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바나=AP/뉴시스】프란치스코 교황(오른쪽)과 러시아 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가 12일(현지시간) 쿠바 아바나에서 만나 서로 대화하고 있다. 2016.02.13 AP)
【서울=뉴시스】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받드는 기독교는 로마가톨릭과 그리스정교(동방정교, 러시아정교), 프로테스탄트 등 3대 교단으로 크게 나뉜다. 가톨릭은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유럽에서 발전을 했고, 동방정교는 러시아와 발칸반도, 서아시아 지역 등 동방에서 교세를 형성했다. 프로테스탄트는 16세기 종교개혁을 기점으로 세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로마가톨릭과 그리스정교로 갈라지게 된 배경은 우선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이었다. 39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사실상 국교로 선언할 때 기독교는 하나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사망과 함께 동·서로 갈라진다. 큰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둘째 아들인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로마와 서로마의 황제로 즉위를 한 것이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기반으로 한 동로마 제국과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는 교리 및 정치 문제로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언어만 하더라도 서로마의 가톨릭교회에서는 라틴어를 사용한 반면 동로마의 그리스정교에서는 헬라어를 사용했다.
8세기 무렵 불거지기 시작한 ‘성상파괴운동’은 결정적으로 불화의 틈을 넓혔다. 730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는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렸다. 모세의 십계명 중 하나인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서로마가 이에 반발하면서 교회분열이 가속화하기 시작했다.
양측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은 11세기 중반 서로마의 교황 레오9세와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마이클 케루라리오스의 격돌이었다. 레오9세는 이탈리아에 있는 그리스정교 교회에게 라틴어 사용을 강요했다. 이에 대해 케루라이오스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가톨릭교회들에게 헬라어 사용을 압박했다. 케루라리오스 총대주교는 이를 거부하는 가톨릭교회의 문을 닫아버리는 강경조치를 취했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1054년 레오 9세는 추기경 훔버트를 특사로 콘스탄티노플에 보냈다. 그러나 케루라리오스 총대주교는 훔버트 특사와의 면담조차 거절했다. 결국 그해 레오9세 교황과 케루라이오스 총대주교는 서로를 파문했다. 이른바 ‘1054 동-서교회 대분열’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렇게 갈라진 동-서 교회가 1000년만에 다시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로마가톨릭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과 러시아정교의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가 12일(현지시간) 쿠바 아바나에서 역사적인 회동을 한 것이다.
기독교가 로마가톨릭과 그리스정교로 갈라지게 된 배경은 우선 로마제국의 동서 분열이었다. 391년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사실상 국교로 선언할 때 기독교는 하나였다. 그러나 로마제국은 395년 테오도시우스 황제의 사망과 함께 동·서로 갈라진다. 큰아들인 아르카디우스와 둘째 아들인 호노리우스가 각각 동로마와 서로마의 황제로 즉위를 한 것이었다.
이후 콘스탄티노플을 기반으로 한 동로마 제국과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는 교리 및 정치 문제로 틈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언어만 하더라도 서로마의 가톨릭교회에서는 라틴어를 사용한 반면 동로마의 그리스정교에서는 헬라어를 사용했다.
8세기 무렵 불거지기 시작한 ‘성상파괴운동’은 결정적으로 불화의 틈을 넓혔다. 730년 동로마 황제 레오 3세는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렸다. 모세의 십계명 중 하나인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는 가르침에 따른 것이었다. 그러나 서로마가 이에 반발하면서 교회분열이 가속화하기 시작했다.
양측이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은 11세기 중반 서로마의 교황 레오9세와 동로마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마이클 케루라리오스의 격돌이었다. 레오9세는 이탈리아에 있는 그리스정교 교회에게 라틴어 사용을 강요했다. 이에 대해 케루라이오스 총대주교는 콘스탄티노플에 있는 가톨릭교회들에게 헬라어 사용을 압박했다. 케루라리오스 총대주교는 이를 거부하는 가톨릭교회의 문을 닫아버리는 강경조치를 취했다.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1054년 레오 9세는 추기경 훔버트를 특사로 콘스탄티노플에 보냈다. 그러나 케루라리오스 총대주교는 훔버트 특사와의 면담조차 거절했다. 결국 그해 레오9세 교황과 케루라이오스 총대주교는 서로를 파문했다. 이른바 ‘1054 동-서교회 대분열’이 발생한 것이었다.
이렇게 갈라진 동-서 교회가 1000년만에 다시 화해의 악수를 나눴다. 로마가톨릭의 수장인 프란치스코 교황과 러시아정교의 수장인 키릴 총대주교가 12일(현지시간) 쿠바 아바나에서 역사적인 회동을 한 것이다.

【아바나=AP/뉴시스】프란치스코 교황(오른쪽)과 러시아 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가 12일(현지시간) 쿠바 아바나에서 만나 서로 포옹하고 있다. 2016.02.13
두 사람의 역사적인 만남은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중재로 성사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교황과 카스트로 대통령은 지난해 미국과 쿠바 간의 외교관계 재개 협상 과정에서 서로 신뢰를 쌓았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키릴 총대주교는 회담에서 중동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의 세력 확대와 관련해 중동과 아프리카 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기독교인의 보호를 논의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탈리아계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2013년 3월 즉위를 한 교황은 그해 7월 브라질을 시작으로 지난해 에콰도르, 볼리비아, 파라과이 순방 등 이미 2차례 남미를 방문한 바 있다. 교황은 12~17일 멕시코 방문을 통해 마약밀매와 무기거래, 조직폭력, 매춘, 부패, 원주민의 권리, 환경 등 다양한 사회 현안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키릴 총대주교는 러시아 정교회의 제16대 총대주교로, 1946년 11월 20일 소련시절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군댜예프이다. 1984년 12월 26일 스몰렌스크와 칼리닌그라드의 수석대주교가 되었으며, 2009년 2월 1일부터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 직을 맡고 있다.
그는 러시아 내에서 친 블라디미르 푸틴파로 정평이 나있다. 지난 2012년 대통령선거 전에 신자들에게 푸틴을 찍으라고 말했는가 하면, 푸틴 치세를 '신의 기적'으로 칭송한 적도 있다. 이에 푸틴은 보수적인 정교회를 러시아의 민족적, 정신적 지주로 올려세움으로써 정치적 후광을 얻어왔다.
프란치스코 교황과 키릴 총대주교는 회담에서 중동의 무장조직 '이슬람국가'(IS)의 세력 확대와 관련해 중동과 아프리카 등 이슬람 극단주의자들로부터 박해를 받는 기독교인의 보호를 논의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이탈리아계 이민자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르헨티나 출신이다. 2013년 3월 즉위를 한 교황은 그해 7월 브라질을 시작으로 지난해 에콰도르, 볼리비아, 파라과이 순방 등 이미 2차례 남미를 방문한 바 있다. 교황은 12~17일 멕시코 방문을 통해 마약밀매와 무기거래, 조직폭력, 매춘, 부패, 원주민의 권리, 환경 등 다양한 사회 현안들에 대한 사회적 관심을 촉구할 것으로 전망된다.
키릴 총대주교는 러시아 정교회의 제16대 총대주교로, 1946년 11월 20일 소련시절 레닌그라드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블라디미르 미하일로비치 군댜예프이다. 1984년 12월 26일 스몰렌스크와 칼리닌그라드의 수석대주교가 되었으며, 2009년 2월 1일부터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 직을 맡고 있다.
그는 러시아 내에서 친 블라디미르 푸틴파로 정평이 나있다. 지난 2012년 대통령선거 전에 신자들에게 푸틴을 찍으라고 말했는가 하면, 푸틴 치세를 '신의 기적'으로 칭송한 적도 있다. 이에 푸틴은 보수적인 정교회를 러시아의 민족적, 정신적 지주로 올려세움으로써 정치적 후광을 얻어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