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주네 연극 '스플렌디즈', 이야기가 아닌 의식의 흐름"

기사등록 2015/08/22 11:56:57

최종수정 2016/12/28 15:29:38

연극 '스플렌디즈'(사진 = 프레데릭 노지시엘)
연극 '스플렌디즈'(사진 = 프레데릭 노지시엘)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프랑스 극작가 겸 소설가 장 주네(1910~1986)의 유작 '스플렌디즈(Splendid's)'가 21일 밤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했다. 올해 1월 프랑스 오를레앙 국립연극센터에서 초연돼 호평받았고 월드투어의 시작을 이날 밤 서울에서 알렸다.

 프랑스 현대연극의 선두주자 아르튀르 노지시엘이 연출을 맡은 버전인데 '스타일리시 부조리극'의 새로운 전형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연극적 미학과 영화적 미장센에 방점을 찍는다. 장 주네가 생전 좋아한 필름 누아르를 연상케 한다. 영화 '사랑의 찬가'로 시작하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하녀들' 등으로 '시대의 반항아'로 통하며 부조리극을 대표하는 장 주네가 감독한 유일한 영화다. '스플렌디즈'를 탈고한 2년 뒤인 1950년 제작됐다. 서로를 간절히 원하는 감옥에 갇힌 죄수들과 자위를 하는 이들을 보며 욕망을 느끼는 경찰의 얘기다. 그러나 동성애 표현과 성기 노출 등 높은 수위의 선정적인 표현으로 인해 오랫동안 상영되지 못했다.  

 이후 1990년대에 퐁피두센터, 뉴욕현대미술관 등에서 상영되면서 '관능을 통해 해방의 혁신적인 관점을 보여주는 보편적이고 영원한 사랑의 노래'라는 평을 받으며 예술성을 인정 받았다.

 연극은 이 영화의 흔적을 자연스럽게 녹여낸다. 장 주네의 실제 삶과 그것이 반영된 '사랑의 찬가', '스플렌디즈'의 연결고리와 접점을 자연스레 찾아내며 꿈과 현실의 경계를 허무는 미장센으로 극대화한다. 호텔 벽 위에는 영화 속 장면이 새겨져 있다. 장 주네는 절도죄로 오랜 기간 감옥에 갇혀 지내고 동성애자이기도 했다.  

 '스플렌디즈'는 일곱 명의 갱스터가 인질극을 벌이며 경찰과 대치하는 '긴장감 넘치는' 상황을 그린다. 여덟 등장인물은 하지만 급박하기는 커녕 우주에서 부유하듯 천천히 대사를 읊고 유영하듯 움직인다.

 특히 갱스터 편에 서려는 것처럼 보였던 경찰이 마지막에 그들을 배신, 모두 죽이는 장면은 육감적이며 스산한 죽음의 춤을 연상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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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스플렌디즈'(사진 = 프레데릭 노지시엘)
 '스플렌디즈'는 작품이 탈고된 해로부터 45년이 지난 1993년이 돼서야 그 존재가 알려졌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장 주네 자신은 이 작품이 공연되기를 원치 않았고, 출간하라는 주변의 권유를 계속 뿌리쳤으며 심지어 자신이 갖고 있던 모든 복사본을 파기했다. 하지만 장 주네의 출판담당자가 가지고 있던 한 부의 복사본을 통해 작가 사후에 극적으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러닝타임 26분짜리 영화가 끝나면, 막이 걷히면서 고풍스럽고 우아한 '스플렌디드 호텔'이 모습을 드러낸다. 조명이 들어오지 않은 호텔 복도는 영화 속 배경이 된 프랑스 감옥 복도와 묘하게 겹쳐진다.

 비극으로 마무리되지만 죽음을 맞이한 순간까지 인간적 품위를 지키려는 모습은 애처롭게 느껴진다.

 이날 공연이 끝난 뒤 노지시엘 연출은 관객들과 만난 자리에서 '사랑의 찬가'는 "장 주네가 감옥과 작별을 고하는 작품"이라고 소개했다.

 "장 주네는 감옥에서 감옥과 관련된 수많은 글을 썼다. 종신형을 받았던 그가 갑자기 감면 받아 사회로 나오게 되니 그 이야기와 관련된 소재를 상실해 더 못쓰게 됐다"는 것이다.

 "'스플렌디즈' 속 경찰은 장 주네 자신이다. 갱스터들을 배신하고 다 죽여버림으로써 그들과 이별을 하는 것이다. 연극 속 호텔은 감옥인지 호텔인지 분간이 안 된다.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모호하게 만들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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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튀르 노지시엘(오른쪽), 프랑스 연출가
 노지시엘은 1940년대 할리우드 범죄스릴러물의 양식을 그대로 보여주는 '스플렌디즈'의 생생한 체현을 위해 프랑스어 희곡을 영어로 번역했다. 태연한 듯 무심하면서도 밀도 있는 연극언어를 표현하기에 미국배우들이 적합하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대부분의 대사는 영어다.  

 처음에는 "미국 배우들과 작업하고 싶었다"고 했다. 앞서 그는 '줄리어스 시저' '얀 카르스키' '갈매기' 등에서 미국 배우들과 호흡을 맞췄다. "이들과 잘 어울리는 대본을 고르는 중이었다. 영화를 좋아한 주네도 미국의 갱스터 영화를 좋아했다. '스플렌디즈'가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연극 속에서도 갱스터는 모두 미국 배우인데 경찰만 프랑스 배우다. 경찰이 모든 갱스터를 해치우고 나서 내뱉는 대사는 불어다. 모든 것을 꿈처럼 표현하고자 했다. 갱스터들이 죽기 전에도 호텔 내부가 아닌 외부(예컨대 현재 인질극에 대해 보도하는 라디오 뉴스방송)에서 들려오는 소리는 불어로 처리했다."

 장 주네의 작품이 어렵다고 알려졌는데 노지시엘은 연극이라는 장르 자체가 어렵다고 웃었다. "물론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연극을 쉽게 만들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어렵게 만드는 방식을 택했다. 그게 더 재미있기 때문이다. '스플렌디즈'의 희곡이 어렵게 느껴지는 이유는 인물들이 극 안에서 행위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것을 보여주는게 어려웠다."

 인물들이 호텔에서 무엇을 하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인물들은 삶이 끝났다는 생각에 꿈에 갇혀 있다. 그들이 유일하게 소통할 수 있는 건 언어라 끊임없이 말만 한다. 즉, 장 주네는 이야기를 들려줄 생각이 없다. 이야기가 아닌 의식의 흐름을 보여주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사회의 원칙에 저항한다. 사회의 원칙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나의 원칙이 중요한 거다."    

 이번 공연을 초청한 국립극단(예술감독 김윤철) 은 이후 아르튀르 노지시엘 연출과 함께, 각국의 언어로 출판된 김영하의 소설 '빛의 제국'을 무대화해 2016년 3월 선보인다. 22일 오후 3시 명동예술극장에서 한 차례 더 관객들을 만난다. 만 19세 이상 관람가, 러닝타임 110분(휴식 없음·영화 상영 26분 포함) 공연언어 영어(한국어 자막). 2만~5만원. 국립극단. 1644-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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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주네 연극 '스플렌디즈', 이야기가 아닌 의식의 흐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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