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릉=뉴시스】김경목 기자 = 친일파들은 해방 후 일제강점기 시절의 경력을 디딤돌 삼아 경찰국장, 국회의원, 고위직 관료, 고위직 군인, 변호사, 종교계 대표, 대학 부총장, 교수, 기업인 등을 지내며 기득권을 유지했다.
해방 후 기득권을 유지한 강원 출신 친일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6명에 달한다. 이 중 강릉 출신은 5명이나 됐다.
이들 친일파의 행적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서 발췌해 소개한다.
◇박마리아 = 1906년 3월26일 출생한 박마리아(朴瑪利亞)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여성 친일파다. 그는 1938년 6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가 일본기독여자청년동맹에 흡수 통합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 1941년 12월에는 전시 최대의 민간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을 맡았고 같은 달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 주최 시국부인대강연회의 연사로 참여해 총후 부인의 각오와 자세라는 주제로 강연하며 일제를 찬양했다.
그는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매일신보사에 기고를 통해 일제 침략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고 징병제를 찬양했으며 일본군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조광사에서 주최한 '징병령과 반도 어머니의 결의' 좌담회에 참석한 박마리아는 "나라를 위해 한 몸을 바친다는 것이 어떻게 떳떳한 일인가를 깊이 인식시켜 주어야 되겠습니다. 징병령이라는 것은 천황 폐하께옵서 내리신 여간한 큰 은사가 아닙니다. 황은에 어그러짐 없이 충용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이 혜택에 보은하는 최선의 길입니다"라며 징병제를 찬양했다.
해방 후 1947년 대한걸스카우트 중앙위원 겸 부회장, 1952년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 회장, 1954년 대한부인회본부 최고위원과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했다.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4월28일 남편 이기붕(李起鵬)과 장남 강석, 차남 강욱과 함께 자살했다. 이기붕은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이승만 정권의 부통령까지 올라간 실권자였다.
◇박용익 = 1905년 1월18일 출생한 박용익(朴容益)은 일제강점기에 관료의 자리에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했다.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경상북도 산업부 산업과 속 겸 달성군 속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해방될 때까지 경상북도 예천군수로 재직했다.
해방 후 1947년 경상북도 상공국장을 지냈고 1952년 대한임업개발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1954년 5월에는 강원도 강릉 을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됐다. 1958년 5월 강원도 명주(현재의 강릉)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제4대 민의원에 재선됐다. 1958년 9월 자유당 원내총무와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장, 1959년 7월 자유당 총무위원장을 지냈고 1960년 5월 3·15 부정선거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돼 1961년 12월 혁명재판소 상고심판부에서 거액의 불법 선거자금을 조달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77년 4월6일 사망했다.
◇조평재 = 1909년 8월8일 출생한 조평재(趙平載)는 일제강점기에 판사였다. 1928년 4월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해 1933년 3월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 후 같은 해 5월 조선총독부 철도국 서무과 서기에 임명됐다. 이후 1937년 11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1938년 3월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시보에 임명됐고 1940년 5월 평양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해 1943년 3월까지 재직했다.
해방 후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1946년 2월 법학자동맹 위원장을 맡았고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임시헌법기초위원, 4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맡았다. 1962년 4월부터 1964년 4월까지 서울제일변호사회 회장을 지냈고 대한중석과 삼성물산의 법률고문을 맡았다. 1968년 6월19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최준집 = 1893년 10월25일 출생한 최준집(崔準集)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며 부를 축적했다.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까지 오르며 일제의 민족 수탈과 온갖 만행에 협력했다.
최준집은 1936년 6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주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돼 해방될 때까지 세 차례 연임하면서 매년 600~12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7년 5월 강원도 관선 도회의원에 임명됐고 8월 중앙무진주식회사 감사로 선출됐다. 같은 해 8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자신의 회갑연을 취소하고 국방헌금으로 1000원을 헌납했고 애국기 강원호 헌납을 발기했다.
같은 달 조선군사후원연맹 강원도지회 부회장을 맡았다. 9월 학무국이 주최하는 시국강연회의 강사를 맡아 강원도에서 강연활동을 벌였다. 1937년 10월 내선일가(內鮮一家)의 건설을 강령으로 내건 시중회(時中會)의 이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동해상사주식회사 사장, 관동운수주식회사 사장을 지냈다. 1938년 4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발행하는 매일신보사가 주식회사로 발족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이사로 활동했다.
1938년 7월 강릉공립상업학교 신설비 1만원을 기부하고 1939년 12월 감수포장을 받았다. 1939년 4월 강릉육군특별지원병후원회 고문을, 8월 호국신사봉찬회 강릉위원부 위원을, 9월 강릉방공위원회 위원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9월 전시 최대의 민간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이 조직될 때 강원도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2월 고도국방화학병기비로 1만원을 헌납했다. 1943년 8월 징병제 실시 기념 사업비로 국민총력조선연맹에 1만원을 기부하고 1944년 6월 감수포장을 받았다.
해방 후 1949년 8월 반민특위에 자수해 9월에 기소유예 판결을 받은 뒤 1956년 강릉합동주조주식회사, 동해상사주식회사 사장으로 활동하는 등 기업인으로 살다 1970년 6월4일 사망했다.
◇최형직 = 1895년 9월13일 출생한 최형직(崔炯稷)은 일제강점기에 관료의 자리에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했다.
1919년 4월 강원도 양구군 서기로 임명된 그는 1929년부터 강원도 내무부 지방과 속을 지내던 중 1932년 10월 조선쇼와 5년국세조사기념장을 받았다. 1936년 5월 강원도 평강군수 재직 중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1937년 8월 평강군 군사후원연맹을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1939년 5월 함흥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에 임명돼 1942년 12월까지 군수와 겸직했다. 촉탁보호사는 사상범들이 출옥 후 다시 항일운동에 나서지 못하게 사상적 과오를 청산하고 황도정신을 자각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이라는 본연의 자세로 복귀하도록 전향시키는 임무를 담당하는 직책이다.
평강군수와 삼척군수로 재직하면서 중일전쟁과 관련한 군수품 공출, 군사 후원·징발, 국방사상 보급 등 전시 업무를 적극 수행해 '지난사변공적조서'에 이름이 올랐다. 1940년 2월 훈6등 서보장을 받았고 4월에는 중일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6등 단광욱일장을 받았다. 또 같은 해 6월 고등관 5등급으로 승급됐고 8월에 종6위로 승서됐다.
해방 후 1950년대 초·중반까지 강릉군 주문진읍장을 지냈고 1975년 3월12일 사망했다.
[email protected]
해방 후 기득권을 유지한 강원 출신 친일파는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따르면 16명에 달한다. 이 중 강릉 출신은 5명이나 됐다.
이들 친일파의 행적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서 발췌해 소개한다.
◇박마리아 = 1906년 3월26일 출생한 박마리아(朴瑪利亞)는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여성 친일파다. 그는 1938년 6월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연합회 실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조선여자기독교청년회가 일본기독여자청년동맹에 흡수 통합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또 1941년 12월에는 전시 최대의 민간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 부인대 지도위원을 맡았고 같은 달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사 주최 시국부인대강연회의 연사로 참여해 총후 부인의 각오와 자세라는 주제로 강연하며 일제를 찬양했다.
그는 1941년부터 1943년까지 매일신보사에 기고를 통해 일제 침략 전쟁의 승리를 확신하고 징병제를 찬양했으며 일본군 지원을 독려했다. 1942년 조광사에서 주최한 '징병령과 반도 어머니의 결의' 좌담회에 참석한 박마리아는 "나라를 위해 한 몸을 바친다는 것이 어떻게 떳떳한 일인가를 깊이 인식시켜 주어야 되겠습니다. 징병령이라는 것은 천황 폐하께옵서 내리신 여간한 큰 은사가 아닙니다. 황은에 어그러짐 없이 충용하고 훌륭한 황국신민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이 혜택에 보은하는 최선의 길입니다"라며 징병제를 찬양했다.
해방 후 1947년 대한걸스카우트 중앙위원 겸 부회장, 1952년 대한여자기독교청년연합회(YWCA) 회장, 1954년 대한부인회본부 최고위원과 이화여자대학교 부총장을 역임했다. 4·19 혁명 직후인 1960년 4월28일 남편 이기붕(李起鵬)과 장남 강석, 차남 강욱과 함께 자살했다. 이기붕은 사상 최악의 부정선거로 이승만 정권의 부통령까지 올라간 실권자였다.
◇박용익 = 1905년 1월18일 출생한 박용익(朴容益)은 일제강점기에 관료의 자리에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했다. 1930년 3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과를 졸업하고 같은 해 경상북도 산업부 산업과 속 겸 달성군 속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했고 해방될 때까지 경상북도 예천군수로 재직했다.
해방 후 1947년 경상북도 상공국장을 지냈고 1952년 대한임업개발주식회사 사장에 취임했다. 1954년 5월에는 강원도 강릉 을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해 제3대 민의원에 당선됐다. 1958년 5월 강원도 명주(현재의 강릉)에서 자유당 소속으로 출마해 제4대 민의원에 재선됐다. 1958년 9월 자유당 원내총무와 국회 운영위원회 위원장, 1959년 7월 자유당 총무위원장을 지냈고 1960년 5월 3·15 부정선거에 관여한 혐의로 체포돼 1961년 12월 혁명재판소 상고심판부에서 거액의 불법 선거자금을 조달한 혐의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1977년 4월6일 사망했다.
◇조평재 = 1909년 8월8일 출생한 조평재(趙平載)는 일제강점기에 판사였다. 1928년 4월 경성제국대학에 입학해 1933년 3월 법문학부 법학과를 졸업 후 같은 해 5월 조선총독부 철도국 서무과 서기에 임명됐다. 이후 1937년 11월 일본 고등문관시험 사법과에 합격해 1938년 3월 경성지방법원 및 경성지방법원 검사국 사법관시보에 임명됐고 1940년 5월 평양지방법원 판사로 부임해 1943년 3월까지 재직했다.
해방 후 서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1946년 2월 법학자동맹 위원장을 맡았고 3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임시헌법기초위원, 4월 민주주의민족전선 상임위원을 맡았다. 1962년 4월부터 1964년 4월까지 서울제일변호사회 회장을 지냈고 대한중석과 삼성물산의 법률고문을 맡았다. 1968년 6월19일 서울에서 사망했다.
◇최준집 = 1893년 10월25일 출생한 최준집(崔準集)은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하며 부를 축적했다. 조선총독 자문기구인 중추원 참의까지 오르며 일제의 민족 수탈과 온갖 만행에 협력했다.
최준집은 1936년 6월 조선총독의 자문기구인 중추원의 주임관 대우 참의에 임명돼 해방될 때까지 세 차례 연임하면서 매년 600~1200원의 수당을 받았다. 1937년 5월 강원도 관선 도회의원에 임명됐고 8월 중앙무진주식회사 감사로 선출됐다. 같은 해 8월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자신의 회갑연을 취소하고 국방헌금으로 1000원을 헌납했고 애국기 강원호 헌납을 발기했다.
같은 달 조선군사후원연맹 강원도지회 부회장을 맡았다. 9월 학무국이 주최하는 시국강연회의 강사를 맡아 강원도에서 강연활동을 벌였다. 1937년 10월 내선일가(內鮮一家)의 건설을 강령으로 내건 시중회(時中會)의 이사로 활동했다. 같은 해 동해상사주식회사 사장, 관동운수주식회사 사장을 지냈다. 1938년 4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를 발행하는 매일신보사가 주식회사로 발족할 때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이사로 활동했다.
1938년 7월 강릉공립상업학교 신설비 1만원을 기부하고 1939년 12월 감수포장을 받았다. 1939년 4월 강릉육군특별지원병후원회 고문을, 8월 호국신사봉찬회 강릉위원부 위원을, 9월 강릉방공위원회 위원을, 11월 조선유도연합회 평의원을 맡았다. 1941년 9월 전시 최대의 민간 전쟁협력단체인 조선임전보국단이 조직될 때 강원도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2월 고도국방화학병기비로 1만원을 헌납했다. 1943년 8월 징병제 실시 기념 사업비로 국민총력조선연맹에 1만원을 기부하고 1944년 6월 감수포장을 받았다.
해방 후 1949년 8월 반민특위에 자수해 9월에 기소유예 판결을 받은 뒤 1956년 강릉합동주조주식회사, 동해상사주식회사 사장으로 활동하는 등 기업인으로 살다 1970년 6월4일 사망했다.
◇최형직 = 1895년 9월13일 출생한 최형직(崔炯稷)은 일제강점기에 관료의 자리에서 일본제국주의에 협력했다.
1919년 4월 강원도 양구군 서기로 임명된 그는 1929년부터 강원도 내무부 지방과 속을 지내던 중 1932년 10월 조선쇼와 5년국세조사기념장을 받았다. 1936년 5월 강원도 평강군수 재직 중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1937년 8월 평강군 군사후원연맹을 결성하고 회장을 맡았다. 1939년 5월 함흥보호관찰소 촉탁보호사에 임명돼 1942년 12월까지 군수와 겸직했다. 촉탁보호사는 사상범들이 출옥 후 다시 항일운동에 나서지 못하게 사상적 과오를 청산하고 황도정신을 자각하여 충량한 황국신민이라는 본연의 자세로 복귀하도록 전향시키는 임무를 담당하는 직책이다.
평강군수와 삼척군수로 재직하면서 중일전쟁과 관련한 군수품 공출, 군사 후원·징발, 국방사상 보급 등 전시 업무를 적극 수행해 '지난사변공적조서'에 이름이 올랐다. 1940년 2월 훈6등 서보장을 받았고 4월에는 중일전쟁에 협력한 공로를 인정받아 훈6등 단광욱일장을 받았다. 또 같은 해 6월 고등관 5등급으로 승급됐고 8월에 종6위로 승서됐다.
해방 후 1950년대 초·중반까지 강릉군 주문진읍장을 지냈고 1975년 3월12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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