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뉴시스】강진아 기자 = 불륜관계에 있는 내연남의 요청으로 돈을 준 여성이 그 돈이 내연남 부부의 공동생활 목적인 주택보증금으로 사용됐다며 내연남의 부인에게까지 돈을 돌려달라고 요구할 수 있을까.
부부 중 한쪽이 식대나 의료비, 주택보증금 등 가족의 공동생활을 이어가기 위한 일상의 가사(家事)에 관해 다른 사람에게 돈을 빌린 경우 나머지 배우자도 연대책임이 있다는 민법 규정을 근거로 주장한 것이다.
그러나 법원은 내연녀에게 받은 돈을 부부 공동생활 목적으로 사용하는 등 일상가사채무가 인정되더라도 사회통념상 부인까지 함께 배상할 책임이 없다는 첫 판결을 내놨다.
A씨는 유부남인 B씨와 2010년부터 지난해 5월까지 서로의 배우자 몰래 내연관계를 이어왔다. 심지어 이 남성은 A씨의 고교 시절부터 친구로 지내온 C씨의 남편이다.
내연관계를 이어오던 지난 2012년 1월 B씨는 A씨에게 "돈이 필요하다"고 말했고, A씨는 같은 해 2월 4차례에 걸쳐 4000만원을 송금했다.
B씨는 사업자금과 생활비 용도로 사용하는 계좌로 이 돈을 받아 아내인 C씨의 계좌로 2월과 3월 각각 1000만원과 3200만원을 보냈다. C씨는 돈을 받은 3일 뒤 새로 이사할 집의 계약금과 보증금을 내기 위해 1000만원과 3800만원을 찾아 사용했다.
이후 A씨와 B씨의 불륜관계를 알게 된 A씨의 남편이 지난해 이들을 상대로 이혼 및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내면서 C씨도 친구와 남편의 내연관계를 알게 됐다.
C씨는 친구인 A씨를 상대로 지난해 부정행위에 대한 손해배상 청구소송을 제기했고 1심은 "A씨가 C씨에게 2500만원을 지급하라"고 선고했다.
그러자 A씨는 내연남인 B씨와 친구인 C씨를 상대로 "A씨가 빌린 돈은 주택 임차보증금에 사용됐기 때문에 C씨에게도 일상가사대리에 의한 변제책임 또는 일상가사채무의 연대책임이 있다"며 대여금 청구소송을 제기했다.
사건을 맡은 서울중앙지법 민사27단독 이현복 판사는 "C씨의 책임이 없다"며 "B씨가 A씨에게 4000만원을 지급하라"고 원고 일부 승소 판결했다고 23일 밝혔다.
이 판사는 "B씨가 부인인 C씨를 대리해 A씨에게 돈을 빌린 것이라고 인정할 증거가 없다"며 일상가사대리에 의한 대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이어 B씨가 빌린 돈이 부부가 공동으로 생활하는 주택 보증금에 쓰여 일상가사채무에 해당한다 해도 이 경우 부인에게 책임을 지울 수 없다고 판시했다. 즉, 민법 832조의 일상가사채무 연대책임은 채권자의 신뢰를 보호해 거래의 안전을 위한 것으로 부부에게 무조건적인 책임을 부과하기 위함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판사는 "C씨는 A씨와 남편 B씨의 내연관계를 모른 상태에서 대여금 중 일부가 포함된 돈을 주택 임차보증금으로 사용했다"며 "A씨는 사회통념상 친구 몰래 그 남편과 내연관계를 유지하며 돈을 빌려준 상황에서 C씨가 일상가사채무를 공동으로 갚을 것을 기대하거나 신뢰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A씨와 B씨가 당시 매우 원만한 내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지만 아무 대가나 조건 없이 증여했다고 보기에는 송금 액수가 거액"이라며 "추후 반환을 전제로 4000만원을 대여해준 것으로 인정된다"며 '증여'라는 B씨의 주장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법조계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일상가사채무가 인정되더라도 사회통념상 다른 배우자까지 함께 배상할 책임이 없다는 점을 밝힌 첫 사례인 만큼 당사자간 다툼이 이어질 경우 대법원의 최종 판단이 주목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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