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알리'의 위대하지 않았던 순간들

기사등록 2016/06/06 10:55:01

최종수정 2016/12/28 17:10:14

【라스베이거스=AP/뉴시스】 3일( 현지시각) 별세한 복싱 영웅 무하마드 알리의 장례식이 10일 오후 2시 고인의 고향인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의 ‘KFC 센터’에서 열린다.사진은 1965년 11월 22일 알리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타이틀 방어전의 7회전에서 플로이드 패터슨을 강타하고 있는 모습. 2016.06.06 
【라스베이거스=AP/뉴시스】 3일( 현지시각) 별세한 복싱 영웅 무하마드 알리의 장례식이 10일 오후 2시 고인의 고향인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의 ‘KFC 센터’에서 열린다.사진은 1965년 11월 22일 알리가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타이틀 방어전의 7회전에서 플로이드 패터슨을 강타하고 있는 모습. 2016.0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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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뉴시스】차의영 기자=  3일(현지시간) 향년 74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 미국의 전설적 권투선수 무하마드 알리가 가장 위대한 복서이며 스포츠인이었다는 사실은 논란의 여지가 없다. 알리는 가는 곳 만다 사람들을 열광시켰으며 세계 최고의 명사였지만 믿을 수 없을 만큼 훌륭한 도덕적 용기와 친절한 행동,  링에서 맞서는 적수는 누구에게나 엄청난 투지를 불태웠던 위대한 인간이자 파이터였다.


 그러나 자의반 타의반으로 가끔은 위대하지 않았던 순간들도 있었다.

 

"내 이름이 뭐라고?" 

  1965년 전세계를 경악시킨 이 젊고 패기있는 헤비급 권투선수에게 사람들은 아직 적응이 되지 않았고 특히 흑인 무슬림이라는 점에서 링의 적수들은 공포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 해 알리는 도전자 플로이드 패터슨과 라스베이거스에서 챔피언 방어전을 갖게되었다. 이 때 프랭크 시나트라, 딘 마틴을 비롯한 연예인들이 링사이드에서 관전을 하던중 알리가 패터슨을 1회초부터 난타하면서 매번 " 내 이름이 뭐라고?"란 말을 되풀이 하는 것을 들었다.  

 다음 날 뉴욕타임스의 로버트 립사이트 기자는 " 마치 7402명의 유료관람객들과 헐리우드 스타들 앞에서 패터슨을 복싱선수로나 인간으로나 영원히 끝장 내버리는 게 인생의 목표인 것 같은 무서운 기세였다"고 기사를 썼다.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 찬반으로 양분되어 있는데다 그 다음주 흑인민권운동의 워싱턴 평화행진이 예정되어 있던 격동의 시기였고  알리의 무서운 주먹은 저항세력의 기세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알리는 "꼭 전쟁터에서 훈장을 따지 않더라도 자기가 있는 위치에서 깨끗한 싸움을 하는 것은 나라를 위해 싸우는 것이다"라고 다음날 패터슨에게 말했다.

 

알리의 아내

  알리는 1975년 필리핀에서 유명한 조 프레이저와의 결전을 앞두고 시내에서 베로니카 포슈란 여성을 자기 아내라고 소개하고 다녔다.  문제는 시카고에 남아있던 아내가 그 소식을 듣고 기분이 매우 나빴다는 점이다.

 1967년 이미 결혼해 네 자녀를 두고 있던 아내 카일라는 즉시 비행기를 타고 필리핀의 마닐라로 날아와 곧장 알리가 묵고 있던 마닐라 힐튼의 대통령 전용실로 달려갔다.


  "알리는 전화로 헛소문이라며 나한테 직접 와서 보라고 말했는데 와보니 그건 거짓말이었고 여자관계가 난잡했어요. 나는 그때 이혼을 결심했지만 3차례 세계 챔피언이 될때까지 기다려주기로 약속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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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소=AP/뉴시스】3일( 현지시각) 별세한 복싱 영웅 무하마드 알리의 장례식이 10일 오후 2시 고인의 고향인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의 ‘KFC 센터’에서 열린다. 사진은 바하마 나소에서  1981년 12월 10일 캐나다 챔피언 트레버 버빅(오른쪽)과의 시합을 하루 앞두고 계체하고 있는 알리. 2016.06.06 
 알리는 나중에 베로니카를 아내 4명중 3번째로 삼았지만 돈을 많이벌기 시작하면서 예쁜 여자에게 한눈을 많이 팔았고 집에도 끌고오기 일쑤였다. 10대에 알리와 결혼했던 부인 카일라는 고통스러운 결혼생활을 참아야했다고 회고했지만 헤어진 후에도 평생 좋은 우정관계를 유지했다.



마지막 시합의 몸부림 


  40세의 생일을 몇달 앞둔 알리는 1년전 래리 홈스와의 경기에서 무기력하게 패배한 것을 설욕하기 위해 마지막 시합이 될 바하마군도의 복싱무대에서 트레버 버빅과 싸우게 되었다. 시합은 진행자들이 장갑, 물병, 경기중 울릴 벨을 찾을 수 없어 지연되었고 결국 매 회전마다 울릴 공으로 소방울을 사용할 수 밖에 없었다.

 알리는 허리 둘레에 지방이 잔뜩 낀 둔한 모습에다 경기 종말을 예고하듯 찌푸린 얼굴로 링에 올랐다.  관중들이 "알리, 알리!"를 연호하면서 응원했지만 알리는 더 빠르고 강한 버빅에게 10회전에 심판전원 판정으로 패하고 말았다.

 그의 화려한 경력에서 가장 수치스러운 이 경기가 끝난 뒤 알리는 세월을 이기는 자가 없다는 것을 인정하고 참패를 나이탓으로 돌렸다.

 

TV 가짜 인터뷰에 속아서 망신

 영국을 좋아하고  런던의 한 공원에서 헨리 쿠퍼를 눕혀 영국팬들의 열광적 사랑을 받았던 알리는 영국 방송의 토크쇼에도 여러번 출연했다.  1968년 베트남전 징집을 거부해 선수자격을 정지당했을 때 알리는 영국의 한 TV방송 이먼 앤드류스 쇼의 섭외를 받고 미국에서의 원격인터뷰에 응했다.

 알리는 미국 TV방송국의 한 스튜디오에서 이어폰을 낀 채 "위성 방송 인터뷰에 출연시켜주셔서 감사합니다"하고 방송을 시작했다.

 하지만 그 다음 순간 게스트 대담자로 나와있던 미국쪽 TV진행자 데이비드 서스킨드가 대중의 입을 대신해서 알리의 병역기피와 군입대 거부에 대해 맹공을 퍼부었다. "이런 사람은 재미도 없고 참아줄만한 데도 없는 인간이다.  자신의 국가나 인종을 위해서도 수치스러운 존재이며 자기 직업인들에게도 멍청한 바보이자 형편없는 졸개에 불과하다"라는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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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AP/뉴시스】3일( 현지시각) 별세한 복싱 영웅 무하마드 알리의 장례식이 10일 오후 2시 고인의 고향인 미국 켄터키 주 루이빌의 ‘KFC 센터’에서 열린다. 사진은 1976년 7월 26일 알리가 프로레슬러 안토니오 이노키와 도쿄에서 시합을 갖고 15회전의 시합중 이노키의 발차기를 피하고 있는 모습. 2016.06.06  
 알리는 완전히 속아서 출연해 망신을 당했고 그 순간 그의 얼굴 표정은 고스란히 대서양 건너편으로 방영되었다.  


프로레슬러 이노키와의 '쇼' 매치


  다시 헤비급 챔피언이 된 알리는 쉽게 돈을 벌기 위해서 일본으로 건너가 프로레슬러 안티니오 이노키와 15라운드 경기를 하기로 했다.

 이 경기의 프로모터인 밥 애럼은 켄 노튼과의 시합을 앞둔 알리가 부상을 당하지 않게 하려고 이노키의 프로모트 빈스 맥마흔을 만나 미국에서는 폐쇄회로 중계로만 볼 수 있는 이 경기의 시나리오를 만들었다.

 알리는 대본까지 있는 이 경기를 마음에 들어했다. 계획은 알리가 이노키를 로프에 몰아넣고 세게 때리는 시늉을 하면 이노키는 입안에 면도날을 물고 있다가 피를 내어 알리의 하얀 팬츠를 적시게 한다, 그럼 알리는 심판에게 경기 중지를 요청하고 돌아서는데, 이때 이노키가 등뒤에서 덤벼 알리를 누르고 이긴다, 알리는 "또 진주만 공격을 당했다"고 외친다는 스토리였다.

 하지만 이노키의 측근 일부 사람들은 이것이 진짜 시합인 줄 알고 권투와 레슬링의 조건을 정하기 위해 사흘이나 호텔에서 경기규칙을 정하느라 입씨름을 했지만 아무것도 합의하지 못하고 말았다.

 결국 경기는 이노키가 각본과 달리  15회전 내내 알리의 다리를 걷어찼고, 마침내 심판이 경기중지를 선언함으로써 도쿄관중의 엄청난 불만을 사는 것으로 끝났다.

 프로모터 애럼은 "내 평생의 경력중 가장 밑바닥 사건이었고 너무나 창피스러운 희극이었다"고 회고했다.

 cmr@newsi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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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알리'의 위대하지 않았던 순간들

기사등록 2016/06/06 10:55:01 최초수정 2016/12/28 17: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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