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천안·아산=뉴시스】이종익 기자 = 독립기념관(관장 윤주경)은 국가보훈처와 공동으로 한국을 조국처럼 사랑하고 의학발전에 기여한 스코필드(한국명 석호필, William Schofield) 박사를 '3월의 독립운동가'로 선정했다고 28일 밝혔다.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11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자격으로 부인과 함께 내한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스코필드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인을 돕고 만세운동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일제의 잔혹하고 비인도적인 탄압에 맞서 싸웠다.
그는 1919년 4월 6일 일제가 자행한 수원(현재의 화성지역) 수촌리마을 방화현장과 15일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사건 현장을 방문해 사진을 촬영하고 보고서를 남겼다.
스코필드가 작성한 '제암리의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과 '수촌 만행 보고서(Report of the Su-chon Atrocities)'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과 미국의 장로회 기관지에 게재돼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스코필드는 귀국길에 도쿄에 머물면서도 3·1운동 이후 일제의 동화정책과 민족차별정책의 철폐를 주장했다.
심장성 천식 등으로 병원에 입원치료 중 1970년 4월 12일 서거한 스코필드는 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을 좋아하고 즐겨 사용했다.
정부는 그에게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으며,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독립기념관은 3월 한 달 동안 특별기획전시장에서 가족사진 등 관련자료를 전시한다.
[email protected]
스코필드 박사는 1916년 11월 캐나다장로회 선교사 자격으로 부인과 함께 내한해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에서 세균학을 가르치면서 한국과 인연을 맺었다.
스코필드는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국인을 돕고 만세운동 현장을 기록으로 남겼으며, 일제의 잔혹하고 비인도적인 탄압에 맞서 싸웠다.
그는 1919년 4월 6일 일제가 자행한 수원(현재의 화성지역) 수촌리마을 방화현장과 15일 제암리교회 방화 학살사건 현장을 방문해 사진을 촬영하고 보고서를 남겼다.
스코필드가 작성한 '제암리의 대학살(The Massacre of Chai-Amm-Ni)'과 '수촌 만행 보고서(Report of the Su-chon Atrocities)'는 중국 상하이에서 발행되던 영자신문과 미국의 장로회 기관지에 게재돼 일제의 만행을 전 세계에 알렸다.
스코필드는 귀국길에 도쿄에 머물면서도 3·1운동 이후 일제의 동화정책과 민족차별정책의 철폐를 주장했다.
심장성 천식 등으로 병원에 입원치료 중 1970년 4월 12일 서거한 스코필드는 한국 이름 석호필(石虎弼)을 좋아하고 즐겨 사용했다.
정부는 그에게 1968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수여했으며, 그의 유해는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에 안장됐다.
독립기념관은 3월 한 달 동안 특별기획전시장에서 가족사진 등 관련자료를 전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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