나, 전면전을 준비해야 한다는 입장이었음을 보여준다.
양 군사연구부장은 "전 세계의 정보력을 동원해서 소련군이 개입 여부를 판단, 직접 개입하지 하지 않았다는 결론을 내리고 소련군이 개입할 경우의 정책 노선을 적은 문서"라고 설명했다.

【서울=뉴시스】'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모스크바 회동 문서'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모스크바 회동 문서
1951년 2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회담에서 중국과 소련이 6·25 동란에서 협력을 합의한 사항이 기록된 CIA 정보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해 4월5일 작성된 내용으로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포기하지 않으며, 전력을 다해 계속 싸운다. ▲중국은 50만 명의 병력을 추가 파견한다 ▲미국이 만주 폭격을 요청한 맥아더에 동의하는 경우 소련은 중소상호원조조약과 중소 동맹에 의거 일본의 미군 기지를 폭격한다 ▲한국 파병으로 중국 내 병력이 부족한 요새를 강화하기 위해 중국은 소련군이 중국 내에 주둔하는 것을 환영한다. ▲한국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소련은 국제 의용군을 조직해 한국에 파병한다. ▲소련은 중국에 탱크와 트럭, 연료와 탄약 지원뿐 아니라 해공군 병력을 파견한다. ▲중소 국경의 주요 지점에 대규모 군수품 기지를 세운다 등의 내용이다.
양 군사연구부장은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은 1951년 1월 말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으며,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회동은 6·25전쟁의 전개 양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고 전했다.
[email protected]
1951년 2월 초 모스크바를 방문한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회담에서 중국과 소련이 6·25 동란에서 협력을 합의한 사항이 기록된 CIA 정보 보고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해 4월5일 작성된 내용으로 ▲중국은 한국전쟁에서 포기하지 않으며, 전력을 다해 계속 싸운다. ▲중국은 50만 명의 병력을 추가 파견한다 ▲미국이 만주 폭격을 요청한 맥아더에 동의하는 경우 소련은 중소상호원조조약과 중소 동맹에 의거 일본의 미군 기지를 폭격한다 ▲한국 파병으로 중국 내 병력이 부족한 요새를 강화하기 위해 중국은 소련군이 중국 내에 주둔하는 것을 환영한다. ▲한국 전선을 강화하기 위해 소련은 국제 의용군을 조직해 한국에 파병한다. ▲소련은 중국에 탱크와 트럭, 연료와 탄약 지원뿐 아니라 해공군 병력을 파견한다. ▲중소 국경의 주요 지점에 대규모 군수품 기지를 세운다 등의 내용이다.
양 군사연구부장은 "마오쩌둥의 모스크바 방문은 1951년 1월 말부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으며, 마오쩌둥과 스탈린의 회동은 6·25전쟁의 전개 양상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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